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롯의 힘

현실의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만 작가의 시간은 다릅니다. 똑같은 사건이라도 어떤 순서로 배치하고 어떤 논리와 패턴으로 엮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이를 플롯(plot)이라고 부르는데 놀란 감독은 이 분야의 달인입니다. 마니아들이 그의 영화를 몇 차례나 반복 관람하는 이유죠. 이전에 놓친 것을 계속 발견하게 되니까요.

<오펜하이머>는 국가의 부름을 받아 원자폭탄을 성공적으로 만들었음에도 스파이 누명을 쓰고 몰락하는 이야기입니다. 놀란 감독은 여러 시간대를 교차시키며 많은 인물이 엮이게 연출함으로써 오펜하이머의 삶과 당시 시대상을 입체적으로 그려냅니다. 대단한 솜씨지만 호불호가 나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그 기법과 관점에 경탄하지만 누군가는 구성이 지나치게 복잡하다며 불만을 표하는 것이죠.

실제 오펜하이머는 1954년 청문회 이후 처량하게 살다가 62세이던 1967년에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를 복권하려는 시도가 있긴 했으나 냉전 때문에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그의 복권은 68년 만인 2022년에야 이뤄졌습니다. 미국 정부가 “오펜하이머 박사가 겪은 과정이 얼마나 편견에 가득하고 불공정했는지에 대한 많은 증거가 드러났고 그의 충성심과 애국심은 확인됐다”며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