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와 본문 사이 ‘면지’에 저자 사인이 들어있는 책이 오기도 한다. 그런 책은 한 번 더 손이 간다.
안녕하세요. 어느덧 기자 생활 6년 차를 맞은 정민호입니다.
얼마 전, 동종업계의 오래된 선배를 만났습니다. 선배는 양극화 시대라고 하는, 다른 입장이나 생각을 가진 이들과 대화할 수 없게 된 상황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도 조곤조곤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어요. (이 얘기를 할 때 조곤조곤 말씀하셨습니다.) 대학에서 ‘기자의 역할’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도 비슷한 내용을 접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기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대화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관계나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따지고 보면 저는 대화를 잘하는 편이 아닌 것 같아요. 말주변도 없고 갈등이 생겼을 땐 ‘말하기’보다 ‘참기’를 자주 택하거든요. (할많하않은 정신에 해롭습니다….) 싫은 말 못 하는 저는 속마음을 털어놓기보다 어딘가 글로 쓰는 쪽이 더 편합니다. 싫은 말도 글로 한번 써봐야, 내 감정이 이렇구나, 이런 얘기를 해야겠다, 정리가 되더라고요.
일주일에 한 번 뉴스레터로 여러분에게 ‘말하기’를 시도하는 과정이 제게 정말 유익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곤조곤하게 써서 보내주신 피드백을 보면, 대화의 의지가 샘솟기도 하고요. 이 뉴스레터가, 읽고 나서 말을 건네고 싶은,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은 편지였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복음과상황 이범진 편집장님 글을 보내드립니다. 읽고 나면 편집장님의 사인이 받고 싶어지는 글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국 사인을 받기로 했답니다.) 이유가 궁금하시죠. 아래 내용으로 확인해주세요.
이어서, 같이 읽으면 좋을 글을 한 편 더 싣습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선율’ 이재원 대표님 글입니다. 책 표지를 넘기면 가장 먼저 나오는 ‘면지’에 관한 이야기예요. 오늘 뉴스레터도 재밌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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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을 소개할 때면 늘 고민에 빠진다. 한정된 지면 탓에 다 넣을 수 없기 때문. 종종 사람들로부터 지면에 소개할 책을 어떻게 고르냐는 질문을 받는다. 보통은 사무실에 도착한 책 중에 고른다. 문턱이 낮다면 낮고, 높다면 한없이 높은 것이다. 요즘은 매체에 소개되기보다 인플루언서의 SNS 언급이 더 마케팅 효과가 크다고 믿기에, 잡지사에 보도자료와 신간을 보내주는 수고로움은 보통 이상의 결심이다.
무엇보다 출판사들이 어려운 형편에도 신간을 챙겨서 보내주는 것은 복상 독자들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한 호에 출판사가 겹치지 않도록 고루 지면을 할애한다. 같은 출판사의 책 중에서 어느 책을 소개할지 고르는 일이 가장 어렵다. (한 달에 여러 권 내는 출판사는 억울할 수도 있지만, 그걸 이해하고 감내하는 게 또 그런 출판사의 저력이다.)
가끔 표지와 본문 사이 ‘면지’에 저자 사인이 들어있는 책이 오기도 한다. 그런 책은 아무래도 한 번 더 손이 간다. 면지에 적힌 글씨에는 묘한 힘이 있다. 글씨체와 펜의 종류 등 저자 사인이 풍기는 고유한 매력이 있다. 두 책 중 어느 책을 소개할지 고민할 때는, 이런 책이 소개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건 저자에게 사인받기를 좋아하는 내 경우이다. (다른 에디터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프로페셔널이다.) 직장 워크숍으로 서점 탐방을 했을 때도, 서점 주인이 직접 쓴 책이 있어 당연히 그 책을 사서 사인을 받았다. (다른 에디터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프로페셔널이다.)
특히 인터뷰할 때는 인터뷰이가 쓴 책을 갖고 가서 꼭 사인을 받는다. 얼마 전,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인터뷰 때는 한마디도 제대로 거들지 못했지만, 인터뷰 후에는 저돌적으로 책을 내밀어 사인을 받아냈다. 내 눈치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는 번역된 책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사실 인터뷰 내용과 관련 있는 책은 따로 있었지만, 인터뷰 날에서야 그 책을 이북(E-book)으로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북에는 면지가 없어 사인을 받을 수 없다. 어쨌든 사인을 받고 나니, 마음이 더 너그러워졌다. 그와 오랜 벗이라도 된 듯 책장 구석 뒷줄에 박아둔 그의 두꺼운 책을 꺼낸다.
이렇게 사인받은 책은 이사나 대청소 때 대대적인 책 분리배출에서도 살아남는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왕왕 있다. 저자가 나를 음해하거나 윤리적으로 큰 사고를 칠 때. 사인으로 훼손된 책이지만 중고서점에 1천 원에 내놓는다. 소심한 복수다.
한편, 사인이 있는 책을 중고서점에서 발견하면 바로 사기도 한다. 그중 아끼는 책은 백기완 선생님의 《백두산 천지》. 내가 직접 받은 사인은 아니지만, 이 책에는 뭔가 개성이 더 실려있는 듯하다.
외서의 경우 번역자 사인을 받는다. 지난 연말에는 김포 독자모임에서 《지복직관》(한스 부어스마 지음, 새물결플러스)의 번역자 김광남 선생님을 만났다. 마침 장소가 동네 책방이었고, 그 책방 한편에 꽂혀있던 《지복직관》을 발견하고 구매해 사인을 받았다. 사장님은 자기가 읽던 책이라며 팔기 민망해하셨지만, 언제 또 김광남 선생님을 만날까 싶어 강매했다. 4만 5천 원의 가격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함께 갔던 이사장님이 책을 한 권씩 사주기로 한 터였다.
가끔은 내가 떠난 뒤, 누군가 내 책장을 정리해야 한다면 이 면지의 사인들을 보게 될까, 그러면 몇 권 남겨뒀으면 좋겠다는 망상에 빠지기도 한다.
글꼴에는 어느 정도 얼이 기려있다. 5년 전 돌아가신 스승님 책은 영문이라 읽지 않지만, 면지는 종종 펼쳐 본다. 2006년 가을에 쓴 이 글씨의 당당함이 좋다. 오랜만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는 암 투병 중이셨다. 너무 마른 모습에 당황해 아무 말 못 하고 서있는 나를 보시곤, “나 아직 안 죽었어!” 하며 무거운 공기를 바꾸던 그 호탕함. 그립다. 존경하는 스승님의 좋은 책이지만, 면지의 사인이 없었다면 굳이 빌려줬다가 사이가 소원해진 사람에게 몇 년 만에 연락해 다시 돌려받는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면지의 사인이 이렇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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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인된 책 각 5권, 총 10권을 증정하려고 한다. (경품이 넘치는 뉴스레터! 피드백을 남겨주신 분들 중 열 분. 원하시는 책을 골라주신 분께 우선권을 드리겠습니다. 신청이 몰리면 다른 책이 발송될 수 있습니다.)
1) 《캐스팅》(우희덕 지음, 서로북스 펴냄): 〈복음과상황〉 2023년 11월호 커버스토리 “어떤 웃음”의 A/S가 될 만한 코미디 소설이다.(관련 기사) ‘아재 개그’를 통해 스토리를 전개하는 소설. 비하와 조롱은 없고, 위트와 위로가 있다. 세계문학상 수상 작가의 두 번째 작품으로, 내가 책 나오는 일을 조금 도왔다. 특별히 면지 색 고르는 데 영향력을 끼쳤다. (저자 사인본)
2) 《싸이코 패밀리라도 괜찮아》(고직한·김정희 지음, 잉클링즈 펴냄): 약 30년 기나긴 정신질환의 터널을 걷는 중인 가족의 이야기. 면지에는 저자 사인이 아닌, 인터뷰를 진행하고 정리한 인터뷰어(이범진) 사인이 들어갈 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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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내돈내산’ 도서입니다. 조건 없이(SNS에 홍보만 좀…) 드리는 대신, 중고서점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범진 〈복음과상황〉 편집장으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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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은 표지를 넘기면 공백의 ‘색종이’가 한 장 혹은 두 장 나온다. 이를 ‘면지’라 부른다. 언젠가 제작부 선배에게 ‘면지’를 왜 면지라 부르는지 물었다. 선배는 한자와 영어를 써서 보여줬다. ‘면지’(面紙, endpaper). 그러면서 오래전에 제본 기술이 지금보다 현저히 떨어질 때, 표지와 본문 용지가 잘 붙지 않거나 본문 용지가 틀어지거나 빠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넣은 종이라고 했다. 출판사 선배답게 정말 길고 지루하게 설명해줬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1. 내지와 표지 사이에 풀칠하여 끼워 넣어 책을 잡아주는 역할. 2. 표지와 표제면 사이의 책장 역할. 3. 책의 본문과 표지를 연결하는 역할.
그래서 면지는 본문 용지보다 두껍고 표지 용지보다 얇은 종이를 쓰되 본문 용지를 둘러싼 후 그 위에 표지를 붙였다고 했다. 그러더니 궁금한 건 제대로 알아야 한다며 제본소에 데려가 모든 공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역시 질문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
제본소의 최신식 기술을 보기만 해도 다 알 것 같은데, 실시간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설명을 들으며 정말 궁금했으나 끝까지 묻지 않았던 질문이 하나 있었다. 면지로 본문을 감싸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제본 기술이 발전한 지금, 여전히 면지가 들어가는 이유가 뭘까?
정확한 답은 듣지 못했지만 힌트는 있었다. 많은 출판사가 이전에 사용하던 ‘면지’용 용지가 아닌 본문 용지에 면지처럼 보이게 인쇄하는 ‘제물면지’를 사용했다. 이는 앞서 소개한 세 가지 역할 중 표지와 표제면 사이 책장 역할로만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역할이라면 굳이 인쇄해서 전통적인 면지처럼 보이지 않아도 될 텐데 ‘전통’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엿보이는 듯했다.
전통을 지키려는 마음을 빼면 면지의 가장 좋은 역할은 저자 사인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제물면지’를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면지 용지를 사용한다. 조금 더 질 좋은 종이에 저자 사인을 하면 사인받는 독자와 사인하는 저자 모두에게 괜찮은 일이니, 이보다 좋은 역할이 어딨겠나 싶다지만 솔직히 말하면 속된 말로 ‘쿠세’일 뿐이다.
면지가 뭐냐 물었더니 귀에 폭포수가 떨어지고 피가 날 정도로 그 이유를 듣게 돼서 그런가, 면지가 그냥 면지로 끝나지 않았다. 면지를 볼 때마다 ‘왜 이리 출판 선배들은 말이 많을까’가 아니고, 출판은 어떤 콘텐츠 산업 중에서도 변화와는 거리가 가장 먼 곳이고, ‘면지’가 그 대표적인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면지가 바뀌는 것도 이리 쉽지 않으니 다른 것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특히 출판사에서 출판사로, 편집자에서 편집자로 전해져 오는 비기(秘記)와도 같은 ‘편집원칙’이 발동하면, 법원 판결문이나 병원 진단서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권위적이고 보수적으로 ‘전통’을 지켜내려 한다.
하지만 대중문화 산업에 종사하며 콘텐츠를 만드는 이들에게 숙명과도 같은 것은 변화와 발전이다. 하지만 면지를 놓고 보면 출판의 변화와 발전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라고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진짜 출판쟁이들은 별것도 아닌 말을 이렇게 길게 쓰는구나. 그 선배만큼 나이를 먹으니 나도 하는 수 없구나 싶다. 면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재원 홍성사, 위즈덤하우스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선율 출판사에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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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의견💌
🗣️“투고에 관하여 출판사 입장의 솔직한 이야기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2년 전 이맘때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50% 정도 작성된 원고를 열 곳 넘는 출판사에 투고한 적이 있습니다. J. K. 롤링처럼 30곳 이상 보내기도 전에 출판을 제안해준 출판사가 나와서 실제로 책으로 출간되기도 하였지요. 물론 《해리포터》처럼 성공하진 못했지만요. 그래서 저는 더더욱 이번 서사의 서사에 담긴 출판사의 이야기가 반가웠습니다. 무명작가이자 생면부지 사람의 글을 글만으로 가능성을 보고 기획 출판한다는 것이 얼마나 용감한 일인지, 두 번째 책 출간을 앞두고야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을 책 출간을 꿈꾸고, 도전하고 계실 줄로 압니다. 모두 결실이 있으면 좋겠네요. 박명준 대표님은 차마 말씀하지 못하셨겠지만, 감히 한마디 더해봅니다. “독자보다 저자가 많은 세상”에서 출판 시장에 더욱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독자로 먼저 함께한다면, 자연히 내 글이 모두의 서사가 되는 기회가 주어질지도요.”
🗣️“원고 투고에 관한 출판사의 입장을 잘 정리해주셔서 유익했습니다. 제가 원고 투고자의 입장을 모두 대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투고자의 입장에서 몇 자 적고 싶습니다. 원고 투고를 하고 나면 투고자는 일종의 ‘투고스 하이(投稿's high)’에 사로잡힙니다. 출판사에서 나의 원고를 어떻게 읽어줄까 기대하며 그 원고가 책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환상에 빠지기도 하거든요. 그러나 이러한 ‘투고스 하이’는 출판사의 냉담한 반응으로 인해 처참하게 박살 납니다. 일단 대다수의 출판사에서는 투고 원고 메일을 아예 열지도 않습니다. 메일을 열더라도 답장이 없습니다. 답장이 오더라도 출판 여부를 내부적으로 검토할 테니 무작정 기다려달라고 답장이 옵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나 내부적으로 원고를 다각적으로 검토했으나 이 원고는 출판이 어렵다는 메일을 받습니다. 이런 부정적 반응을 여러 번 경험하면 ‘투고스 하이’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기 마련입니다. 원고 투고를 통해 깨닫게 된 한 가지는 원고 투고와 결혼이랑 매우 비슷하다는 겁니다. 무수히 많은 연애에 실패해도 나를 사랑해주는 한 사람만 있다면 결혼할 수 있듯이, 무수히 많은 원고 투고에 실패해도 나의 원고를 인정해주는 한 출판사만 있다면 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출판사에 원고를 보낼까 말까 망설이는 그대여, 이 지구별 어딘가에 눈 밝은 편집자가 그대의 원고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강하고 담대하게 ‘보내기’를 누르시오. 보내는 건 우리의 일이고, 거절하는 건 편집자의 일이기에.”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를 검토하는 게 꽤 에너지가 드는 일일 텐데. 이렇게 따뜻한 글로 작가 지망생들을 격려하시다니…따뜻하신 필자님☺️ 모든 글이 꼭 출판이라는 과정을 거칠 필요는 없다는 말씀에 동감해요. (소량 인쇄 및 나눔으로도 충분해 보이는 글이 몇천 권씩 인쇄된 책을 볼 때 나무에게 미안해질 때가 더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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