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이란 미 혹은 예술, 감성적 인식을 주제로 하는 철학적 과학이다. 철학적이라는 것은 개개의 예술작품이나 시대양식 등이 구체적인 본연의 자세가 아니고, 오히려 그 특수상(特殊相)을 규정하고 있는 보다 원리적·본질적인 상(相)을 지향하는 학문을 가리키며 과학이라는 것은 단순한 직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분절(分節)된 문제체계를 지닌 학문분야를 의미한다. 근대적인 미학은 라이프니츠·볼프학파에 속한 독일의 철학자 바움가르덴Baumgarten)이 1935년에 그 필요성을 지적하고 1742년에 오데르대학에서 그 표제(表題)와 함께 강의를 하고 1750년에 서명한 라틴어 저작 제1권을 공간하고, 그 존재를 주장했다.(1735년 소론(小論)에 의한 표제는 「시에 대한 약간의 철학적 고찰 Meditationes philosophicae de nonnullis ad poema pertinentibus」라고한다. )
이전에도 미의 철학이나 예술론은 존재했다. 그러나 그 고찰이 독자적으로 명칭을 가졌는가 아닌가는 결코 단순한 명목상이 문제만은 아니었다. 무엇이든 명칭이 처음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바움가르덴이 이 학문의 명칭으로 한 aesthetica는 그리스어에서 감각적 지각을 의미하는 aisthé?sis를 어간으로 하는 조어로써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감성학’이다. 그러나 근대미학의 명명자(命名者)는 ‘감성적 인식의 완전성’을 미로 간주하고, 그 미를 특히 문학의 영역에 있어서 생각했기 때문에 미와 예술을 감성적 인식에 중합(重合)하게 되었다.(바움가르덴 『미학』 제14절)
현대의 서구어에 있어서 aesthetics은 대부분 예술철학 혹은 예술학의 의미에서 이해되고 있지만 그 때 ‘감수성’이라는 어의가 잊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 명칭을 회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 편의적인 명칭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다. 미적태도, 미적질, 미적범주, 미적판단 또한 이것을 감성학으로 구상하는 가능성도 열려 있었다. 그런데 이 학문은 무엇보다도 우선은‘미의 학문’이다. 이미 서양인들의 견지(見地)와 비교하면 큰 견해 차이를 보인다.
미학에는 예술, 미, 감성적 인식이라는 3대 주제적인 중심이 있다. 단 3자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다양할 수 있다. 누구나 바움가르덴 같이 이 3자가 중복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 관계를 생각하는 것에 의해 미학의 방법이 다양해 진다. 이 세 개의 주제는 미학(aesthetics)이라고 불려지는 학문의 가능적인 지평을 가리키는 것이다.
미와 예술을 중합시키는 근대미학에 대해 미와 예술이 겹치지 않는다는 주장이 현재화(顯在化)하여 온 것은 19세기 말 무렵이다. 이 주장 배후에는 미가 없는 예술의 대두, 특히 자연주의와 인식을 주안으로 하는 예술관의 진전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예술을 미의 향수(享受)가 아니라 인식이나 진(眞)과 결부시킨 생각은, 특히 문학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詩學』 이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이 주장을 선도하여 예술학의 시조가 된 것이 K·피들러(Fiedler)이다. ‘미학 및 예술학의 영역에 있어서 최초의 잘못은 미와 예술을 동일시한 것이다’라고 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는 개념으로부터는 구성되지 않는다’그러나 예술품의 가치는 보다 이것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이다. 예술품은 쾌적(快適)하지 못해도 좋은 예술품일 수 있다. 미적 판단은 조금도 인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예술품이 줄 수 있는 최초의 기쁨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제일의 조건이다. 이 기쁨은 미적쾌감이며 한층 높은 기쁨이다’. (피들러 《예술론》17, 24, 40쪽)
즉 미는 쾌감정의 문제인 것에 대해 예술은 본질적으로 인식의 문제이라는 것이 피들러의 주장이다. 이것이 미와 예술과 감성과를 중합시키며 근대미학의 구상이 미보다 진리의 인식으로 기울고 있는 현실 예술사의 동향 속에서 모순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피들러를 이어 예술학을 주장한 것이 데수와르(Max Dessoir)와 우디츠(Emil Utitz)로써 특히 데수와르는 1906년에 「미학 일반잡지 Zeischrift fü?r Ä?sthetik und allgemeine Kunstwissenschaft」를 창간했다. 그러나 서구의 용어법에 있어서는 aesthetics라고 말하면 실용적으로 예술철학이며, 굳이 science of art라고 말하는 경우, 국어에 의해 각각 뉴앙스가 달라서(독일에서는 미술학이며, 실질적으로는 미술사학이고, 프랑스에서는 실험적 수법을 이용한 예술연구), sciencs의 ‘개별과학’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많은 논자(論者)에 있어서 미학은 예술철학이다. aesthetics을 일종의 미의 철학이라는 생각이 서양에 없는 것은 아니다. 피들러의 주장은 분석미학으로도 계승되어 예술적 가치와 미적 가치를 구별하는 문제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이 발전하는 것이며 예술철학과 미학을 구별하라는 주장도 된다. 그러나 예술로부터 분리된 미학의 실태는 미적질(美的質)의 연구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의 창조성과도 또한 감성적 인식의 신체적·공동체적인 두터움과도 절단된 이 감성적 표현의 학문이 독자적인 존재이유를 지니는가 아닌가도 의문이다.
근세이전의 미학이나 예술학에 있어서 미나 예술에 관한 고찰은 18세기 이전에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그 역사를 말할 수는 없지만, 고전으로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색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기도 한다.(Tatarkiewicz, History of Aesthetics, 3 vols )
우선 미의 철학으로는 플라톤(Platon) 및 플로티노스(Plotinos), 그리고 이 양자의 학통(學統)에 이어지는 플라톤주의(특히 르네상스에 있어서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 17세기 말의 섀프츠베리(Third Earl of Shaftesbury)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플라톤은 『향연(饗宴)』에서 ‘미 바로 그것의 학문’을 말하고 있다. 이 대화편의 주제인 사랑을 미에 대한 사랑, 미의 추구로 다시 파악한 다음 주인공 소크라데스(Socrates)는 무녀(巫女)로부터 들은 말로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아름다운 인간의 경영’으로, 그리고 ‘미의 학문’으로 그것도 ‘여러 가지 학문으로부터 미 바로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 배움에 이르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사람의 혼은 예전에는 천상에 있다고 믿어서 신들과 생을 즐기고 있었지만 윤회에 의해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미는 그 빛남에 의해 천상의 생을 상기시키는 실마리가 되었다.(플라톤의 저서 파이드로스 메논, 248-50). 따라서 『향연』에서 말한 상승운동은 이른바 혼이 자기의 본성을 회복하기 위한 도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출발하고 그 구체성을 벗어나 미학에 이르는 계제였다. ‘미학’은 직접적으로 ‘미 그것을 본다 theaomai’라고 말하듯이 체계적 학문이라는 것 보다 미의 관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술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학문체계에 있어서 이론학·실천학과 함께 세워진 제작학(制作學)의 범주에 속하고, 저작으로서는 『시학(詩學)』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15세기 말에 비잔틴에서 서구세계에 전해진 후,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미술에 관한 이론적 사고에 영향을 끼쳤다. 시학의 또 하나의 고전은 로마의 시인 호라치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65-8 B.C.)가 서한시(書翰詩)로 쓴 『시학』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서양인들의 상식이 될 정도로 널리 침투하고 있었다.
호라티우스의 『시학』 361행의 전반에 ‘시는 그림과 같이 Ut picturea poesis’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르네상스 시기의 사람들은 이 말을 근거로 회화를 시와 등가인 것으로 간주한 뒤, 시학이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쿠인틸이아누스(Quintilanus, Marcus Fabius)들의 수사학(修辭學)을 회화론에 적용했다. 그 사실은 시학이나 수사학 영향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회화가 고전적인 이론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회화나 조각에 관한 고대의 저작으로는 플리니우스(Plinius)의 『박물지(博物誌)』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이론적이기보다는 평론적인 것이었다. 또한 비투르비우스(Vitruvius, 1C.B.C.)의 『건축론』은 르네상스 이후 건축론이나 도시론 분야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필적할만한 권위로 인정받았다. 음악은 중세교육체계에서 자유 7과 가운데 수학적인 4과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을 만큼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Pythagoras)파 이래 영원한 학문적 전통이었다. 이 수적(數的) 음악론은 근세 화성론(和聲論) 고찰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조화를 수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예술 철학적인 음악론과는 뜻을 달리하고 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1790)을 근대미학의 확립지표로 한다면 그것은 18세기말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르네상스 이후의 근세라는 시대에 전개되어 온 전사(前史)가 있다. 이 미학의 근세사는 어떠한 문화적·사상적인 시대상황에서 이 학문이 독립한 스텐다드로 요청되었다는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우선 18세기에는 미학뿐만 아니라, 많은 근대적 학문이 성립됐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G·비코(Giambattsta Vico)와 함께 역사학이, 몽테스키(Montesquieu)와 함께 사회학이, 또한 17세기의 코메니우스(Comenius,)를 선두로 J=J·루소(Jean-Jacques Rousseau)나 페스탈로치(Pestalozzi)와 함께 교육학이 근대적인 자율적 학과로서의 본연의 자세를 확립했다고 보여진다.(Montesquieu를 근대적인 실증적 사회학의 아버지라고 보는)
여기에 미학을 가해 생각하면 인간의 구체적인 생에 대한 관심고조를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은 문화전체의 세속화 움직임의 반영이었다. 그리고 이 근세적 세속문화를 대표하는 루이 14세의 궁정문화가 다채로운 예술이었던 것은 주지할 일이다. 이 시기에 성립한 미학이 감성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을 눈으로 보이는 효과를 취하려는 현상이며 그것이 쾌락주의 경향을 나타낸 것은 당연하다. 데카르트(Descartes)의 습작 『음악론』(1619)은 그 첫머리에 ‘음악의 목적은 우리들을 기쁘게 하고, 여러 가지 정념을 야기하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예를 들면, 3음절을 좋아하는 근거가 3이라는 숫자의 신비적·상징적 성질에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들어서 기분 좋다는데 있다. 거기에 근세의 새로운 경향이 있다. 예술과 미를 감성적 인식과 결부시킨 바움가르텐(Baumgarten)의 구상 배후에는 이러한 예술체험의 변모가 있다. 그러나 감성적인 상태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성립 열쇠를 짊어졌다고 할 수 있다.
중세로부터 근세로의 이행이 소위 르네상스, 다른 방면으로는 종교개혁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보는 것은 상식이다.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이스탄불의 옛 이름) 함락을 계기로 시작된 르네상스는 비그리도교적인 고대문화의 재발견과 종교개혁은 말할 필요도 없이 종교내부에 있었다. 교회의 권위와 개인 신앙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는 이의신청이었다. 모두 고정된 질서, 중세의 세계관을 뒤집어 엎는 운동이었으며 가치를 유지하고 있었던 권위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 인류가 부닥친 것은 틀림없는 하나의 문화혁명이었다.
이 구세계의 붕괴는 가치의 상대화로 진행했다. 이 운동을 상징하는 것이 몽테뉴(Michel de Montaigne)이다. 프랑스의 걸출한 독서가이며 여행가였고 도덕주의자였던 그는 경험의 지평을 넓히고 사고방식을 상대화(相對化)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친숙해져 있는 삶의 태도가 유일한 옳은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편견을 수정해 갔다.(‘신대륙의 국민에 대하여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곳에는 야만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자신의 관습이 아닌 것을 야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가살고 있는 나라의 사고방식이나 관습의 실례와 관념 이외에는 진리와 이성의 표준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종교적 내전의 격동시대를 살면서 그 와중에 상대적 세계관을 실천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절대적 회의주의의 경지에 도달한 그는 유명한 ‘나는 무엇을 알고 있을지 Que sais-je?’라는 표어에서 표현하고 있다.
파괴 뒤에 재건이 온다. 확실한 것을 잃은 상황에서 기반이 되는 고정점의 깊은 노력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노력에서 직관이나 ‘느낌’의 의의가 발견되는 것이다. 확실성을 추구하는 노력의 하나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이다. 그것을 이성적 인식 즉 추론(推論, 이치를 좇아 어떤 일을 미루어 생각하고 논급함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확실성의 기초가 된 ‘나는 생각하는, 때문에 존재한다’라는 삼단논법에 대해 데카르트는 강하게 부정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직관이라는 것이다. 인식의 기초로서의 직접 지식을 명료하게 말한 것은 파스칼(Pascal)이다. ‘우리들이 진리를 아는 것은 이성에 의해서 만이 아니라 또한 심정에 의해서이다. 우리들이 제1원리를 아는 것은 후자에 의한 것이다. 원리는 직관되어 명제는 결론하게 된다’. 그는 자연학적인 제1원리 혹은 공리(公理) 이외에 신의 존재, 사랑을 심정의 직관(sentiment)으로 밖에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 비논변적이며 직접적인 감정 혹은 감각이라는 정신의 움직임은 18세기에 중요성이 증가해 간다. 가장 큰 조류가 ‘도덕감각(moral sense)학파’라고 불리는 영국 사상의 계보이며 섀프츠베리(Shaftesbury)로 시작하여 허치슨(Hutcheson)을 거쳐 아담 스미스(Adam Smith)에게 이른다. 그들은 주로 가치판단을 이 ‘감각’에 돌리고 있었지만 그 대상에 미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미나 예술의 관점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프랑스의 사상가 뒤 보스(Jean-Baptiste Du Bos)이다. 그는 가치판단이 ‘감정’에 따라야 할 것을 강조하고 보통 오감과 구별해서 ‘제6감(第6感)’의 개념을 제기하고 있다. 이 사상동향의 큰 결정이 바움가르텐에 의한 감성학으로서의 미학이라는 구상이었다. 이 면으로부터 보면, 감성학으로서의 근대미학의 성립은 전통이나 추론에 의한 가치의 인정이 아니고 가치가 직접적인 지식이 근원적인 것이라는 표명이었다. 미는 이 가치론의 원형의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덧붙이자면 현대철학에서 강조되고 있는 ‘지(知)’(프랑스어의 savoir)란 이 직관으로 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과학적 혹은 추론적인 인식(connaissance佛語)에 대하여 그러한 논증 형태를 취할 수는 없는 근원적인 인식이다. 현대의 인식론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감성론에 새로운 가능성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