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장의 여는 인사말 ]

안녕하세요. 편집장 장재열입니다. 아침에 나가려다가 다시 백해서 옷장의 봉인된 칸을 열었어요. 니트 넣어 놓는 칸이었죠. 이제는 꺼내서 드라이 한번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불과 지난주까지 반팔 입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이렇게 옷장을 한번 교체하다 보면 심리적으로 결산을 미리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 올해도 벌써 니트 꺼낼 때가 됐단 말이야. 그럼, 올해가 몇 달 남은 거지?' 이런 느낌으로요. 그래서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동안 잠깐 서서 올해 뭘 했는지 생각해 봤는데, 정말 많은 일들을 했더라고요.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보람된 일은 삶의 패턴과 형태들을 조금씩 바꾸어 갔다는 거였어요.


불안도 많고 걱정도 많은 저 자신에게 "그건 점쟁이 흉내야"라고, 하나의 이름을 붙여서 스스로 생각을 멈추는 법도 깨닫게 되고요. 또 때로는 타인의 기대나 반응에 너무 민감하게 눈치를 보면서 애써 맞추려고 하는 것이 괴로울 때, MBTI가 ST인 지인들을 불러오는 '셀프 빙의'라는 저만의 방법을 만들어 내기도 했어요. 그 친구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저랑 성격이 정반대인 친구들 몇몇을 떠올리다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가 정해지더라고요.


그렇게 저 자신을 많이 바꾸어 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이 《월간 마음건강》을 만들어 가면서 수많은 분의 인터뷰를 접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저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그리고 전혀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분들에게 질문자가 되는 경험. 사실 저도 지난 10년간은 작가로서 상담가로서 기자님들께 질문을 받는 쪽에 가까웠으니까요. 그런데 정반대 자리에 앉은 것만으로도 제 삶의 시선과 관점들이 참 많이 바뀌어 가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시간이 참 귀했구나 싶습니다.


여러분들께도 이 편지 한 통 한 통이 그런 관점을 넓히는 시간으로써 잘 전해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부디 저와 같은 사소하고도 은은한 변화의 트리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 한 눈에 보는 오늘의 마음건강
① 책 | 차가운 세상에 기대어 설 단 하나의 곁
② 칼럼 | 나를 교도소만큼은 대접하고 있나요
③ 이달의 마음건강 강연 및 교육 정보
차가운 세상에 기대어 설 단 하나의 곁🌈
『죄와 책』 박주영
editor 강동훈

찬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계절이 오면, 우리는 자연스레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여줄 따스한 '온기'를 찾게 됩니다. 저희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분들의 표정에서도 누군가의 다정한 위로나 따뜻한 이야기 한 편을 기다리는 간절함이 엿보이곤 합니다. 우리가 책을 읽고 타인의 삶에 귀를 기울이는 궁극적인 이유 역시, 이 팍팍하고 차가운 세상 속에서 나를 지탱해 줄 온기를 발견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법과 제도가 세상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지만, 정작 그 엄격하고 차가운 잣대 사이로 속절없이 흘러내리는 위태로운 삶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누군가의 억울함이나 참혹한 비극을 그저 사건 번호나 종이 위의 무미건조한 활자로만 대할 때, 세상은 한없이 차갑고 잔인한 곳으로 변해버립니다. 법정이라는 극한의 공간일수록, 그곳에 서 있는 인간의 겹겹이 쌓인 사연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감수성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오늘은 차가운 세상에 기대어 설 단 하나의 곁이 되어주는 '온기'를 주제로 박주영 판사님의 『죄와 책』을 소개합니다. 무기력과 회의감에 빠져 있던 초임 판사 시절,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핏기 없는 법정에 사람의 온기를 불어넣게 만든 것은 바로 치열한 독서의 힘이었습니다. 승소와 패소, 징역과 벌금이라는 건조한 단어 너머 사람의 온도를 꾹꾹 눌러 담은 그의 따뜻한 기록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책 속 한 줄

문학은 인간을 통시적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성과 의미를 가르쳐준다. 법이 평균을 취급한다면, 문학은 개별값을 다룬다. 평균과 개별의 괴리는 사실 법과 문학의 간극이다. 법이 인간 삶의 한 국면만 다룬다면, 문학은 인간이라는 조각의 시작과 끝을 다룬다. 문학은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정답에서 비껴간 존재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몸짓을 기록하는 예술이다.

- 박주영, 『죄와 책』, 모로, 2026, 280쪽


절판되는 책 중에 좋은 책이 많듯, 교도소나 길거리에서 끝장나는 인생 중에도 좋은 사람이 많다. 누가 책을 살리는가. 눈 밝고 선한 독자다. 누가 전과자와 노숙인과 중독자를 살리는가. 인간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는 시민이다. 사람을 중쇄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독자는 몇일까. 한 명이다. 단 한 사람만 애정 어린 시선을 보여줘도 사람은 나쁜 길로 빠질 수 없다.
- 박주영, 『죄와 책』, 모로, 2026, 256쪽

나를 교도소만큼은...🧐
대접하고 있나요
editor 장재열

얼마 전 친구 하나가 연락이 왔어요. “재열 작가님, 나 이거 정신과 가야 될 일이야?” 깜짝 놀라 전화를 걸었더니, 어느 날부터 너무 화가 나면 자기 뺨을 때린다는 거예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며칠 뒤, 또 다른 지인이 말하더라고요. 요즘 집에 오면 무릎이 멍들어 있어서 사무실 CCTV를 돌려봤더니, 글쎄 무의식중에 자기가 자기 허벅지를 꼬집고 있더라는 거예요. 올여름에만 이런 얘기를 호소하는 사람이 벌써 네 명째였어요. 하나같이 일 잘하고 야무진 분들이었죠. 저는 이게 자해의 일종인가 싶어서 슬슬 염려가 되기 시작했어요.

“일단 밥 잘 챙겨 먹고 제때 자면서 쉬고 계셔.” 이렇게 말했는데, 여기서 또 한 번 놀랐어요. 네 명 모두 밥을 너무 자주 거르는 사람들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물었죠. “아니, 안 먹고 안 자면서까지 해야 할 만큼 일이 많아? 나라를 구하고 계셔?” 너무 바빠서 그렇대요. “삼각김밥 한 개 입에 넣을 시간이 없다는 거야? 나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데.”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얼굴이 있었어요. 우리 「월간 마음건강」 필진이기도 한 심리학자 이서현 작가였죠. 이야기를 듣더니 이서현 작가는 명쾌하게 답을 줬어요. “아, 그거 ‘자기 처벌’이라고 부르는 건데요.” 자기를 처벌한다니, 저는 좀 섬뜩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자해랑은 결이 좀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자해가 감당 안 되는 감정을 어떻게든 조절해 보려는, 신경계의 컨트롤을 벗어난 몸부림에 가깝다면, 자기 처벌은 내가 나한테 ‘의도적으로’ 벌을 주는 거래요. 본인이 미처 몰라도 이런 마음이 깔려 있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잘못했는데 아무 피드백도 없으면 나는 더 늘어질 거야. 어떤 벌이라도 받아야 다시는 안 그러지.’ 밥 먹는 1분 2분을 아낀다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라도 해야 스스로를 덜 자책하는 ‘덜 나쁜 상태’가 되니까요. 밥까지 거르며 했는데도 못 해내면 ‘그래도 이렇게까지 했는데 못 한 거야’ 하는 일종의 면죄부가 생기기도 하고요. 그렇게 ‘나는 밥 먹을 자격이 없다, 쉴 자격이 없다’며 스스로를 강박 속에 가두는 거죠.

사실 여기까지는 저랑 관계없는 얘기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일이 안 풀리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잠이나 폭식, 닌텐도 게임 속으로 도피하는 쪽이거든요. 그런데 그다음 설명을 듣고는 저도 남 일 같지가 않더군요. 이 자기 처벌에는 늘 완벽주의가 따라오는데, 이게 결과물이 실제로 완벽하냐 와는 아무 관계가 없대요. 학점 목표가 B+인데 B0를 받으면, 실망하고 낙담하는 정도가 아니라 ‘B0를 받다니 나는 왜 사나’까지 가는 거죠. 남들 눈엔 별일 아니어도, 그 사람에겐 목표를 못 이룬 순간 ‘나는 살 가치가 없다’는 파국이 오는 거예요. 기준이 얼마나 높으냐가 아니라, 그 기준에 닿지 못한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인 거죠.

저에게도 그런 포인트가 있었어요. 운동이나 다이어트가 그랬죠. 주 4일 유산소를 하기로 해놓고 세 번밖에 못 하면 ‘난 이러니까 안 되지, 망했어’로 가버리는 거예요. 그런 저에게 헬스장 트레이너 선생님이 뜻밖의 방법을 알려줬어요. “회원님, 횟수로 하지 말고 총량으로 해봐요.” 일주일에 200분을 하겠다고 총량으로 목표를 세우라는 거죠. 재택하는 날 집에 있는 사이클에서 100분을 미리 채워 두면 남은 엿새는 100분만 하면 되고, 짬이 날 때 공원 자전거를 10분씩만 타도 나는 목표를 이룬 사람이 되는 거예요. 기준선 하나를 ‘횟수’에서 ‘총량’으로 바꿨을 뿐인데 저에게는 꽤 좋은 처방이 되더라고요.


서현 작가도 재미있는 비유를 하나 해줬어요. 완벽주의자분들을 코칭할 때 꼭 그려주는 기준선인데, 바로 교도소를 떠올리라는 거예요. 정말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인데도, 거기서조차 때 되면 밥 주고, 재우고, 쉬게 하고, 씻게 해줘요. 그러니 내가 아무리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어도, 적어도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보다는 나를 낫게 대접해야 하지 않겠냐는 거죠. 우리, 그 정도로 악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때 되면 먹이고, 때 되면 씻기고, 때 되면 쉬게 허락해 주자는 거예요.


아마 ‘안 먹고 안 자고 매달려도 안 되는데, 챙길 거 다 챙기면 더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저도 똑같이 물었거든요. 그랬더니 서현 작가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애초에 밥 굶고 안 잔다고 일이 더 잘 됐으면,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도 않겠죠.” 굶고 안 자고 달려들어서 일이 다 이뤄졌고 늘 만족스러웠다면 계속 그렇게 하시고, 그게 아니라면 제시간에 자고 제시간에 먹는 새로운 방법을 한번 써보자는 거예요.


생각해 보면 그래요. 내가 나에게 모질게 굴수록 나는 오히려 얼어붙어서 로딩이 길어지고 버퍼링이 걸리잖아요. 아이를 혼낼 때랑 똑같아요. “울지 마, 뚝 그치고 똑바로 말해!” 하고 다그치면 그 아이가 제대로 말하던가요? 더 얼어붙고, 더 울고, 더 말을 더듬을 뿐이죠.


결국 나에게 모질게 구는 건, 나를 더 나은 결과로 데려가 주는 효과는 미미한데 내 감정의 면죄부 조금을 챙기려고 나를 너무 많이 지치게 하는, 소위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처벌은 대체 누구를 위한 걸까요? 우리, 타인에게는 늘 그토록 관대하고 다정한 그 마음을 방향만 돌려서 딱 절반만이라도 나에게 돌려줘 보면 어떨까요? 아니, 그게 어렵다면 우리 자신을 최소한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만큼은 대접하고 있는지, 딱 그 정도 최소한의 잣대로라도 다시 한번 검토해 보면 어떨까요?

editor 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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