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신학자

독자님, 안녕하세요.

편집자 B입니다.

 

어느 주일,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날은 ‘새생명 초청 잔치’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교회 식당에는 권사님들이 만들어 둔 따뜻한 밥과 잡채, 파전과 김치전, 육개장이 있었습니다. 약 500명이 먹고도 남을 잔치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교회에 새로 온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권사님들은 음식이 남을까 걱정했습니다. 그 당시 철이 없고 무모했던 저는 꽹과리를 들고 교회 밖을 나섰습니다.

 

마침 주일학교 교사였던 저는 아이들과 함께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왔습니다. 동네 길거리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 그리고 부모님들도 교회로 와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꽹과리를 가지고 아이들과 동네를 거니는 제 모습은 마치 각설이와 같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노숙인 한 분이 저를 따라 교회에 왔습니다. 저는 교회 사람들이 반갑게 맞이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교회 분위기는 제가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달랐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가가와 도요히코는 협동조합운동가로 알려진 신학자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경제생활에 적용한 네 가지 원칙, 곧 ‘비착취의 원칙, 형제애의 원칙, 나눔의 원칙, 사회적 연대의 원칙’을 세워 협동조합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그는 단순히 퍼주기 구제만으로는 빈민의 실제적 자립이 일어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경제적 자급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을 평생 고민했습니다. 그리하여 협동조합을 만들어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를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103 일본을 구해 주세요

가가와 도요히코의 아버지 덴지로는 1847년에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네 섬(혼슈, 규수, 홋카이도, 시코쿠) 중 가장 작은 시코쿠 동부의 아와에서 아홉 형제 중 하나로 태어났다. 그는, 그 지방의 가장 유력한 지주 가문의 당주(당대 호주)였지만 아들이 없던 가가와 세이베이의 양자로 들어가 가가와 가문의 14대 당주가 되었다. 이름도 덴지로에서 준이치로 개명했다. 가문의 명예에 어울리게 지성적으로 탁월했기에, 자유 민권운동을 후원하면서 정치결사 조직인 지조샤自助社의 임원도 맡았다. 도쿄에서 천황의 자문기관인 원로원 서기관으로 활동하다가, 요코하마로 가서 달러 시세거래소(도쿄증권거래소의 전신)에서 중개업을 하기도 했고, 다시 고베로 가서 해상운송 대리점인 가가와회조점賀川回漕店을 설립한 후 지점을 낼 정도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그의 결혼 생활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준이치는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게이샤로 일하던 마스에와 동거를 시작했다. 이 둘 사이에서 다섯 아이가 태어나는데, 1888년 7월 10일에 태어난 가가와 도요히코는 셋째 자녀이자, 둘째 아들이었다. 당시 일본 전통상,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정실부인 대신 첩을 들여 대를 잇는 일은 흔한 풍습이었다. 그러나 청교도처럼 예민한 도덕주의자로 성장하는 훗날의 가가와에게 일부다처제는 죄악이었다. 가가와는 상업으로 성공한 부친과 그의 사랑을 받는 둘째 아내의 아들로, 부모 생전에는 대체로 부유하고 행복하게 자랐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질과 독감으로 1892년 11월에 4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고, 어머니도 이듬해 1월에 넷째 아들을 낳은 후 8일 만에 죽고 말았다. 가가와는 당시 다섯 살이었다. 다섯 아이는 그렇게 급작스레 부모 없는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덟 살인 누나 에이와 다섯 살인 차남 도요히코는 정실부인인 미치와 친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던 미치는 갑작스레 떠맡게 된 아이들에게 애정이 없었다. 가가와는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과 감정을 여러 글과 발언에서 표현했는데, “사랑 없는 너른 집”a big house without love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는 표현이 대표적이었다. 친부모의 죽음으로 양모에게서 학대를 받고, 아이들로부터 첩의 자식이라 놀림받으며, 홀로 꽃밭이나 숲, 들판, 창고에 숨어들어 책을 읽거나 주위를 관찰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던 극도로 외로운 소년 시절의 가가와. 거부와 상실, 자기 비하와 혐오의 경험이,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사랑의 화신으로 가가와를 빚어낸 근원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가가와 도요히코와 아내 하루

가가와의 일생을 바꾼 결정적인 만남은 중학교 입학과 함께 찾아왔다. 현립 도쿠시마중학교에서 1년을 보낸 후, 이듬해 1901년에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가타야마학교로 옮겼다. 많은 아이가 그랬듯, 가가와도 처음에는 영어를 배우려고 교회 예배에 출석하면서 처음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을 만났다. 이렇게 만나게 된 찰스 로건 박사는 당시 스물여덟 살의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학교에서 예수의 생애를 영어로 가르쳤다. 또 한 명의 남장로회 교사 선교사 해리 마이어스 박사도 아내와 함께 총명하고 감수성 예민한 가가와를 정성껏 돌보았다. 부모도 없었고, 친척에게서 사랑을 받아 본 일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소년’ 가가와에게 이 외국인들은 제2의 부모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이때 느낀 감정을 여러 수사를 동원해 감동적으로 표현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의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인간이었으며, 누구든지 나에게 친절히 대해 줄 사람을 간절히 찾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분은 나를 끌어당길 수 있었다.

 

로건 박사와 마이어스 박사의 가정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것은 비단 성서만이 아니다. 이들 두 가정이 보여준 사랑이었다. 싸움에 지쳐 갈 곳이 없을 때, 이 두 가정은 언제든지 나에게 열려 있었고, 날 기쁘게 맞아 주었다. 그들은 나를 마치 자신들의 자식 가운데 한 명인 것처럼 보듬고 키워 주었다.

성서와 선교사를 통한 감화에도 불구하고, 조숙했던 가가와는 약 3년간 내면의 복잡한 문제들로 고민했다. 그러다 16살인 1904년 2월에 기독교 신앙을 확신하고 도쿠시마일본기독교회에서 마이어스 박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가가와가 이들에게서 배운 것은 신앙과 지성으로서의 성서, 감정의 교감으로서의 가정과 가족, 실천으로서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에게서 기독교 신앙을 지성, 감정, 실천 중 하나로만 습득하지 않고, 전인적으로 배운 것이 가가와가 이후 총체적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르치고, 실천할 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이때 이후 가가와는 진로를 정했다. 중학교 학비를 대주던 숙부는 장래가 보장되는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하면 다시 학비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가가와는 기독교 사역자가 되기 위해 마이어스 박사가 모금한 재원으로 도쿄의 장로교계 대학인 메이지가쿠인대학明治學院大學 고등부 신학예과에 입학했다. ‘초연’超然이라는 별명을 가진 학생답게, 그는 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책 거의 전부를 읽었다고 말할 정도로 신학, 문학, 철학, 자연과학, 역사, 농학, 예술 등 광범위한 분야의 독서에 매진했다. 심지어 독서하느라 수업에 빠지기까지 했다. 재학 중에 가가와를 내내 가르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오거스트 칼 라이샤워 박사Dr. August Karl Reischauer는 그를 메이지가쿠인 개교 이래 가장 우수한 학생이라 평하기도 했다.

광범위한 독서로 탄탄한 지식과 교양을 갖춘 가가와는 중학교 시절에 이미 평화주의자 톨스토이, 러스킨, 칸트, 일본 기독교 사회주의자 기노시타 나오에와 아베 이소의 책을 섭렵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면서, 학교 교과과정까지 국수주의와 군국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교련이 정규 과목으로 편성되어 모든 학생이 모형 총을 들고 군사훈련에 참여해야 했다. 그러나 15살의 가가와는 교련 시간에 총을 던져 버리면서, 자신은 평화주의자이므로 살육 훈련에 참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교사에게 체벌을 받고, 교장에게 훈계를 들으면서도 마태복음 26장 52절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를 들어 자기 논리를 단호하게 변호해 냈다. 메이지가쿠인에서는 마르크스, 다윈, 엥겔스의 글을 읽으며, 이 사상가들의 무신론과 유물론, 과도한 폭력성을 비판했지만, 한편으로 약육강식 자본주의와 비인간적 기계주의 등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이때부터 세계 평화, 반전反戰, 형식주의 종교, 육식, 일부다처제(첩 문화) 등을 주제로 글을 쓰거나 항의 행동을 하며, 차후에 명성을 떨치게 되는 ‘행동하는 비판적 기독교 지식인’으로서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었다. 미성숙하기는 하지만, 그는 이미 어느 정도는 반제국주의자, 기독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환경보호주의자였던 것이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간토대지진 당시 예수단과 함께 구제 활동에 참여했다

1907년 3월에 메이지가쿠인대학 예과를 졸업한 가가와는 같은 해 9월 미국 남장로회에서 개교한 고베신학교(전후에는 고베중앙신학교)에 진학했다. 마이어스 박사가 고베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자 스승을 따라간 것이었다. 종합대학의 자유롭고 학구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었던 가가와에게는 신학이 보수적이고 도서관이 부실한 고베신학교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고베에서 가가와는 목회자로 빚어졌다. 아이치현 오카자키교회와 도요하시일본기독교회에서 목회를 배운 가가와는, 특히 도요하시교회 나가오 마키 목사의 겸손, 청빈, 고난, 환대, 전도에 큰 감화를 받았다. 이때부터 가가와는 대중집회 및 거리 전도 활동에 시간을 쏟는 전도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2-13세 무렵부터 각혈하는 등 결핵 증세를 보였던 그는 이 무렵 몸을 아끼지 않은 전도 활동의 결과,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가는 두 차례의 임사 체험과 신비체험을 했다. 실제로 가가와는 일평생 폐결핵, 트라코마, 신장병, 결핵성 치루, 축농증, 심장병을 앓는 ‘걸어 다니는 종합 병동’이었다. 아마도 죽음 앞에 서 있다는 이런 자의식이 그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역과 활동에 매진하게 한 동력이었을 것이다. 요양 중에 그는 후소라는 어촌 마을에서 『오두막 일기』를 쓰는데, 이것이 나중에 『사선死線을 넘어서』라는 제목의 자전적 소설로 출간되면서 그는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어린 시절의 소외 경험, 중학교와 메이지가쿠인에서의 지적·사회적 각성, 고베신학교 시절의 전도자 경험, 극한의 임사 체험을 자기 안에 종합적으로 아우른 새로운 가가와가 탄생했다. 이렇게 새롭게 태어난 가가와가 향한 곳은 고베의 빈민가 후키아이 신카와였다. 1868년에 메이지유신의 결과로 개항한 항구 고베는 1907년부터 신흥 도시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농촌의 극빈을 피해 일자리를 찾아온 이들이 신카와 지역에 나무로 허름한 연립주택이나 칸막이 집을 만들어 대규모로 거주하고 있었다. 가가와는 신학교 기숙사를 나와 이 지역에 세를 얻어, 아예 방화범, 도박 중독자, 알코올중독자, 매독에 걸린 거지와 한방에서 살았다. 신학교 굴뚝 청소로 번 푼돈을 거리와 골목을 돌아다니며 나눠 주고, 옷을 벗어 주고, 빈민가를 공포로 몰아넣는 불량배 패거리들의 싸움을 중재하고,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여인과 아이들을 돌보고, 고통에 빠진 자들에게 찾아가 기도해 주었다. 처음에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던 가가와는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이라는 존경받는 칭호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집에서 학교를 열어 아이들에게 국어와 산수를 가르쳤고, 초상이 난 집에서는 시신을 씻고 장례를 집전했고, 주일에는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활용했다. 처음에는 혼자 시작했지만, 이런 가가와에 감화된 동역자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 빈민가 사역이 바로 협동조합운동의 출발점이었다.

편집자 B의 시선


가가와 도요히코는 사람들에게 협동조합운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가가와는 사람들이 자신을 협동조합운동가보다 전도자로 기억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것보다 실제로 사람들과 살갗이 닿는 곳에서 강연하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가가와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전도 여행을 다녔습니다. 심지어 전도 여행을 간 곳에서 그는 앓아누울 정도로 아팠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도 도상에서 죽는 것은 전도자에게 영광입니다"라며 집회를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했습니다.


1946년 4월 23일에 그는 의식을 읽기 전에 죽음을 직감하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교회를 건강하게 해주세요. 일본을 구해 주세요. 세계에 평화가 올 수 있게 해주세요.” 그의 유언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교회의 건강, 일본의 구원, 세계의 평화. 아마도 그는 평생 이 세 가지 기도제목을 품고 나날을 보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독자님과 소통하며 함께 <이달의 신학자>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달의 신학자 뉴스레터를 함께 읽어 오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누어 주세요.

복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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