뉴스레터 19호를 발행합니다.

 

″내가 ‘인간적이며 직접적인’ 죄책감이라고 말한 것은 나의 글·책과 그 독자와의 정신·사상적·지적, 그리고 실천적 책임감에서이다. 나는 나의 글을 통해서 맺어진 많은 우애를 흐뭇하게 생각한다. 고맙게 생각하고, 얼마쯤은 자랑으로도 여기고 있다. 그럴수록 나의 글로 말미암아서 직접으로 또는 간접으로 고통을 겪은(또는 겪고 있는) 후배·후학들에 대해서 도덕적 책임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필자와 독자 사이에 그래야 할 아무런 계약은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70년대·80년대의 가혹하고 치열했던 현실 속에서는 달랐다.

어쨌든 그런 내력을 지닌 수많은 후배·후학들은 예외없이 착하고, 순수 하고, 양심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자신의 가슴으로 아파하는 타고난 휴머니스트들이었다. 그들은 이 민족의 정예분자들이었다. 그런 영혼에 접함으로써 나 자신의 영혼은 더욱 살쪄갔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처럼 아름답고 순결한 영혼들이 형용 할 수 없이 악한 무리에 의해서 온갖 수모와 좌절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오늘도 겪고 있다. 70년대·80년대에 걸쳐서 그들이 흘린 눈물과 참아야 했던 상처에 대해서 나는 마땅히 한 사람이 나누어져야 할 만큼의 도덕적 책임이 있다. 그들의 불행에 대해서 간접적일 뿐 아니라 때로는 직접적인 원인자로서의 죄책감으로 가슴아파하는 것이다.

지난 시기의 나와 독자들과의 만남을 생각하면서 가끔 입센의 『인형의 집』을 떠올리는 때가 있다. 입센은 그의 글을 통해서 봉건적 생존조건(환경)에 길들여진 젊은 영혼에게 허위·속박·전통·복종·비인간적 실체를 의식케 하였다. 노라로 대표되는 수많은 청년·학생·남녀에게 스스로 하나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 반항의 정신을 가르쳤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반항했고, 위선과 허위와 구속의 틀(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인간해방’이다.

그런데 입센은 자신에게 상당한 원인이 있는 이 ‘뛰쳐나간’ 젊은이들이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의식’은 주었지만 ‘방법’과 성공의 ‘보장’을 제공치 않았다.

‘새 의식’을 갖게 된 많은 노라들은 길가에서 헤매고 있지나 않을까? 낡은 것에 반항하고 거부한 그들이 새로운 안주의 틀을 찾지 못하고 좌절 하지나 않았는지? 그래서 다시 그들이 거부했던 닭집으로 머리숙이고 되돌아오고 있지는 않는지?″

‘독자의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의 제목으로 한길문학 1990년 5월호(창간호)에 발표되고, <自由人,자유인>(1990)에 ‘30년 집필생활의 회상-잠시 펜을 놓고 쉬는 마음’으로 제목이 바뀌어 수록된 리영희 글입니다. 4·19까지를 다룬 리영희의 자전적 에세이 <역정>의 후속편을 리영희가 직접 썼다면 1990년까지 분량의 초록에 해당될 수 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리영희는 이 글에서 의식화 시킨 사람이 되어버린 자신이 느끼는 고통과 책임감을 쓰고 있습니다. 집을 뛰쳐나간 그들이 좌절하여 다시 그들이 거부했던 닭집으로 머리 숙이고 되돌아오는 것은 아닐지 마음아파 합니다. 실제로 리영희는 온갖 시국사건에 반쯤은 공범이란 생각으로 증언대에 기꺼이 섰고 그들이 출소 후 차린 출판사의 부탁은 거절하기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이번호에는 그들은 어땠는지를 리영희가 교수로 재직했던 한양대 제자들의 기억을 당시 조교였던 윤창빈 선생이 모으고 정리한 글을 통해 들어보았습니다. 흩어져있던 자료와 사진을 모아주고 한 글로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호 아카이브는 루쉰으로 논문을 쓰기도 한 최진호 선생이 ‘리영희 그리고 의식화’에 관한 글을 리영희의 ‘루쉰 독서’를 가지고 써주셨습니다. 귀한 글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영희상 추천일이 며칠 안 남았습니다. 뉴스레터 독자분의 밝은눈으로 좋은 추천을 기다립니다.

재단 소식

제11회 리영희상 후보자 공모

리영희재단은 우리 사회의 은폐된 진실을 밝히고 우상을 타파하는 데 한평생을 바친 리영희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재단에서는 그 일환으로 2013리영희상을 제정해 수여해 왔습니다. 선생의 정신을 오늘의 험난한 현장에서 이뤄내고자 애쓴 개인이나 단체를 격려하고, 지지하기 위함입니다. 리영희 정신의 알맹이는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용기 있게 진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리영희 정신 실천에 앞장선 인물 또는 단체를 적극 추천해주시기 바랍니다. 분야와 국적에 대한 제한은 없습니다.


시상 대상: 분야와 국적에 관계없이 거짓을 드러내고 진실을 밝히는 데 뛰어난 공로를 세운 개인이나 단체

시상 내역: 상패, 상금 1,000만원

시상 일자: 2023127일 목요일

추천 방법: 이메일 통한 추천서 제출

추천서 양식: 하단 후보자 추천버튼

이메일 주소: rheeyeunghui@gmail.com

추천 마감: 118()

문의: 리영희재단 (02) 710-0286

재단과 함께하는 사람들

리영희와 행당동 17번지의 풍경 셋

 
최상명, 천세익, 윤창빈 
길은 한참을 이어졌기에 사제 간에 대화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학생운동 시절 리영희 선생님 과목을 수강했다가 F학점을 받은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제법 시험을 잘 쳤다고 생각했는데, F학점의 이유는 출석 미달이었다. 87년은 1년 내내 민주화투쟁으로 한 해를 보낸 해였다. 그해 나는 대한민국의 여느 청년들처럼 민주화운동에 나섰다. 그래서 사실 수업에 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민주화의 국민적 여망과 역사적 사명이 곧 시대정신이었기에 많은 교수님들께서 학생운동 간부들에게 학점을 주시는 관행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당시 민주화운동의 사상적 지주의 한 분이셨던 리영희 선생님으로부터 F학점을 받은 터여서 못내 아쉬웠었다.

내 볼멘 기억이 단초가 되어 시작된 이야기는 이내 이어진 선생님의 대답으로 급선회했다. “최군! 그래 요즘 자네가 이루려 했던 민주주의가 얼마나 성숙되었다고 생각하나?” 순간 당황했다. 사실 밀레니엄 첫해, 나는 20세기의 고루한 역사를 뒤로하고 앞으로 닥칠 미래만을 고민하고 있었다. “제도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성숙도면에서 아직 선진화되기에는 멀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자 선생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민주주의의 제도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우리나라가 아직 선진국은 아니라고? 당신 대답은 다 추상적이고 인지함정에 빠져 있어. 87년 이후 민주화가 되었다고 믿고 민주화 이후의 선진화단계가 다음 성취목표라고 스스로들을 강제하면서 아주 기본적인 것들을 등한시하고 있어. 그래서 IMF도 오고, 재벌과 언론이 헌법 위에 있는데도 민주화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지. 그게 다 기본 책무를 하지 않아서 오는 착각이야. 어쩌겠어? 게으르면 고생하는 거지, 학점도 기본적 태도 때문에 F를 준 거야. 서운해 말라.” 몇 마디 말씀에 뒷머리를 맞은 듯한 혼란이 왔다.

리영희 아카이브

리영희와 루쉰 그리고 의식화


최진호 / 읽기의집 및 점필재연구소 연구원
리영희는 비판적 중국 연구자의 한 사람이자 1970·8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이다. 이때 리영희가 말하는 비판은 일견 진실과 거짓, 진리와 오류, 이성과 우상을 분할하는 척도의 정립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을 출판한 뒤 그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D검사에 맞서 자신의 상고 이유서를 썼던 것처럼 그가 말을 하는 자리는 판사의 자리가 아니라(척도를 정립하는 자리가 아니라) 일종의 ‘범죄자’의 자리였다. D검사로 표상되는 국가권력은 “학생들이 길에 나와 시위를 하지 않는 사회, 노동자가 하루 몇 푼의 임금을 받고 상당액을 자본주에게 뺏겨도 파업을 하지 않거나, 꿈쩍 않고 12시간을 일한 뒤에 주는 대로 아무 말 없이 받아가지고 돌아가는 그런 사회를 안정된 사회”로 본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있어야 하는 것 그대로’를 말하는 사람은 비국민의 자리로 밀려가게 된다. 비국민의 체험은 공동체 밖의 체험이며 거꾸로 이 체험이 그 공동체의 경계들을 바꾸어간다. 이런 의미에서 리영희에게 비판은 가치와 척도를 이행시키는 것과 관련된다.

발행인: 김효순(리영희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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