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지역적 차별성

대구는 광역시로 인근 작은 도시들의 도심으로서 기능해왔고, 인근 도시들의 여가 및 문화생활까지 담당해 왔습니다. 한 개의 도심인 중구를 중심으로 단핵 방사형 구조를 하고 있어 칠곡, 성서, 동대구, 현풍 4개의 부도심과 5개의 성장 유도 거점 지역이 뻗어 나가며 형성되어 있는 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구는 서울, 부산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지만 전체 광역시 중 유일하게 1도심을 거점으로 형성되어 있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북쪽의 팔공 산맥과 남쪽의 비슬 산맥 사이로 넓은 분지 평야에 형성된 대구 시내는 덕분에 심한 언덕과 고개 없이 편히 이동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철도, 도시철도, 시내 도로 등이 이동에 용이하게 잘 정비되어 있어 육상 교통 인프라가 잘 되어있는 도시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과거 섬유, 염색산업의 중심지였던 대구는 한때 패션의 도시로 불리기도 했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공단이 축소되었으며 그나마 안경 산업만이 남아 국내 안경의 대부분을 생산해 내며 패션산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공업 및 제조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25% 수준이며, 2%대의 인구만이 농업에 종사, 전체의 75% 이상은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는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구는 기억에 남게 특별한 자연경관이나 특별한 유적지를 떠올릴 수 있는 지역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역의 문화적인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고 도심을 중심으로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지역별 특성이 묻어나는 크고 작은 요소들이 남아있어 문화적, 예술적 가치를 높입니다. 광역시 중 뮤지컬, 오페라 극장이 가장 많기도 한 대구는 시내와 멀지 않은 곳에 랜드마크인 ‘83타워’와 전통시장인 ‘서문시장’, 대구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대구 근대 골목’,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자 대구에 오면 빼놓지 않고 들려가는 ‘수성못’, ‘김광석 거리’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하며 도시의 매력을 배가시킵니다.

또, 대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먹거리입니다. 거의 고유명사처럼 불리는 ‘대구 막창’부터 이제는 백화점들에서 쉽게 만날 수 있지만 대구의 기념품처럼 빵을 사 오게 됐던 ‘삼송 빵집’과 그 외에도 납작 만두, 콩국, 찜 갈비, 뭉티기, 따로 국밥, 닭똥집, 치킨 등이 대구를 떠올리게 하는, 대구에 왔다면 빼놓지 않고 먹고 가야 하는 지역 음식들이 존재합니다. 여러 음식 중에도 유독 고기 요리들이 잘 알려진 이유는 과거 농업이 주 산업이었을 당시 대구 주변에 도축장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음식뿐만 아니라 대구는 커피로도 유명한 도시입니다. 국내에서 가장 먼저 개인이 직접 로스팅 한 커피를 낸 커피명가는 1990년부터 30년간 동성로를 지켜오다 지금은 경산으로 이전하였으며, 이후 다빈치 커피, 슬립리스 인 시애틀 등의 지역 토종 커피를 만들어내며 현재까지도 그 문화가 꾸준히 이어져 프랜차이즈 커피 외에도 직접 로스팅을 하는 개성 넘치는 지역의 카페들을 만들어가며 전국의 커피 애호가들을 대구로 불러 모으기도 합니다.

(1) 대구의 문화 공간_83타워/ 대구 근대 골목/ 수성못/ 김광석거리 
         (2) 대구의 지역 전통 음식들_막창/ 납작 만두/ 오드레기와 뭉티기/ 따로 국밥

프랜차이즈의 근원지

대구에서 시작해 서울에 지점을 두고 있는 카페 인더매스

‘미즈 컨테이너’, ‘서가앤쿡’, ‘맥시칸 치킨’, ‘두찜’, ‘신전떡볶이’, ‘삼송빵집’ ‘토끼정’. 두서없이 늘어놓은 이 프랜차이즈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모두 대구에서 시작된 브랜드라는 것입니다. 생소했던 샐러드 파스타를 대중적인 메뉴로 만든 것도, 2인 1메뉴라는 가성비 양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도, 양념치킨을 최초로 만든 치킨 집도, 후추 향 가득한 떡볶이로 2030 세대를 매료시킨 브랜드도 모두 대구에서 그 시작을 알렸던 것입니다.

 
언급한 브랜드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삼송빵집은 1957년 남문시장에서 시작해 3대를 이어온 역사적인 빵집입니다. 맛있고 건강한 빵을 기본 원칙으로 하여 2008년 개발한 구운 고로케와 통옥수수빵이 시그니처가 되어 명실상부 대구를 대표하는 빵집으로 거듭났습니다. 미즈 컨테이너는 1997년 대구대학교 내 학생 식당에서 작은 치킨 가게로 시작한 퓨전 아메리칸 레스토랑입니다. 인더스트리얼 콘셉트를 바탕으로 하는 미즈컨테이너 직원들은 헬멧을 쓴 고객이 있는 테이블에 음식을 제공하며, 음식이 나간 후엔 하이파이브를 통해 고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고객들이 공간 안에서 음식 외적으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을 전했습니다. 서가앤쿡은 2006년 동성로에서 ‘서가’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작은 레스토랑이었습니다. 현재는 전국에 80여 개의 대형 프랜차이즈로 입지를 굳힌 이들은 2인 1메뉴라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며 푸짐하고 맛있는 양식 레스토랑으로 자리 잡아 전국 어느 곳에서도 만나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전 떡볶이는 떡볶이 프랜차이즈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브랜드로 그 역사는 1999년 대구 칠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002년 대구 백화점에 대백 직영점을 오픈한 이후 꾸준히 지점을 확장하며 2012년 100호점 돌파, 2017년 500호점 돌파, 현재 700호점 이상의 매장을 두고 있으며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베트남, 필리핀, 호주, 일본, 캐나다까지 지점을 둔 글로벌한 브랜드로 성장하였습니다. 두찜은 다른 브랜드들 대비 근래에 생긴 프랜차이즈입니다. ‘두 마리 찜닭’이라는 콘셉트로 2016년 문을 연 이들은 한 마리 두 마리의 찜닭을 제공하며 배달 맛집으로도 인기를 얻으며 코로나로 인해 경제가 좋지 않은 시기임에도 전국에 500여 개의 가맹점을 둔 가성비 맛집으로 알려지며 지속적인 성장세를 달리고 있습니다.

대구에서 만들어진 프랜차이즈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들자면 모두 후한 인심을 기반으로 한 창의적이고 맛이 있는 한 끼 식사 일 것입니다. 대구 시민들의 입맛과 관심을 받은 브랜드들은 지금도 꾸준히 주목을 받으며 그 맛을 다른 도시, 다른 나라까지 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언급한 브랜드들뿐만 아니라 멕시카나 치킨, 호식이 두마리 치킨, 처갓집 양념치킨, 신참 떡볶이, 커피명가, 핸즈커피, 다빈치 커피 등의 프랜차이즈도 모두 대구에서 출발한 브랜드들입니다. 옛날부터 있었던 브랜드들 외에도 새로 생기는 브랜드들까지 지속적으로 프랜차이즈화 되어 성공 사례를 만들어 나가는 걸 보면 대구의 F&B가 가진 저력이 그저 운이 아니었음을 증명합니다. 프랜차이즈 브랜드 외에도 최근에는 대구에서 인기를 끌고 서울로 본점을 옮긴 빅토리아 베이커리나, 서울에 신규 지점을 낸 인더매스 등과 같이 대구 출신의 카페들이 대구 외 지역에서 큰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구에 본점을 두고 있는 프랜차이즈_삼송빵집/ 미즈컨테이너/ 서가앤쿡/ 신전떡볶이

지역 곳곳에 보이는 한옥을 개조한 공간들

대봉동 첫 번째 한옥 카페 오가닉 모가

대구를 다니다 보면 특별히 한옥마을이나 한옥거리가 아님에도 유난히 한옥을 개조한 리테일 공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이는 대구가 6.25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데다 조선시대 때 경상도를 총괄했던 감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 심심치 않게 한옥 개조 카페, 한옥 스테이 등을 볼 수 있고 이런 모습들이 도시의 분위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특히 대봉동은 이런 모습이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공간 중 하나입니다. 김광석 거리를 옆에 둬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기도 하는 이 지역엔 웨딩 거리도 위치하고 있어 다양한 모습이 교차하는 재미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작은 시골 마을 같기도, 서울 어딘가의 뒷골목 같기도 한 이 지역엔 이질적인 현대식 건물의 웨딩 숍들 사이로 고즈넉한 한옥 집들이 저마다 개성 있는 모습으로 개조되어 손님을 맞습니다. 

2010년 대봉동 주택가 안에 오픈한 한옥 카페 ‘모가’(현재 오가닉모가)는 이 지역의 첫 번째 한옥카페로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이 대구의 핫플로 꼽는 장소입니다. 이곳의 대표는 오래된 한옥의 기둥, 기와, 창문 등 무엇 하나 버리지 않고 1년에 걸쳐 수리해 원래의 모습 그대로 살려 두었습니다. 한옥이지만 일반적인 한옥의 구조와는 다른 모습을 한 모가의 공간은 일본인이 생활한 흔적이 남아 있어 적산가옥이라고도 하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한옥을 따르고 있기에 묘하게 일본 가옥의 모습이 섞여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오가닉모가는 이곳의 터줏대감으로 이후 생겨난 한옥 리테일 공간들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모가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대봉동엔 몇 집 걸러 하나씩은 한옥을 개조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엔트리 커피’, ‘카페 마리’, ‘여가’, ‘카와올라’와 커피와 와인을 같이 즐길 수 있는 ‘대봉동 문’, 도심 속의 쉼이라는 주제로 서울에서 내려온 ‘이이알티’까지 저마다 각자의 개성을 가진 한옥 카페들이 대봉동을 지키고 있으며, ‘한옥에서 즐기는 싱글몰트위스키 & 와인 & 칵테일 & 전통주’를 표방하는 바 ‘소나무’, 한옥을 개조한 웨딩 숍 ‘감성 공작소’ 등 카페를 넘어 다양한 리테일 공간들이 한옥을 활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봉동 뿐만 아니라 대구 중심인 동성로의 베이커리와 브런치를 제공하는 한옥카페 ‘맨션 5’, 서문시장 근처 내부 인테리어까지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로맨스 빠빠’외에도 도심을 벗어난 고즈넉한 달성군의 카페 겸 레스토랑 ‘오퐁드부아’와 ‘까사드테하’, 침산동의 케이크 맛집 ‘소응접실’, 남구의 ‘월포리91’과 ‘하녹’, ‘라겟옴’ 등 지역을 막론하고 대구 전역에서 다양한 콘셉트를 가진 한옥 공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1) 대봉동의 한옥 공간들_엔트리 커피/ 카페 미드웨이/ 카페 여가/ 소나무
(2) 그 외 대구 지역의 한옥 공간들_ 메종5/ 북사(북성로사람들)/ 소응접실/ 하녹

MZ세대들이 만든 개성 넘치는 리테일 공간들

입장료를 내면 인테리어, 가구 디자인 서적과 lp를 즐길 수 있는 공간 닷 스페이스

(1) 센치밀리가 브랜딩 한_나이스댓/ Aatd/ 게더투게더
(2) WECO의 프로젝트 브랜드_이네딧담/ 가식/ 유랑/ 장효

(3) 콘셉트도 상품도 개성 있는 편집숍들_모남희/ 코잔타/ 물비늘/ 홀리데이비지터샵

대화를 통해 일상과 세상을 바꾼다는 슬로건의 복합문화공간 대화의 장

이번 전시는 도슨트 없이 관람하게 되어 전시 전체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듣진 못했지만, 그래서 더욱 온전하게 제가 가진 시각으로 전시를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78명 작가의 대표작 144점이 전시된 이번 전시에서 개인적으로 각 섹션별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과 그 작품을 그린 작가분에 대한 간단한 소개로 이번 전시 추천 콘텐츠를 채워보고자 합니다. 

탈 형상화 (De-figuration)

Paul Rebeyrolle, Nu wur fond noir(Nude on Black background) (1971)

이 섹션은 인간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변형된 구조와 독특한 면 분할을 통해 형상적인 양식에서 벗어나려는 예술의 자율성을 보여줍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 폴 레베이롤은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으로 부당함과 억압에 맞서 자유로움을 외치는 작품들로 유명합니다. 작품이 그려진 1971년은 작가가 ‘자유’를 위한 정치적인 소재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시기이자, Maeght 재단에 전시할 Nus(Nudes) 시리즈를 그리던 해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그의 작품 또한 그 시리즈 중 하나로 보이며, 정형화되지 않은 형체의 인간의 모습을 통해 강인한 메시지를 던지는, 탈-형상화라는 주제가 잘 드러난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풍경-기억 (Landscapes-memories)

송현숙, 12획 (2013) / 13획 (2012)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우리 주변의 풍경과 개인의 기억들을 소환시키며 각자의 추억을 들춰내는 두 번째 섹션에서는 송현숙 작가의 작품들이 가장 눈에 들어왔습니다. 풍경이라는 주제가 연상시키는 자연의 모습이 아닌, 정물 혹은 추상에 가까워 보였던 작품들은 작품을 그리는 데 쓴 획수를 제목으로 하여 간결하지만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합니다. 파독 간호사로 함부르크에서 미술을 공부한 송현숙 작가는 그녀의 작품들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습니다.  각각 12획, 13획이라는 제목의 위 두 작품은 전원적이고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며 언젠가 지나쳐 온 아련한 기억 속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작품 앞에 꽤 오랜 시간을 머무르며 일상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추상 (Abstraction)

이강소, 섬으로부터-03038 (2003)

존재 자체로 함의하는 아우라가 선명한 이 섹션의 작품들은 작품들을 통해 고차원의 사유를 이끌어냅니다. 위 작품은 이번 전시 전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 중 하나입니다. 멀리서는 한 번에 휘갈겨 놓은 낙서 같기도 했던 이 그림은 가까이 들여다보니 추상이라기보다는 풍경화같이 느껴졌습니다. 더구나 제목도 주제처럼 추상적이었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섬으로부터’라는 어떠한 특정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으로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왔습니다. 오리 화가로 대중에게 유명한 이강소 화백은 ‘섬으로부터’ 연작에서 푸른 오리의 움직임을 선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역동적인 움직임과 대조적으로 우측 아래에 있는 작은 집의 모습이 귀엽지만 단단하게 느껴져 자연 속 인간의 모습같이 느껴졌습니다. 자연과 어우러진 인간의 모습과 그 안에서의 역할을 보여주는 것 같았던 이 작품이 전시를 보고 나와서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글 (Writings)

Hans Hartung, T1971-H13 (1971)

글이라는 기호는 의미를 생산하거나 해체하고 다시 해체된 의미를 복원합니다. 이 섹션에서는 회화 속에서 여러 형태의 문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붓질, 툭 떨어진듯한 물감, 서예를 연상시키는 낙서가 특징인 ‘타시즘 추상’의 선구자인 한스 아르퉁의 작품들은 비율, 리듬, 움직임, 색의 조화를 찾는 작업이 주를 이룹니다. 그는 화려한 색과 동양의 서체에서 영향을 받은 조형으로 순수 추상을 추구하였으며 “예술관은 특히 모든 외부 구속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그의 화풍과 작품들은 액션페인팅에 크게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위 작품 또한 그의 대표적인 작업 방식을 따라 리드미컬한 붓놀림, 스크래치 자국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평소 대칭과 균형을 이루는 구조나 모양 그림을 좋아하는 저에게도 이 작품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탐구하기 이전에 조형적으로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또, 위의 이강소 화백의 작품이 아크릴 물감으로 동양적인 표현을 했다면 한스 아르퉁의 작품들은 동양적인 모티프를 그 자체로 모던하게 풀어내 비슷한 시작에서 온 다른 결말을 보는 것 같아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초현대적 고독 (Ultra modern solitude)

이 섹션은 모순적이고 분열적이며 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근대의 정체성 문제를 다룹니다. 댄 플래빈은 모더니즘의 엘리트적 배타성에 대한 대안으로 기성품인 형광등을 이용한 조각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형광등의 기능이나 형태의 변형 없이 작품으로 존재하며 그를 미니멀리즘의 선구자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빛을 통해 공간의 의미를 바꾸거나 공간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등 조명의 설치를 통해 설치된 공간을 조각하기에 그는 디자인, 건축 조각을 아우르는 총체 예술가로도 불리기도 합니다. 온라인에서 이미 이미지로 자주 봐왔던 그의 작품들을 개념적 측면에서 동경하고 디자인적 측면에서 좋아해왔었습니다. 국내에서도 몇 번의 개인전이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실제로 보게 된 것이 처음이어서 신기했고, 예고 없이 마주한 만큼 반가웠습니다. 서양 미술사에서 빛이 본질적으로 가지는 숭고함, 신의 은총, 생명력과는 달리 어떤 목적성이나 기능을 갖지 않는 플래빈의 작품 속 빛은 공허함을 느끼게 합니다. 이 섹션에 있는 다른 작품들은 주제를 들었을 때 받았던 느낌 그대로 직관적인 고독함을 말하고 있었지만 플래빈의 이 작품은 커튼 뒤에서 빛나고 있어 기대를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커튼을 젖히자 비로소 드러난 작품의 쓸쓸하고 공허한 모습이 대조되어 군중 속의 고독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평면으로의 귀환 (Re-generating painting)

이 섹션에서는 회화세계의 종말을 예고한 마르셀 뒤샹의 모더니티와 그를 계승한 후예들에 맞서 회화의 본질과 토대에 대해 질문하는 본질적인 작업들을 선보입니다. 이배 작가는 숯을 이용한 작업을 하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이배 작가 말고도 여러 섹션에 걸쳐 등장한 작가들이 있었지만 이배 작가만큼 다양하고 유기적인 모습으로 작품이 연결된 작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글 섹션에서 흑백의 서체적 추상을 표현한 ‘Issu du feu(1996)’와 기원 섹션에서 숯을 전시장에 그대로 세워 보여준 ‘From fire(2014)’를 평면으로 압착하여 만든 작업이 바로 위의 ‘Untitled(2014)’인 것 같아 ‘평면으로의 귀환’이라는 섹션의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라고 느꼈습니다. 유학시절 물감이 너무 비싸 찾았다는 재료인 숯은 이제 작가의 혼이 되었습니다. “숯은 죽은 듯 보여도 굉장한 에너지를 머금고 있다. 다시 불이 될 수도 있고, 다시 타서 에너지를 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에서 모든 것의 마지막 모습이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모습을 한 숯, 그리고 숯으로 만들어내는 작가의 작품들이 가지는 의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재신비화된 세상 (Re-enchanting the world)

이 섹션의 작가들은 살아있음을 찬양하고 존재가 보이는 사악함과 역사가 보여주는 비극을 넘어서 살아있을 것을 말합니다. 전시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누구나 보면 단번에 작가를 알아볼 수 있는 위 작품은 마르크 샤갈의 ‘La vie’입니다. ‘삶’이라는 뜻을 가진 이 작품은 평소 자전적인 그림을 그려온 샤갈의 화풍이 그대로 드러나 그의 인간과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보다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최근 삼성동의 마이 아트 뮤지엄에서 진행되었던 샤갈 특별전 《Chagall and the Bible》을 봤었습니다. 이때 샤갈의 작품들에 담긴 종교적 의미들과 그의 작품관, 그가 사용하는 색채들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알 수 있었으며, 그래서 다시 그의 작품을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La vie는 지난 전시들에서 반복적으로 볼 수 있었던 종교적 이미지와 더불어 그의 생애 자체에 대해 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삶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들, 결혼, 파리, 예술가 등이 한 화폭 안에서 자유지만 조화롭게 강렬한 색채로 표현됩니다. 이 작품은 매그 재단의 설립자가 샤갈에게 헌정하는 방에 걸기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한 작품으로 프랑스 국보로 지정되어 이번 전시를 위해 오랜 기간의 설득 끝에 프랑스 문화부의 외부 반출을 허가받고 대구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된 특별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기원 (Genesis)

마지막 섹션인 기원은 생명의 끝없는 순환 속 그 근원이 되는 작품들을 전시합니다. 그중 제게 가장 와닿았던 ‘Point of view’라는 이 작품은 작품명 그대로 보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작품의 모습이 재미있었습니다. 사람의 얼굴 조각물 같기도, 종유석 같기도, 바람에 깎인 돌 같기도 했던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시사합니다. 세상에 어떤 현상이나 사건, 사람도 어떤 한 관점으로 볼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환경에 대해 꾸준히 주목해 온 토니 크랙은 작품 초기 폐기물로 작품을 만들어 환경과 인간의 연결고리와 순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점차 자연의 방식을 모방하여 콘크리트, 석고, 나무 등의 단일 재료를 사용하여 조각 작품을 만들었고, 소재들이 가진 고유의 질감과 특수성을 통해 관람객들이 작품에 집중하고 소재를 관찰하고 다각도에서 작품을 감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물체의 고유성, 뜻하지 않은 우연성 등 자연이 가진 고유의 성질을 자연적인 형태를 가진 인공 조각을 통해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미술 전공자이거나 작품들에 대한 넓은 배경지식이 없기에 도슨트 없이 전시에 대해 통찰력 있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아니더라도 제가 마음이 가는 작품들과 작품을 만든 작가들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고, 이를 통해 작품을 감상하는 폭이 조금이나마 넓어진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휴일도 있고 날씨도 많이 풀린 3월, 꼭 대구미술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 전시가 아니더라도, 전시장을 찾아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찾아보고 작품과 작가에 대해 알아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져 보길 추천드립니다.

* 글의 내용 중 기울임을 적용한 부분은 미술관에서 배포한 자료를 인용한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