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가는 대로 흘러간 여행
↑ 세메스터 티켓(Semester Ticket)의 이용 범위 지도에 표시한 여행 루트
180유로(약 25만원)에 세메스터 티켓 (Semester Ticket; 학기권)을 구매했다. 학교가 위치한 만하임을 중심으로 근교 도시까지의 대중교통을 6개월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학생 교통권이다. 아쉽게도 고속철도와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의 교통편은 지원하지 않아 구매하기까지 신중하게 고민했다. 그래도 만하임에 머무는 동안 고민 없이 대중교통을 편하게 이용하고 싶어서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교통권이 생긴 김에 아무 데서나 타고 내려보는 트램 여행을 가기로 했다. 목적지 없이 떠나는 여행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 있었다. 아무 버스나 지하철에 타고, 마음에 드는 동네가 나오면 내려서 정처 없이 걷다가, 또 다른 정류장에서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 그런 즉흥 여행. 한국에서는 한 번도 시도하지 못했는데 독일에서 해본다니 떨렸다. 소심쟁이의 용감한 도전에는 마켓에도 같이 갔던 현주가 함께 해줬다.

우리는 결국 하루 만에 버스 2대와 트램 6개 라인을 탔다. 다녀온 뒤에 오늘의 여행 루트를 지도에 그려보았다. 나름 여러 군데에 다녀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려보니 만하임 중앙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다녀온 꼴이었다. 외진 곳에서 길을 잃을까 무서워 나도 모르게 중앙역으로 회귀했나 보다.
↑ 함께 여행한 현주와 트램을 기다리며
↑ 우연히 발견한 인기 만점 젤라또 가게
여행에서는 새로운 풍경을 많이 만났다. 어떤 트램에서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젤라또 집을 발견해서 내렸다. 나도 줄에 합류해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맛봤다. 어떤 버스에서는 차가 슝슝 달리고 큰 공장이 위치한 대로변에 내리는 바람에 길을 잃기도 했다. 또 다른 트램에서는 종점에 가버렸는데, 주택으로 가득한 주거 단지여서 평범한 독일 가족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어떤 역에서는 입구를 찾지 못해 헤매다가 일반 도로가 아닌 육교처럼 높은 곳에서 트램을 타보기도 했다.

길을 헤매기도 했고 춥기도 했지만, 옆 도시인 루드빅스하펜도 가보고 버스도 타볼 수 있어 즐거웠다. 앞으로 지내게 될 만하임이라는 도시와 조금은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 바인하임(Weinheim) 역
이틀 뒤, 습관처럼 날씨 앱을 켰다. 다음 주 내내 흐리고 비가 올 예정이었다. 파란 하늘을 누리기 위해 즉흥으로 떠났다. 이번엔 혼자였다. 혼자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니 조금은 적응이 됐나 보다.

주변에 하이델베르크를 빼고는 잘 알려진 도시가 없었다. 어디를 갈까하는 고민 끝에 오늘의 여행지는 바인하임(Weinheim)이라는 가까운 소도시로 정했다. 세메스터 티켓으로 무궁화호 같은 저속 열차를 타면 20분 안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순히 기차를 타고 산책하며 바람 쐴 목적으로 나왔던 건데 막상 가보니 정말로 예쁜 마을이었다.
새로운 도시에 갈 때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차역, 주요 상점가, 성 등을 찾아 관광할 구역을 미리 파악해두었다. 그리고 여행지에 도착하면 지도에 표시된 구역 내에서 아무 골목이나 돌아다니며 산책했다.
발 가는 대로 흘러가는 여행은 참 즐거웠다. 구 시가지인 알슈타트(Altstadt)에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건물들이 가득했다. 소도시이다 보니 만하임보다 여유로운 분위기의 집들도 많았다. 담이나 벽이 없이 뻥 뚫린 마당에서 흙놀이하는 아이들과, 작은 수로에 카약을 띄우고 있는 가족을 보았다. 겨울과 봄 사이, 이들의 평범한 주말 오후 일상이 부러웠다.
↑ 공원에서 벤치에 앉아 본 장면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한 공원을 발견했다. 올림픽공원 나 홀로 나무 쪽이나 성남시 중앙공원의 야외공연장처럼 크고 아늑한 나무가 있는 공원이었다. 너무 가파르지 않은 경사를 따라 벤치가 늘어져있고 산책로와 잔디밭이 마련되어 있었다. 꼭대기라고 하기에도 머쓱한 동산 정상에 올라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공원이 한눈에 펼쳐졌다. 그 여유와 평화에 압도되었다.
↑ 그때 그린 그림
음악을 들으며,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아이패드에 그림으로 그려봤다. 그림도 잘 그리지 못하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의 제약 없이, 잘 그려야 한다는 생각 없이, 단지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슥슥 그리는 과정이 참 평안했다.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평안해 보였고, 사람들은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공원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머물고 있었다. 찰나였지만 잠깐이나마 평범한 독일 소도시에서의 주말 오후를 경험할 수 있어 행복했다.
↑ 빈덱 성(Windeck Castle)에서 보이는 시내 전경
시내 쪽에만 있기에는 조금 아쉬워서 성에도 올라갔다. 빈덱 성(Windeck Castle)이라는 곳이었다. 구글맵에 의하면 20분 정도 올라가야 하는데 굉장히 가파른 길이라 이 길이 맞나 끊임없이 의심했다. 다행히 그 길이 맞았다. 도착하니 성 뒤꽁무니여서 성 한 바퀴를 빙 돌았더니 뻥 뚫린 도시 뷰가 나타났다. 평야인 이쪽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온 거라, 수평선이 보일 정도였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만난 적 없는 풍경이었다.

한창 감탄하고 있는데 우연히도 만하임에서 만났던 대만 친구들을 마주쳤다. 혼자 여행하다가 친구를 만나다니? 서울에서도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교환학생들이 노는 방식과 들르는 도시가 다 거기서 거기라 오히려 한 학기 동안 마주칠 일이 많았다.) 친구들 덕분에 예쁜 사진도 남겼다. 사진 스팟을 삼을만한 곳에서 잠깐 만나는, 따로 또 같이 하는 여행도 재밌겠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혼자 논 것도 한 달 만인가? 정말 오랜만이었다. 예쁜 도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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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님, 아리솔입니다. 벌써 10번째 레터에요! 주말은 잘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어제 낮에 햇빛을 쬐러 외출했다가 늦은 시간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드디어 적응기가 끝나고 여행 이야기가 시작되었어요! 다음에는 쾰른과 베를린으로의 여행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간 저에게도 많은 편지가 도착했어요. 고맙습니다. 밀린 답장을 드리고 싶어 오늘은 질문을 쉬어갈게요. 그리고 다음 레터에서는 현재까지의 레터에 대한 만족도 조사를 통해 피드백을 받으려고 해요. 답변주시기 쉽게 최대한 구체적으로 질문을 준비해볼게요.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그럼 일요일 푹 쉬시고 다음 주에 또 뵈어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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