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규,『제자반』(미출간 원고)

독자님, 안녕하세요.

복 있는 사람 마케터 B입니다.


이번 주일부터 시작하는 대림절을 생각하면 늘 캄캄한 밤의 풍경이 떠오릅니다. 그 이야기는 밤에 시작되었으니까요. 공교롭게도 이 절기는 한창 밤이 길어지는 겨울과 겹치기도 하네요!


바로 그 캄캄한 어둠을 뚫고 온 아기 예수의 탄생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미 날 때부터 자본과 힘과 권력을 가진 아기가 아닌,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태어난 아기를 기다리며 소망하는 것. 이것이 우리 세계에 어떤 ‘복음’이 되는 걸까요?


오늘 <월요일의 복음>에서는 이정규 목사님의 『제자반』 첫 번째 원고 ‘복음이란 무엇인가-무엇이 복음이 아닌가’를 보내드립니다. 대림절을 앞둔 이때, 우리에게 ‘복음’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

그래서 작은 이벤트도 준비했습니다. 『제자반』 원고를 읽고 아래 Feedback을 통해 독자님의 기대평과 의견, 바라는 점 등을 자유롭게 남겨 주세요. 열 분을 추첨하여 『제자반』의 기초가 된 이정규 목사님의 『새가족반』을 보내드리겠습니다!

 

#32 복음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복음이 아닌가

가장 최근에 “사랑한다”라고 말한 적은 언제였고, 누구에게였나요? 제 경우 오늘 아침 출근할 때 제 딸들에게 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분들마다 상황은 좀 다르겠지만,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듣고 많이 합니다. 부부나 연인끼리는 자주 하겠지요. 친구 사이에서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종종 시광교회 교우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회사는 사내 인사가 “사랑합니다.”인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더니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여러 상황에서 같은 단어, 곧 ‘사랑’이라는 단어를 듣습니다. 하지만 각자의 상황마다 받아들이는 의미는 아주 다르지요. 연인 사이에서는 설레는 감정이 느껴질 거고, 가족끼리는 안정감과 포근함이 느껴질 겁니다(사춘기 딸들은 성가셔할 수도 있습니다만). 스팸 전화를 받았는데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는 짜증이 나기도 할 겁니다(혹시 이 업계에서 일하는 분이 있다면 힘내시라고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이처럼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남용되어 의미가 모호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 이형식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 ‘사랑’이라는 말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한계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넓은 의미 폭을 갖게 되어, 그 말을 사용하기가 주저된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정이 '사랑'의 원의인데, 이제는 식욕이나 기타 물욕 내지 정복욕 등과 구별되지 않는 탐욕에 이끌려 도달하는 심정적 경개(景槪)나 행위마저 ‘사랑’이라는 말로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누가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근엄한 음성으로 말하면, 그것이 음란한 농담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 말이 특정 집단이나 유사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 너무 헤프게 사용되다 보니, 그 말속에 있던 의미적 절박성과 곡진함이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 말이 거짓과 위선의 냄새마저 풍기게 되었다. 지극히 아끼고 애틋하게 근심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리키던 말이, 음욕이나 기타 야욕까지도 지칭하게 되었으니, 진정한 연인들이나 개결한 벗들, 이웃들, 우애 깊은 혈연들은 오히려 그 말을 사용함에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요컨대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가 모호해진 것이다.

슬프게도, 교회 안에서 ‘복음’의 의미도 모호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지만 복음과 상관없는 말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닌데, “나는 복음을 전했다”라고 말한 사람이 실제로는 전혀 복음을 전한 적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복음이라는 말의 의미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무엇이 복음이 아닌지를 먼저 설명하려고 합니다.

무엇이 복음이 아닌가

복음은 충고나 명령이 아닌, 좋은 소식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우리는 언론을 통해 여러 기사를 봅니다. 그리고 그 기사들은 소식을 담고 있지요. 어떤 소식은 나쁜 소식이고, 어떤 소식은 아주 좋은 소식입니다. 예컨대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전염성이 높습니다”라는 소식은 나쁜 소식입니다. 하지만 “FDA의 승인을 받은 백신과 치료제가 널리 보급되고 있습니다”라는 소식은 좋은 소식이지요.


각 소식은 충고(또는 명령)와 연계됩니다. “확진자가 폭증합니다”라는 소식은 “마스크를 잘 쓰십시오. 꼭 손을 씻고 거리두기를 실천하십시오. 가급적 집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영업과 모임을 중지하십시오”라는 명령과 이어집니다. “백신이 FDA 승인을 받았습니다”라는 소식은 “백신을 맞으십시오”라는 명령과 이어지지요. 이것을 표로 정리해 볼까요?

마찬가지로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인간은 본래 죄를 범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였습니다. 하나님께 정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완벽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저주와 진노를 받으시고, 우리가 지켜야 하는 율법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의로움의 증거가 되셨지요. 그래서 백신 개발이라는 좋은 소식이 요구하는 것이 그저 “백신을 맞으십시오”인 것처럼, 복음이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께로 오십시오”뿐인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을 자주 놓치곤 합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통로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복음만을 말하지는 않고, 율법 또한 말해줍니다. 성경은 칭찬뿐만 아니라 충고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하는 일도 말해줍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만 읽어내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 한번 살펴볼까요? 에베소서에 있는 다음의 말씀을 같이 읽어봅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4-6)

이 말씀은 복음일까요? 율법일까요? 복음입니다. 위의 말씀은 명령이 아닙니다. 소식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말씀도 읽어볼까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1-3)

이 말씀은 어떨까요? 바울이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들어야 할 뿐 아니라 순종해야 할 명령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아닙니다. 복음이 아니라고 해서 하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복음과 율법은 동등하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복음과 율법은 구분해야 합니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고 성경을 읽을 때, 자꾸 명령만 마음에 남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시간을 내서 에베소서 전체를 읽어보십시오. 이는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게 쓴 6장 분량의 편지인데, 1~3장의 내용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고, 뭔가 좋은 말 같은데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면 4~6장을 읽으면 ‘아! 이렇게 살라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좀 더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1~3장에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는 내용이 없고, 4~6장에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복음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성경의 명령만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하신 일은 추상적으로 느껴지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령하신 것은 분명하게 느끼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는 ‘어렵고 추상적이고 모호하군.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택하셨다고? 나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무슨 소리지?’하며 심드렁하다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렇게 살아야지’ 또는 ‘왜 이렇게 성경에는 하라, 하지 말라는 요구가 많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은 성경을 그저 윤리적 명령의 집합으로만 보게 됩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깊이 사랑하셔서 얼마나 자신을 희생하셨는지, 얼마나 우리를 깊이 돌보고 계시는지 모르게 되는 것이지요.

자. 이제 복음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시나요?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셨고, 여전히 하고 계신 일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위대하고 아름다우신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지금도 하고 계신 일입니다. 이 소식은 정말 방대하고 깊습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지만, 지금도 부요한 복음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놀랍고 기쁩니다. 그래서 16세기의 목회자 윌리엄 틴들은 복음을 가리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 기뻐 노래하며 뛰고 춤추게 하는, 좋고 즐겁고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는 이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화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음에도, 이 소식이 너무나도 좋고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기꺼이 화형장으로 끌려가는 선택을 할 정도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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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두 번째 <월요일의 복음>은『제자반』(미출간 원고)에서 발췌했습니다.

<월요일의 복음>을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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