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자: 2022-01-18
Vol. no 2
미학의 역사적 근간
by 박명인(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


미학이란 미 혹은 예술, 감성적 인식을 주제로 하는 철학적 과학이다. 철학적이라는 것은 개개의 예술작품이나 시대양식 등이 구체적인 본연의 자세가 아니고, 오히려 그 특수상(特殊相)을 규정하고 있는 보다 원리적·본질적인 상(相)을 지향하는 학문을 가리키며 과학이라는 것은 단순한 직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분절(分節)된 문제체계를 지닌 학문분야를 의미한다. 근대적인 미학은 라이프니츠·볼프학파에 속한 독일의 철학자 바움가르덴Baumgarten)이 1935년에 그 필요성을 지적하고 1742년에 오데르대학에서 그 표제(表題)와 함께 강의를 하고 1750년에 서명한 라틴어 저작 제1권을 공간하고, 그 존재를 주장했다.(1735년 소론(小論)에 의한 표제는 「시에 대한 약간의 철학적 고찰 Meditationes philosophicae de nonnullis ad poema pertinentibus」라고한다. )


이전에도 미의 철학이나 예술론은 존재했다. 그러나 그 고찰이 독자적으로 명칭을 가졌는가 아닌가는 결코 단순한 명목상이 문제만은 아니었다. 무엇이든 명칭이 처음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바움가르덴이 이 학문의 명칭으로 한 aesthetica는 그리스어에서 감각적 지각을 의미하는 aisthé?sis를 어간으로 하는 조어로써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감성학’이다. 그러나 근대미학의 명명자(命名者)는 ‘감성적 인식의 완전성’을 미로 간주하고, 그 미를 특히 문학의 영역에 있어서 생각했기 때문에 미와 예술을 감성적 인식에 중합(重合)하게 되었다.(바움가르덴 『미학』 제14절)


현대의 서구어에 있어서 aesthetics은 대부분 예술철학 혹은 예술학의 의미에서 이해되고 있지만 그 때 ‘감수성’이라는 어의가 잊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 명칭을 회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 편의적인 명칭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다. 미적태도, 미적질, 미적범주, 미적판단 또한 이것을 감성학으로 구상하는 가능성도 열려 있었다. 그런데 이 학문은 무엇보다도 우선은‘미의 학문’이다. 이미 서양인들의 견지(見地)와 비교하면 큰 견해 차이를 보인다.

미학에는 예술, 미, 감성적 인식이라는 3대 주제적인 중심이 있다. 단 3자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다양할 수 있다. 누구나 바움가르덴 같이 이 3자가 중복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 관계를 생각하는 것에 의해 미학의 방법이 다양해 진다. 이 세 개의 주제는 미학(aesthetics)이라고 불려지는 학문의 가능적인 지평을 가리키는 것이다.

 

미와 예술을 중합시키는 근대미학에 대해 미와 예술이 겹치지 않는다는 주장이 현재화(顯在化)하여 온 것은 19세기 말 무렵이다. 이 주장 배후에는 미가 없는 예술의 대두, 특히 자연주의와 인식을 주안으로 하는 예술관의 진전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예술을 미의 향수(享受)가 아니라 인식이나 진(眞)과 결부시킨 생각은, 특히 문학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詩學』 이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이 주장을 선도하여 예술학의 시조가 된 것이 K·피들러(Fiedler)이다. ‘미학 및 예술학의 영역에 있어서 최초의 잘못은 미와 예술을 동일시한 것이다’라고 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는 개념으로부터는 구성되지 않는다’그러나 예술품의 가치는 보다 이것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이다. 예술품은 쾌적(快適)하지 못해도 좋은 예술품일 수 있다. 미적 판단은 조금도 인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예술품이 줄 수 있는 최초의 기쁨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제일의 조건이다. 이 기쁨은 미적쾌감이며 한층 높은 기쁨이다’. (피들러 《예술론》17, 24, 40쪽)

즉 미는 쾌감정의 문제인 것에 대해 예술은 본질적으로 인식의 문제이라는 것이 피들러의 주장이다. 이것이 미와 예술과 감성과를 중합시키며 근대미학의 구상이 미보다 진리의 인식으로 기울고 있는 현실 예술사의 동향 속에서 모순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피들러를 이어 예술학을 주장한 것이 데수와르(Max Dessoir)와 우디츠(Emil Utitz)로써 특히 데수와르는 1906년에 「미학 일반잡지 Zeischrift fü?r Ä?sthetik und allgemeine Kunstwissenschaft」를 창간했다. 그러나 서구의 용어법에 있어서는 aesthetics라고 말하면 실용적으로 예술철학이며, 굳이 science of art라고 말하는 경우, 국어에 의해 각각 뉴앙스가 달라서(독일에서는 미술학이며, 실질적으로는 미술사학이고, 프랑스에서는 실험적 수법을 이용한 예술연구), sciencs의 ‘개별과학’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많은 논자(論者)에 있어서 미학은 예술철학이다. aesthetics을 일종의 미의 철학이라는 생각이 서양에 없는 것은 아니다. 피들러의 주장은 분석미학으로도 계승되어 예술적 가치와 미적 가치를 구별하는 문제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이 발전하는 것이며 예술철학과 미학을 구별하라는 주장도 된다. 그러나 예술로부터 분리된 미학의 실태는 미적질(美的質)의 연구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의 창조성과도 또한 감성적 인식의 신체적·공동체적인 두터움과도 절단된 이 감성적 표현의 학문이 독자적인 존재이유를 지니는가 아닌가도 의문이다.

 

근세이전의 미학이나 예술학에 있어서 미나 예술에 관한 고찰은 18세기 이전에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그 역사를 말할 수는 없지만, 고전으로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색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기도 한다.(Tatarkiewicz, History of Aesthetics, 3 vols )


우선 미의 철학으로는 플라톤(Platon) 및 플로티노스(Plotinos), 그리고 이 양자의 학통(學統)에 이어지는 플라톤주의(특히 르네상스에 있어서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 17세기 말의 섀프츠베리(Third Earl of Shaftesbury)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플라톤은 『향연(饗宴)』에서 ‘미 바로 그것의 학문’을 말하고 있다. 이 대화편의 주제인 사랑을 미에 대한 사랑, 미의 추구로 다시 파악한 다음 주인공 소크라데스(Socrates)는 무녀(巫女)로부터 들은 말로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아름다운 인간의 경영’으로, 그리고 ‘미의 학문’으로 그것도 ‘여러 가지 학문으로부터 미 바로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 배움에 이르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사람의 혼은 예전에는 천상에 있다고 믿어서 신들과 생을 즐기고 있었지만 윤회에 의해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미는 그 빛남에 의해 천상의 생을 상기시키는 실마리가 되었다.(플라톤의 저서 파이드로스 메논, 248-50). 따라서 『향연』에서 말한 상승운동은 이른바 혼이 자기의 본성을 회복하기 위한 도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출발하고 그 구체성을 벗어나 미학에 이르는 계제였다. ‘미학’은 직접적으로 ‘미 그것을 본다 theaomai’라고 말하듯이 체계적 학문이라는 것 보다 미의 관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술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학문체계에 있어서 이론학·실천학과 함께 세워진 제작학(制作學)의 범주에 속하고, 저작으로서는 『시학(詩學)』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15세기 말에 비잔틴에서 서구세계에 전해진 후,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미술에 관한 이론적 사고에 영향을 끼쳤다. 시학의 또 하나의 고전은 로마의 시인 호라치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65-8 B.C.)가 서한시(書翰詩)로 쓴 『시학』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서양인들의 상식이 될 정도로 널리 침투하고 있었다.

호라티우스의 『시학』 361행의 전반에 ‘시는 그림과 같이 Ut picturea poesis’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르네상스 시기의 사람들은 이 말을 근거로 회화를 시와 등가인 것으로 간주한 뒤, 시학이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쿠인틸이아누스(Quintilanus, Marcus Fabius)들의 수사학(修辭學)을 회화론에 적용했다. 그 사실은 시학이나 수사학 영향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회화가 고전적인 이론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회화나 조각에 관한 고대의 저작으로는 플리니우스(Plinius)의 『박물지(博物誌)』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이론적이기보다는 평론적인 것이었다. 또한 비투르비우스(Vitruvius, 1C.B.C.)의 『건축론』은 르네상스 이후 건축론이나 도시론 분야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필적할만한 권위로 인정받았다. 음악은 중세교육체계에서 자유 7과 가운데 수학적인 4과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을 만큼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Pythagoras)파 이래 영원한 학문적 전통이었다. 이 수적(數的) 음악론은 근세 화성론(和聲論) 고찰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조화를 수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예술 철학적인 음악론과는 뜻을 달리하고 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1790)을 근대미학의 확립지표로 한다면 그것은 18세기말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르네상스 이후의 근세라는 시대에 전개되어 온 전사(前史)가 있다. 이 미학의 근세사는 어떠한 문화적·사상적인 시대상황에서 이 학문이 독립한 스텐다드로 요청되었다는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우선 18세기에는 미학뿐만 아니라, 많은 근대적 학문이 성립됐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G·비코(Giambattsta Vico)와 함께 역사학이, 몽테스키(Montesquieu)와 함께 사회학이, 또한 17세기의 코메니우스(Comenius,)를 선두로 J=J·루소(Jean-Jacques Rousseau)나 페스탈로치(Pestalozzi)와 함께 교육학이 근대적인 자율적 학과로서의 본연의 자세를 확립했다고 보여진다.(Montesquieu를 근대적인 실증적 사회학의 아버지라고 보는)

여기에 미학을 가해 생각하면 인간의 구체적인 생에 대한 관심고조를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은 문화전체의 세속화 움직임의 반영이었다. 그리고 이 근세적 세속문화를 대표하는 루이 14세의 궁정문화가 다채로운 예술이었던 것은 주지할 일이다. 이 시기에 성립한 미학이 감성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을 눈으로 보이는 효과를 취하려는 현상이며 그것이 쾌락주의 경향을 나타낸 것은 당연하다. 데카르트(Descartes)의 습작 『음악론』(1619)은 그 첫머리에 ‘음악의 목적은 우리들을 기쁘게 하고, 여러 가지 정념을 야기하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예를 들면, 3음절을 좋아하는 근거가 3이라는 숫자의 신비적·상징적 성질에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들어서 기분 좋다는데 있다. 거기에 근세의 새로운 경향이 있다. 예술과 미를 감성적 인식과 결부시킨 바움가르텐(Baumgarten)의 구상 배후에는 이러한 예술체험의 변모가 있다. 그러나 감성적인 상태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성립 열쇠를 짊어졌다고 할 수 있다.


중세로부터 근세로의 이행이 소위 르네상스, 다른 방면으로는 종교개혁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보는 것은 상식이다.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이스탄불의 옛 이름) 함락을 계기로 시작된 르네상스는 비그리도교적인 고대문화의 재발견과 종교개혁은 말할 필요도 없이 종교내부에 있었다. 교회의 권위와 개인 신앙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는 이의신청이었다. 모두 고정된 질서, 중세의 세계관을 뒤집어 엎는 운동이었으며 가치를 유지하고 있었던 권위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 인류가 부닥친 것은 틀림없는 하나의 문화혁명이었다.


이 구세계의 붕괴는 가치의 상대화로 진행했다. 이 운동을 상징하는 것이 몽테뉴(Michel de Montaigne)이다. 프랑스의 걸출한 독서가이며 여행가였고 도덕주의자였던 그는 경험의 지평을 넓히고 사고방식을 상대화(相對化)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친숙해져 있는 삶의 태도가 유일한 옳은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편견을 수정해 갔다.(‘신대륙의 국민에 대하여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곳에는 야만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자신의 관습이 아닌 것을 야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가살고 있는 나라의 사고방식이나 관습의 실례와 관념 이외에는 진리와 이성의 표준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종교적 내전의 격동시대를 살면서 그 와중에 상대적 세계관을 실천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절대적 회의주의의 경지에 도달한 그는 유명한 ‘나는 무엇을 알고 있을지 Que sais-je?’라는 표어에서 표현하고 있다.


파괴 뒤에 재건이 온다. 확실한 것을 잃은 상황에서 기반이 되는 고정점의 깊은 노력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노력에서 직관이나 ‘느낌’의 의의가 발견되는 것이다. 확실성을 추구하는 노력의 하나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이다. 그것을 이성적 인식 즉 추론(推論, 이치를 좇아 어떤 일을 미루어 생각하고 논급함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확실성의 기초가 된 ‘나는 생각하는, 때문에 존재한다’라는 삼단논법에 대해 데카르트는 강하게 부정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직관이라는 것이다. 인식의 기초로서의 직접 지식을 명료하게 말한 것은 파스칼(Pascal)이다. ‘우리들이 진리를 아는 것은 이성에 의해서 만이 아니라 또한 심정에 의해서이다. 우리들이 제1원리를 아는 것은 후자에 의한 것이다. 원리는 직관되어 명제는 결론하게 된다’. 그는 자연학적인 제1원리 혹은 공리(公理) 이외에 신의 존재, 사랑을 심정의 직관(sentiment)으로 밖에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 비논변적이며 직접적인 감정 혹은 감각이라는 정신의 움직임은 18세기에 중요성이 증가해 간다. 가장 큰 조류가 ‘도덕감각(moral sense)학파’라고 불리는 영국 사상의 계보이며 섀프츠베리(Shaftesbury)로 시작하여 허치슨(Hutcheson)을 거쳐 아담 스미스(Adam Smith)에게 이른다. 그들은 주로 가치판단을 이 ‘감각’에 돌리고 있었지만 그 대상에 미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미나 예술의 관점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프랑스의 사상가 뒤 보스(Jean-Baptiste Du Bos)이다. 그는 가치판단이 ‘감정’에 따라야 할 것을 강조하고 보통 오감과 구별해서 ‘제6감(第6感)’의 개념을 제기하고 있다. 이 사상동향의 큰 결정이 바움가르텐에 의한 감성학으로서의 미학이라는 구상이었다. 이 면으로부터 보면, 감성학으로서의 근대미학의 성립은 전통이나 추론에 의한 가치의 인정이 아니고 가치가 직접적인 지식이 근원적인 것이라는 표명이었다. 미는 이 가치론의 원형의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덧붙이자면 현대철학에서 강조되고 있는 ‘지(知)’(프랑스어의 savoir)란 이 직관으로 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과학적 혹은 추론적인 인식(connaissance佛語)에 대하여 그러한 논증 형태를 취할 수는 없는 근원적인 인식이다. 현대의 인식론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감성론에 새로운 가능성을 주고 있다.

근대 미학의 출발점 "임마누엘 칸트", 독일철학자

미적 관심은 셸링(Friedrich Willhelm Schelling)이래, 예술작품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 미학이 철학에 하나의 자리를 준 인식론적인 문제의식은 데카르트에서 칸트(Kant)에 이르는 근세적인 철학에 속해 있다. 그런데 근대사상에서 미학이 쟁취한 중요성은 인간의 창조로서의 예술을 주제로 하는 것에 있었다. 르네상스 이래 문화의 세속화 경향이 19세기가 되어서 크게 결실을 맺은 하나의 대표적 형태다. 그로 인해 미학은 인식론과 함께 창조론이라고 하는 2번째의 뿌리를 갖기에 이른다. 이 양의성은 드디어 피들러(Fiedler)적인 미학과 예술학의 분리 주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예술의 인식론에 독서론이 속한 것이 근자에 주목을 끌게 되었다.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철학에서 미학은 협의(狹義)의 철학, 윤리학과 함께 그 주요한 세 개의 영역을 형성하게 된다. 오늘날 미학이, 특히 대학에서 독립된 학과가 된 것은 그 전통에 의한 것이 크다. 또한 그와 동시에 현대에서는 예술이 주요한 문화영역으로서 대부분 제도적인 보증을 얻고 있는 것이 예술철학으로서의 미학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 버팀목이 된 두 가지 뿌리에 대해서는 앞에서 약술했다. 그러나 상황은 변화되어 오고 있다. 그리고 다시 역사의 전환점에 당도한 지금 예술 및 미학 자신의 기반과 존재이유와의 사이에 직면해 있는 것은 미학의 중요한 과제이다.

 

학문은 필연적인 말에 의한 논술이다. 플라톤적인 미의 관상(觀想)은 언어에 의해 기술할 수 있는 것인가? 플라톤이 거기에 이르는 도정을 이야기하면서 ‘미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말로 이해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보다 직접인 논술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심이 철저할 때 미학자체가 파라독스이며 모순개념이라는 생각이 생긴다. 그래서 미학에 대한 혐의(嫌疑)는 종종 존재한다. 미학을 배울 때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아름답지 않은 것인지는 납득할 수 없다. 즉, 미학은 평론가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미학이 예술가를 만들지 않는 다는 것도 주지할 일이다. 이렇게 무익하다는 것은 미학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기획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미학에 대한 의념(疑念)의 유명한 예는, 폴 발렐리의 상계서 주8) 논고이며, 1937년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미학회의에 초대되어 강연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학은 존재하고 있다. 그 존재하고 있는 미학은 평론가나 예술가를 육성하거나 그들의 지침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미의 정의나 언어적인 기술을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미학은 어떠한 것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미학의 과제에 대해 일본의 미학자 고바타 준조(木幡 純三)의 ‘미적 이성의 자기성찰의 기록’이라고 한 말이 실태에 가까운 것 같이 생각된다. ‘미적 이성’이라는 개념은 반드시 명확하지 않지만 그 의미하는 것은 요컨대, 우리들이 미나 예술에 접촉하고 의문을 품거나, 확신을 가지거나, 곤혹하거나 하는 것에 반성을 더해 인식을 깊게 해 가는 것일 것이다. 그 의미에서의 미학은 진지한 예술체험, 자연미의 체험 안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어서 제약이나 조건이나 규정없이 자연스러운 발전이 학문으로서의 미학을 구성해 간다고 할 수 있다.

미학이 저절로 발생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미의 창조성과 특히 현대예술에 있어서의 지적도발(知的挑發)의 성격이 중요하다. 미는 그것에 접한 사람을 고양시켜 창조적 상태로 이끄는 특성이 있다. 미는 사람을 새로운 창조로 유혹하여 사색을 자극하고 근세에 이르기까지 미를 취지로 하는 예술에 대하여 근대 이후의 예술은 지적성격을 강화해 왔다. 근대예술은 특히 소설을 중심으로 사상을 구체적으로 전개하는 장이 되었고 현대의 전위예술에는 그것이 무엇인가, 어떠한 사상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가라는 수수께끼 풀기를 강요하는 것이 적지 않다. 이러한 작품에 대한 반응은 이미 철학적인 사색의 맹아(萌芽)이다. 따라서 미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이미 어떠한 의미로는 미학을 시작하고 있다라고 해도 좋다.

 

여기에서 지적한 현대예술의 특질은 예술일반의 성질이 극단적인 데서 현재화해 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예술창조는 그런 점에서 자각적이지 않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어떤 예술관, 즉 예술은 무엇인가, 또는 있어야 하는 것인가라는 것에 관한 이해나 사상을 전제로 행해진다. 그리고 그 사상은 필연적으로 작품에 담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학문 이전의 미학이며 사상적인 개성이 문제가 되기 이전의 시대에 있어서는 각각의 문화권, 각각의 시대에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상식으로서의 예술관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미학은 학문 안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은 적지만, 행위와 삶에 의해 짊어진 사상이며 공허한 추상성을 모면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로서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학문 외의 일반사회에 있어서의 미학이라는 단어용법에 자주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작품이 어떤 암묵적인 미학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반대로 보면 그것이 미학연구의 소재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특히 미학사를 각각의 시대에 현실적으로 살아 있던 예술사상을 복원하는 것으로서 구상하면 이 예술작품에 내포된 미학에 주목하는 것은 불가결하다.

잠깐, 어려우신가요! 글에 인용된 인물과 용어 설명드려요!!! 

  • 뒤보스 장 바티스트(Jean-Baptiste Du Bos, 1670-1742) 프랑스의 사상가

  •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78) 프랑스의 작가, 사상가.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인위적인 문명사회의 타락을 비판하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역설하였다. 저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

  •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92) 프랑스의 수필가, 사상가

  • 몽테스키(Montesquieu, 1689-1755) 프랑스의 사상가·정치 철학자

  • 바움가르덴(Baumgarten, 1646-1716) 독일의 철학자, 미학자

  • 비코(Vico, Giovanni Battista, 1668-1744) 이탈리아의 철학자. 법학ㆍ정치학ㆍ역사학에서 업적을 남겼다. 데카르트 철학에 반대하여, 행위에 진리 기준을 두고 역사철학 내지 민족심리학에 대한 시야를 열었다. 봉건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미래를 전망한 내용을 평가받고 있다. 그의 기본 사상은 인간 역사의 발전에 대한 고찰에 있으며, 신적 원리가 역사적 법칙의 기원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역사 그 자체에 내재한 법칙이 있고 발전은 이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떤 민족도 발전 과정을 세 개의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신적ㆍ영웅적ㆍ인간적이라는 단계이다. 저서에 《여러 민족의 공통 성질에 관한 신과학 원리》가 있다.

  • 비투르비우스(Vitruvius, 1C.B.C.) 리니우로마의 정치가ㆍ학자ㆍ작가(B.C.106~B.C.43). 집정관이 되어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하고 ‘국부(國父)’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의 문체는 라틴어의 모범으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국가론≫, ≪법률론≫, ≪의무론...로마의 정치가ㆍ학자ㆍ작가(B.C.106~B.C.43). 집정관이 되어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하고 ‘국부(國父)’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의 문체는 라틴어의 모범으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국가론≫, ≪법률론≫, ≪의무론》

  • 섀프츠베리(Third Earl of Shaftesbury, 1671-1713) 3대 백작, 영국의 철학자, 사상가.

  • 셸링(Friedrich Willhelm Schelling, 1775-1854) 독일의 철학자. 관념론 및 낭만파의 대표자. 저서에 『인간적 자유의 본질』

  • 소크라테스(Socrates, (B.C.470?~B.C.399)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문답을 통하여 상대의 무지(無知)를 깨닫게 하고, 시민의 도덕의식을 개혁하는 일에 힘썼다. 신(神)을 모독하고 청년을 타락시켰다는 혐의로 독배(毒杯)를 받고 죽었다.

  •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스코틀랜드 커콜디 출생의 고전경제학의 창시자, 철학자.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B.C.322)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B.C.384~B.C.322). 소요학파의 창시자이며, 고대에 있어서 최대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고,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비롯하여 후세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 《형이상학》, 《오르가논》 등.

  • 우티츠(Emil Utitz, 1883-1956) 유태인 혈통의 체코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뮌헨, 라이프치히, 프라하에서 공부한 후 로스토크교수가 되었고, 1925년부터 할레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철학 위원장을 역임했다. 1933년 강제 은퇴한 후 프라하에서 교수로 취임했고, 1945년 테레지엔슈타트가 해방된 후 그는 프라하로 돌아와 1956년 예나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동독을 여행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 코기토(Cogito) : 라틴어로써 방법서설에서 서술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Gogito, ergo sum의 약자

  • 코메니우스(Comenius, Johann Amos, 1592-1670) 체코슬로바키아의 교육 사상가(1592~1670). ‘범지학’을 구상하여서 근대 교육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었다. 저서에 《대교수학(大敎授學)》, 《최신 언어 교수법》, 《자연학 개론》 따위가 있다.

  •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터키 서쪽 보스포러스 해협 입구에 위치한 도시.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로마가 위협받자 콘스탄티누스 1세가 330년에 그리스의 식민도시인 비잔티움(Byzantium)을 제2의 수도로 삼고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렀다.

  • 쿠인틸리아누스, 마르쿠스 파비우스(Quintilianus, Marcus Fabius, ?35~?96) 에스파냐 태생의 고대 로마 수사학자).

  •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고대 로마의 문인 철학자, 정치가, 집정관이 되어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하고 ‘국부(國父)’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의 문체는 라틴어의 모범으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국가론》, 《법률론》, 《의무론》.

  •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1827) 스위스의 교육학자.

  • 플라톤(Platon, 428-347/48 B.C.) 그리스 철학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사상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대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인 아카데미를 개설하여 생애를 교육에 바쳤다. 대화편(對話篇)을 다수 쓰고, 초월적인 이데아가 실재(實在)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전개하였다.

  • 플로티노스(Plotinos, c.205-c.270) 이집트 태생의 고대 로마 철학자. 신플라톤학파의 대표자로 중세 스콜라 철학과 헤겔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 《에네아데스(Enneades)》가 있다.

  • 플리니우스(Gatus Plinius Secundus, 23-79) 로마 제정기의 장군·정치가·학자.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로마 제정기(帝政期)의 장군·정치가·학자(23?-79). 학문, 특히 박물학에 관심이 깊었다.

  • 피들러(Fiedler, Konrad), 1841-1895) 독일의 예술학자, 근대예술의 근대 예술학의 선구자로 조형예술을 대상으로 예술 고유의 독자성을 주장하였고, 저서에 《예술론집》이 있다.

    허치슨(Francis Hutcheson, 1694-1746) 영국의 사상가.

  • 피타고라스(Pythagoras, (B.C.580?~B.C.500?))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ㆍ수학자ㆍ종교가. 수(數)를 만물의 근원으로 생각하였으며,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발견하여 과학적 사고를 구축하는 데에 큰 구실을 하였다.

  •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65-8 B.C.) 고대 로마의 시인. 풍자시ㆍ서정시로 명성을 얻어, 아우구스투스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의 ≪시론(詩論)≫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함께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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