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님.

재단에서 일하다 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가졌던 생각에 공감할 때가 많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철학에 공감해 재단에 입사했는데, 재단에 와서 더 많은 걸 알게 됐다고 해야 할까요.

그중에서도 지역균형발전과 지역주의 해소는 뉴스레터 담당자가 관심있게 보았던 분야였습니다. 지역균형발전 정책은 전주와 완주, 청주, 용인, 수원 등 여러 지역에 살아봤기 때문에 더 공감했던 것 같습니다. 지역주의 해소는 노무현 대통령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했고, 지금도 공감하고 계실 것입니다.

얼마전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국회의원 선거제도에 대해 3개의 개편안을 내놓았습니다. 지난 2월, ‘노무현의 이루지 못한 꿈- 정치개혁’ 토론회에 참여했던 서복경 교수가 재단에 글을 보내왔는데요. 지역균형발전과 지역주의 해소가 정치개혁의 과제라고 생각했던 뉴스레터 담당자에게는 신선한 울림을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정치개혁은 왜, 어떤 방향으로 해야 할까요? 님도 읽어보시고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새롭게 뜯어고침. ‘개혁’이란 단어의 뜻입니다. 원래 이 단어에는 방향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저 새롭게 뭘 바꾸면 모두 개혁이라고 부릅니다. 그 방향이 설령 기존 질서나 제도, 현실을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라도 말이죠. 개혁에 방향과 내용을 설정하는 것은 당대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같을 수는 없으니 개혁의 방향에는 항상 이견이 있고, 그 가운데 다수의 지지를 얻은 방향이 채택됩니다.

 

다수의 지지를 얻은 선택이라고 해서 항상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일단 결정할 때는 다수의 지지로 하는 것이 우리가 선택한 체제이기 때문에, 다수의 지지를 얻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다수의 지지는 특정 방향이 채택되거나 실현되기 위한 조건이지, 개혁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개혁의 방향과 내용이 사회를 지금보다 더 낫게 만드는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가늠자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당대의 구체적 현실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방향으로 뜯어고치려고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또한 그 이유가 시간과 공간을 고려했는지도 봐야 합니다. 시간이 중요한 이유는, 2003년과 2023년 사회상태는 다르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공간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개혁하고자 하는 현실이 미국이나 프랑스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2023년 대한민국에서 정치개혁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 2023년, 정치개혁이 필요한 이유

 

3월 22일 국회 정개특위는 우여곡절 끝에 3가지 선거제도 개혁안을 의결했습니다. 정개특위 결의안에 담긴 3가지 제안은 3월 30일부터 2주 동안 진행될 국회 전원위원회 논의자료가 될 예정인데요. 저는 정개특위 결의안의 3가지 제안보다 그 제안을 내놓은 이유에 더 주목했습니다.

위의 문구는 결의안 서두에 담긴 것으로, 정개특위가 3가지 선거제도 개혁안을 제안하는 이유에 해당합니다. ‘지방소멸 위기에 대응하고 지역주의 정당구도를 완화하며 정치 다양성을 증진’하기 위해 지금의 선거제도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으신 여러분들은 2023년 한국정치의 핵심문제가 여전히, 아직도 ‘지역주의’라는데 동의하시나요?

 

저는 철 지난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지금 정치의 문제를 고작 ‘지역주의’라고 생각한다는데 암담함을 느낍니다. 대체 몇 년도 대한민국에 사는지 묻고 싶습니다. 정개특위가 ‘지역주의’라고 칭한 것은, 대구경북과 호남 유권자들이 각각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것일 텐데, 과연 이게 지금 한국정치가 안고 있는 핵심 문제일까요?

 

대구·경북 선거구 국회의원은 25명, 광주·전남·전북 국회의원은 28명입니다. 300명 중 53명의 국회의원이 그 지역 유권자 압도적 다수로 당선되는 문제만 해결하면 국회가 당면한 난제들을 해결할 만큼 유능해질까요? 이 지역 53명 국회의원들이 서로 정당을 교차해서 고르게 당선되면 300명의 국회의원들이 기후위기, AI시대 시장 변화,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국제관계, 지방소멸이 문제가 아니라 총인구 자체가 감소하고 있는 시대에 대응해나갈 능력이 생길까요? 지금 국회는 인류사적 위기에 직면해 5천만의 삶을 책임질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무능함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유럽연합의회는 5년여에 걸친 논의 끝에 간신히 ‘Al 윤리법’에 관한 합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대하고 어려운 문제라는 것입니다. ‘AI 윤리법’은 AI 기술이 인간을 위해서만 사용될 수 있고 인간의 안전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매우 중차대한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회는 ‘대통령이 AI 윤리 원칙을 제정·공표’할 수 있도록 하는 ‘인공지능법안’을 제정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에게 이 문제의 중대성을 알리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 법률로 규제해야 할 이 중대한 사안을, 대통령에게 미뤄버리려는 것입니다. 그 대통령이 무슨 일을 벌일 줄 알고 이런 무책임한 짓을 하려는 걸까요?

3월 21일 정부는 ‘탄소 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을 발표했습니다.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탄소 배출량을 40% 감축하겠다’는 것이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에 제출하고 국제사회에 공표한 약속이었습니다. 그것도 부족하다고 질타하는 게 국제사회의 시선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2022년 기준 탄소배출 순위 세계 10위이고, 1800년 이후 배출량을 누적 합산하더라도 세계 17위인 국가입니다. ‘우리는 산업화를 늦게 시작했는데 억울하다’는 변명이 통할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부가 제출한 기본계획은 파리협정에 따라 한국정부가 약속한 목표를 절대 달성할 수 없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탄소중립기본법’ 자체를 위반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곧 국제사회의 다양한 제재를 피할 방법이 없게 됩니다.

 

이 심각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국회의원이 몇 명이나 될까요? 국제적 기후위기 대응에 보조를 맞추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라, 5천만 국민과 지금도 태어나고 있는 미래세대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기후위기 때문에도 그렇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국제질서에서 도태되면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2021년 미국·유럽연합 등 국제사회의 압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탄소중립기본법’을 통과시키긴 했지만, 그 법을 지키려면 우리 사회가 어떤 어려움을 감당해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표결했던 의원은 300명 중 30명도 채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정부가 말도 안 되는 기본계획을 발표했는데도 국회가 저렇게 조용한 것입니다.

 

정개특위 결의안에서 특히 암담한 부분이 여전히 ‘지역균형발전’을 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총인구가 증가하던 시대에는 지역이 고르게 ‘발전’하는 문제가 중요했습니다. 산업단지도 만들고, 대학도 만들고, 대형병원도 만들고, 공공기관도 이전시키고, 도로도 뚫는 ‘발전’ 정책이 필요했습니다. 증가하는 인구가 수도권에 몰리지 않고 다양한 권역으로 분산되어 전국에 거주하는 국민들이 균등한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도록, 권역별 산업·의료·교육·문화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2020년을 정점으로 총인구가 감소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합계출산율은 2022년 기준 0.78입니다. 인구 감소를 완화할 노력은 필요하겠지만, 여러 이유로 획기적인 증가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학교도, 학원도, 어린이집도 문을 닫고 있고, 소아과가 아예 없는 기초자치단체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경제활동인구 1명이 부양해야 할 고령자가 1명이 되는 시대가 2050년 이전에 올 수 있습니다.

 

지금은 한가롭게 지역균형‘발전’을 논할 때가 아니라, 총인구 급감 시나리오에 따른 긴급대책이 필요한 때입니다. 민간병원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공공병원을 확충해야 하고, 이미 초고령화되어 있는 기초자치단체에는 시급히 의료·요양대책을 지원해야 합니다. 전국의 기초자치단체들은 계속 줄어드는 아이들이나 청년들을 경쟁적으로 끌어당기느라 자원을 소진할 것이 아니라, 국가적 수준에서 권역 거점 중심으로 생활 인프라를 완전히 새롭게 디자인해 나가야 합니다. 시장에 맡겨서는 결코 불가능한 이 작업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은 국회밖에 없습니다. 지금 국회가 이 일을 할 능력이 돼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우리 헌법이 정해 놓은 업무할당 원리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는 21대 국회의 집단적 무능함이 300명 의원 개개인의 무능함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자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유능한 사람들이라고 인정을 받아 뽑혔고, 그 정당성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들이 보유한 능력이 지금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능력과 맞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은 어디에서도 온전한 정답을 찾기 어려운 난제들입니다. 처음 맞이하는 지구적 환경에, 항상 늘어나기만 하던 총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에, 인간이 저 좋자고 개발한 기술이 인간을 위협하는 시대에, 미리 완벽한 해법을 손에 들고 있는 나라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저 모든 국가들이 각자 자신이 가진 자원을 총집중해 해법을 찾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어떤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10년, 20년이 지난 뒤 어떤 나라 국민들은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어떤 나라 국민들은 더 나쁜 삶의 조건을 갖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격차는 벌써 나라마다 점점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사회의 모든 자원을 지금 시대에 필요한 과제 해결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합니다. 정치로 범위를 좁혀볼까요. 여전히 ‘지역주의 해결’이 우리 정치의 핵심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호남에서 국민의힘 의원이, 대구경북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고르게(?) 당선되는 것이 문제해결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큰 두 정당 공천 후보의 동반 당선 효과가 분명한, 이른바 ‘중대선거구제’ 등의 선거제도를 개혁 대안으로 인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두 정당 국회의원들이 전국적으로 고르게 당선되어 다시 국회를 꽉 채우면, 없던 능력이 갑자기 생길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동네 1등들의 국회가 되든, 동네 1∼4등들의 국회가 되든 그 국회는 동네 문제 해결에만 얽힐 겁니다. 동네 1등은 다음 번에도 1등을 유지하기 위해, 동네 4등은 다음 번에 1등이 되기 위해 우리 동네에 철도를 놓고 산업단지를 유치하는 경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 철도 이용자가 없어질 미래가 곧 오든 말든, 그 산업단지가 내뿜는 탄소가 결국 우리를 죽이는 결과로 되돌아오든 말든 경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선거구 51%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쪽지예산으로 지역개발을 밀어붙이는데 유능하지만, 국가적 의제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1970∼80년대 버전의 대안을 당당히 주장하는 국회의원들이 국회를 가득 채우는 한, 우리사회의 미래는 암울합니다.

 

이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선거구 시야가 아니라 국가적 시야를 가지고, 지구적이고 세계적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5천만 공동체의 활로를 고민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국회를 채워야 합니다. 그러자면 각 정당이 그런 사람을 국회의원 후보로 내놓게 해야 합니다. 기후위기와 에너지 전환 전문가, 기후재난 대비에 경험이 있거나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 AI와 인간에 대한 철학을 가진 사람, 분화되고 파편화되고 있는 2023년의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권리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 식량 위기에 대비해 국가적 먹거리 대책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 전 국토를 대상으로 생활권 재디자인 기획을 가진 사람, 격화되는 미중 패권경쟁체제의 성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들을 후보로 내놓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선거제도에서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왤까요? 에너지 전문가, AI 전문가, 국제관계 전문가가 동네 1등을 하는데 유능한 사람들과 경쟁해서 당선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식량 전문가를 데려와 동네 경로당을 돌면서 사랑받는 방법, 아파트 재건축·재개발 민원을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동네 1등을 만드는 것도 난감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도에서 국가적 과제 해결에 유능한 사람을 국회에 넣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물론, 성공확률은 희박합니다. 이 제도를 그대로 두고 정당들에게 ‘진정성을 가지고 국가적 관점에 입각해’ 공천을 하라고 요구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이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들이 1세기가 넘는 선거 경험을 통해 검증해 놓은 다양한 제도들이 있고, 국내에서도 학자들이나 시민단체들이 제안해온 여러 제안들이 있습니다. 그중 반드시 하나만 정답인 것도 아닙니다. 지금 정치개혁에 필요한 방향을 충족할 수 있는 여러 개의 대안 중에 골라도 됩니다. 하지만 지금 정개특위가 제안하고 있는 3가지 안 가운데에는 없습니다. 여전히 ‘지역주의 해결’에만 목을 메고 있으니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개혁의 ‘이유’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무엇을, 왜 바꾸려고 하는지가 바꾸려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니까요.

 

오늘 이 편지는 지금 필요한 선거제도 개혁의 내용을 주장하거나 설득하려고 쓰는 게 아닙니다. 무엇을, 왜 바꿔야 하는지에 대해 더 많은 분들과 공감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국회에서 선거제도 개혁은 여러모로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22대 국회가 우리 정치의 끝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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