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이라고 자기를 정의하는 옷 때문에 자신을 ‘빨강’이라고 굳게 믿는 빨강이가 꼭 옛날의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비단 혈액형 뿐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이 보는 ‘나’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나’를 의심했거든. 내가 생각하는 ‘나’는 진짜 내 모습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일 거라고, 다른 사람이 보는 나의 모습이 더 정확할 거라고 생각했어. 때로는 그 둘 사이의 간극 때문에 아주 혼란스러웠지. 빨강이도 그러지 않았을까? 자신은 분명 파랑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모두 빨강이라고 하니까, ‘빨강’이라고 적힌 옷을 입고 있으니까 ‘파랑’인 자기 자신을 계속 외면했을 것 같아. 하지만 분명 괴로웠을 거야. 자기가 빨강인지, 파랑인지 혼란스럽고, 다른 크레용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이 밉고, 맞지 않는 옷에 자기를 맞추려니 무척이나 힘들었을 거야.
세상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책 속 빨강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가 만들어 낸 자신을 자기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너무나 쉽게 겉모습만 보고 타인을 판단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말이야. 어느 누군가는 타인의 기대치에 맞추느라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은 미처 들여다 볼 힘이 없을지도 몰라.
그런데 언니,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한테 맞는 옷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언니는 혹시 답을 알아?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갈팡질팡 흔들리는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때때로 그동안 내가 옳다고 믿었던 가치들과는 전혀 다른 선상에 있는 선택지에 눈을 돌리는 나를 보면서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인가, 멈춰 설 때가 많아. 물론 어렸을 때처럼 이 문제가 나를 많이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고민은 끝나지 않았어.
다행히 빨강이는 어느 날 새로 만난 ‘자두’라는 친구 덕분에 본래 자신의 모습을 알게 돼. 자두는 빨강이에게 바다를 그려달라고 해. 자기는 빨강이라서 바다를 그릴 수 없다고 하는데도 자두는 그냥 한 번 그려보라고 말해. 빨강이는 어쩔 수 없이 바다를 그리는데, 얼마나 멋진 파란 바다가 그려졌는지 몰라. 그때부터 빨강이는 온갖 파란 것들을 그려내. 파랑새, 블루베리, 파란 고래, 파란 청바지… 그리고 소리치지. “난 파랑이야!”라고.
언젠가 아이도 자라면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되겠지? 나에겐 자두처럼 드라마틱한 깨달음을 주는 친구는 없었지만 아이에게는 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자두’와 같은 친구가 있으면 좋겠어. 내가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고. 그러고 보니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에서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바로 그런 존재였겠다. 어떤 편견도 없이 아이가 가진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게 해줬잖아.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어.
그러면 우리는 강물처럼 자유롭게 흐르며, 자기만의 모양대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
2023.10
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