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길이나 특정 시간을 되돌아보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그곳엔 기쁨과 희망이 대부분인가요, 아니면 악몽과 같아 식은땀이 함께하거나, 지독하게 뿌예서 발 하나하나 디디는 게 조심스러운가요? 그땐 중요하다고 느낀 것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몇 번의 변곡점을 넘으며 잊히거나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기도 하지요. 거추장까지는 아니더라도 특정 위치나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 누군가가 가까운 사람이나 나 자신일 때도 있고요.

2009년 <House in Your Head>로 지금의 팩토리2 파사드에서 반짝이는 두 눈을 선사했던 덴마크 아티스트 듀오 란디와 카트린(Randi & Katrine)이 15년 만에 서울을 찾았습니다. ‘H189A’라 이름 붙인 변압타워(Transformertower) 조형물과 함께요. 덴마크의 복지국가 건설 과정에서 도시와 시골에 전기를 공급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임무를 맡았던 이 구조물은 지금은 그 쓸모를 잃고 배회 중입니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조금은 쓸쓸한 모습으로 방향을 잃은 채 발이 닿는 대로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길을 잃었던 경험을 떠올려보죠. 익숙한 길에서 떨어져 나와 온전히 길을 잃었을 때, 두려움과 함께 오묘한 호기심과 계속해서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을 감탄했던 그때를요. 더 적극적으로는 나만의 감으로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이도 있어요. 그렇다면, 전혀 다른 시대와 장소에 놓인 이 변압타워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까요? 자신만의 길을 만들기도 할까요?

✉️ 전시   Transformertower Longings 변압타워의 모험

사진. 정해민

팩토리는 2005년부터 북유럽 예술교류 프로젝트 ‘아틱피버(Arctic Fever)’를 지속적으로 기획 및 실행해오고 있지요. 올해는 덴마크 아티스트 듀오 란디와 카트린을 실로 오랜만에 서울로 초청해 북유럽 예술은 물론, 팩토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시도해온 퍼블릭아트를 선보입니다. ‘이동 불가한 물리적인 조형작품’이라는 통상적인 개념을 넘어서는 이번 프로젝트는 이제는 그 쓸모를 잃었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서는 변압타워(Transformertower)를 통해 조형예술의 도시 개입, 공공과 개인적인 경험, 그리고 기록과 확장에 대해 관객 여러분과 다양한 생각을 주고받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사진. 김다인

몸의 연장으로서의 집 

<Transformertower Longings (변압타워의 모험)> 프로젝트는 여전히 거대 조형물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 퍼블릭아트의 개념에 질문을 던집니다. 이는 하나의 퍼블릭아트가 작품 혹은 특정 행위로서 도시에 개입했을 때 변화하는 해당 장소의 다이내믹, 그리고 익숙했던 도시 속 다양한 맥락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를 재고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조형물을 몸에 착용한 상태에서 작가 혹은 퍼포머는 몸을 통해 예술을 감각하는 경험을 하게 되며, 이를 너머 개인이 퍼블릭아트가 되고 이러한 과정 중의 해프닝 또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란디와 카트린은 상실감과 슬픔을 상상의 건축물로 선보인 바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특히 아주 가까운 과거조차 쉽게 지워 급격한 도시풍경 변화의 표상이 되어버린 서울에서 느끼는 ‘상실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서울을 상징하는 이번 작품은 ‘착용 가능한 조형물(wearable sculpture)’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착용한 퍼포머가 거리를 활보함으로써 일시적이나마 특정 장소에 개입해 우리가 사는 도시 풍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퍼포먼스는 영상으로 기록하여 전시 동안 조형물과 함께 전시합니다. 

본 프로젝트에서는 한국의 비디오그래퍼, 퍼포머, 그래픽 디자이너, 스크린아트 에이전시 등과의 협업으로 한국 내 다양한 도시 풍경을 기록할 예정입니다. 또한 작가들이 직접 제작한 콘크리트 모형을 비롯해 이번 전시를 기념하고 기록하는 팩토리에디션도 마련하였으니 전시장에서 직접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사진. Paul Skovbakke
작가소개 
란디와 카트린(Randi Jørgensen 란디 조르겐슨, Katrine Malinovsky 카틀린 말리노프스키)은 덴마크 왕립미술아카데미를 졸업한 2004년부터 조각, 설치미술, 공공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 작업해온 덴마크 작가 듀오입니다. 평소 사람과 건축, 자연의 관계에 대해 다루면서도 재미와 유머를 더해 오브제나 건축물을 의인화한 공간 설치 작업을 해왔습니다.

덴마크 및 한국, 호주, 터키, 러시아, 미국 등 전 세계에서 다수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으며, 2009년 갤러리 팩토리의 파사드를 사람의 얼굴로 형상화한 작업을 시작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어 다양한 전시 및 영구설치 퍼블릭아트를 제작했습니다. 2014년 시드니비엔날레 초청작가로 선정되어 다양한 조형물로 구성된 가상의 마을을 구현하는 대규모 전시를 가졌고, 2018년 부산 고려제강 F1963에서 폐산업시설 문화공간 국제교류전 《재:생》에도 참여한 바 있습니다.


SNS @randiogkatrine

작가 노트

변압타워는 고압을 저압으로 변환하여 도시와 시골의 가정에 전기를 공급하는 것으로, 덴마크의 산업화 시대에는 복지 국가 건설에 매우 중요하지만 익명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오늘날에는 과거의 자랑스러웠던 철탑들이 연결은 끊긴 채 고속도로를 따라 유령처럼 서 있습니다.

이 타워 중 하나를 ‘H189A’ 타입이라고 이름 붙여보죠. 어느 땐가부터 H189A가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해체되어 제 기능을 상실한 이 타워는 과거에 누렸던 산업 시대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나은 곳을 찾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기 위해 우리와 함께 여행하였고, 그러는 사이 점차 우리 몸의 일부가 되어갔습니다. 연결과 단절을 반복하며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거대한 도시 서울을 고독한 나그네처럼 걸으며 때론 작은 것을, 때론 거대한 것을 만나고 있습니다.

건축물은 우리의 일부이자 우리 몸의 연장선입니다. 우리는 사물과 건축물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건축물은 우리에게 소속감과 동질감을 줍니다. 그리고 유머는 우리를 둘러싼 도시와 사회가 빠른 속도로 변화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상실감과 소외감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불안감은 집을 떠나있을 때 잠시 찾아오지만, 집의 환경이 사라지거나 알아볼 수 없게 되면 훨씬 더 깊어집니다. 도시 공간에서 건물과 장소가 사라지면 마치 우리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전시정보

전시명  Transformertower Longings 변압타워의 모험
작가  란디와 카트린 Randi & Katrine
장소  factory2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0길 15)

기간  2023.03.23.(목)-2023.4.23.(일)

오프닝  2023.3.23.(목) 오후 6시 (feat. 아티스트 토크)
관람 시간  목-일요일, 11-19시 (월-수요일 휴관)

기획  팩토리2 (factory2)
진행  김다은, 김다인, 김보경, 김채리
그래픽 디자인  김유나

협력  김다움(비디오그래퍼), 윤재민(비디오그래퍼), SAA(실크스크린)

설치도움  손정민
주최  팩토리2 (factory2)
후원  주한 덴마크 대사관, Danish Arts Foundation

✉️ 아카이브    란디와 카트린, 그리고 팩토리

팩토리의 건물을 길 건너에서 바라보면, 눈을 깜빡이는 거대한 얼굴의 형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건물은 얼굴이 되었고, 지붕 위의 두 눈은 도시의 삶을 따라 움직입니다. 란디와 카트린은 <House in Your Head>(2009)를 통해 우리가 건물과 도시를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우리의 시선에 화답하는 집의 표정을 강조합니다. 이후에도 이 아티스트 듀오와 팩토리는 단단한 관계의 타래를 바탕으로 서울, 함양, 광명 등에서 상설 혹은 임시의 퍼블릭아트를 함께 작업했습니다. 2013년 팩토리가 새롭게 접근한 <라운드 프로젝트>에서는 함양 상림공원에 타워이자 사람인 <타워맨>을 제작해 앉혔고, 2021년 광명 유 플래닛에 설치한 <Forest>에서는 도시 공간에 휴식의 장소로서 나무 아래의 여유 공간을 조성했는데, 이들 모두 거대한 스케일의 조각품임에도 불구하고 상상력 가득한 도시의 의인화를 통해 엉뚱하면서도 묘한 감각과 동화적 정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2023년 <Transformertower Longings>을 기점으로 란디와 카트린은 한국에서 그간 진행했던 작품들을 방문하하여 이 과정을 기록합니다. 공공 장소의 조형작품을 일시적이고 단절된 예술품이 아닌, 지속적이고 오픈된 형식으로 재탄생시키는 것 또한 이들의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는 란디와 카트린, 그리고 팩토리2의 15년이라는 오랜 우정과 파트너십을 기념하는 것도 중요한 맥락 중 하나입니다. 관계와 지속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팩토리의 태도가 곧 기획의도이기도 하니까요.
2009년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란디와 카트린 듀오와 팩토리가 함께 한 프로젝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안내하는 [링크]에서 각 프로젝트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과 이미지를 참조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날씨>, 2019.1~2021.8 @광명유플래닛 [링크]
<라운드 프로젝트>, 2013 @경남 함양 상림공원  [링크]
<우연한 공동체>, 2012 <인생사용법> 중에서 @문화역서울284  [링크]
<노르딕 데이: 일상 속의 북유럽 디자인>, 2012 @한국국제교류재단  [링크]
<House in Your Head>, 2009 @갤러리팩토리  [링크]
<House in Your Head> 2009 @갤러리 팩토리 (현 팩토리2)
란디와 카트린은 2000년대 활동 당시 살바도르 달리가 사용했던 ‘편집증-비판적인 방식’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이는 세상의 이미지에 대한 의도적인 과잉 해석이며, 전시회의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편집증과 유머, 비판적인 의사결정의 혼합이다. 이들은 도처에서 얼굴들을 만난다. 모든 박공과 외관이 얼굴처럼 돌아다본다. 하나의 재미있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 어떤 집착으로 바뀌었다. 얼굴에서 경험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단지 평면에 두 개의 구멍만 필요할 뿐, 거기서 얼굴이 시작된다. <House in Your Head>는 이제 팩토리2의 얼굴이 된 작품이다. 2009년 전시 직후 구조보강을 거쳐 영구 작품으로 설치되었다.
<타워맨 Towerman> 2012, 2015 @함양군 상림숲 입구 & 덴마크 소도시 코게의 항구 앞
중세 유럽의 교회 건물을 의인화하여 만든 타워맨은 2012년 3월 서울 시내 을지로 미래에셋 앞 건물숲을 배경으로 약 4개월간 설치된 이후 함양 상림공원의 입구에 영구설치되었다. 목재로 만들어진 타워맨은 숲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관람객들을 친근하게 맞이하며 숲과 사람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후 덴마크, 러시아 등지에서도 크기는 유사하나 색과 내부 구조가 각기 다른 타워맨이 설치되어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숲 Forest> 2021 @광명시 일직동 광명역세권 택지사업지구내
<숲>은 ‘쉼’을 주제로, 우리가 대자연 속 혹은 도시 공간에서 잎사귀로 가득한 큰 나무 아래, 건물 외부의 캐노피 아래를 피난처 삼는 것처럼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공간과 여유, 더 나아가 타인과 함께 한시적으로나마 장소를 공유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작가는 작업이 설치될 옥상 정원이 인근 아파트의 주민과 가족이 산책을 하는 주요 동선임을 감안해 모두가 함께 편히 즐길 수 있는 가족 친화적인 성격을 갖고 익숙한 자연의 소재와 형태, 수공예적인 제작 과정을 포함한 작업을 고안하였다.

✉️ 팩토리 친구들

2023년을 맞으며 한해와 이후의 중장기 계획으로 바쁜 팩토리에 새로운 친구들도 함께 합니다. 봄바람과 함께 살랑살랑 즐거운 마음으로 한동안 쉬었던 ‘팩토리 친구들’ 소식을 전합니다!
올해 프로그램 디렉터로 팩토리2와 함께 하고 있는 김다은입니다. 예술공간 팩토리2, 문화예술기획그룹 다단조, 문화복합공간 코스모40에서 기획자로 전시, 워크숍, 교육 프로그램 등을 펼쳐왔습니다. 한편, 여성, 엄마, 기획자라는 세 개의 정체성을 단단하고 건강하게 지키고 지속하려는 노력과 기획력을 엮어, 단행본 『자아, 예술가, 엄마』, 『자아, 예술가, 아빠』, 『서울의 엄마들』을 선보인 바 있으며, 부모 예술가의 연대를 꿈꾸는 예술육아소셜클럽에서 활동 중입니다.

팩토리2로 초대한 변압타워 H189A가 하루가 다르다고 변화하는 한국에서는 길을 잃지 않고 잘 다닐 수 있을지 염려 반 호기심 반입니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모를 길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잃어버린 길 가운데에서도 방향을 잡아주는 것은 꾸준한 기록이기도 하거든요. 15년 만의 방문이지만, 팩토리는 란디와 카트린과 함께 간간히 퍼블릭아트 프로젝트를 나누었고, 또한 그것들을 꾸준히 기록해왔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이 집으로 돌아갈 조약돌을 하나하나 놓아두었던 것처럼요. 작지만 모이면 언젠가 나침반이 되어줄 기록들에 이번 전시도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 훗날 변압타워가 잘 디딜 수 있는 조약돌이 되길 바랍니다. 

기획 팩토리2 
진행 김다인, 김보경, 김채리
디자인 김유나
에디터 뫄리아
디렉터 홍보라 
팩토리2 드림
팩토리2
factory2.seoul@gmail.com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10길 15 02-733-48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