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하루의 끝에서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바빴다. 회의 자료를 정리하고, 기획안을 만들고, 이런저런 통화를 하다 보니 하루가 지났다. 아침에 먹은 초콜릿 두 조각과 오후 3시쯤 집어 먹은 견과류 한 움큼이 오늘 먹은 것의 전부다.
사무실 옥상에서 가루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임진강 쪽으로 밀려가는 노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오늘도 정작 중요한 일은 하지 못했구나 하는 자책감이 잠깐 들었지만, 잡다한 일에 치이어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것 역시 일의 속성이겠거니 하고 여기기로 한다.
이렇게 허겁지겁 살지는 말아야지 하고 수없이 다짐하지만, 일에 밀리고 치이다 보면 이런 다짐 같은 건 쉽게 잊어버린다. 내일도 해야 할 일의 목록이 길다. 아, 언제쯤이면 ‘사는 게 왜 이리 심심하지?’ 같은 불평을 읊조리며 살 수 있을까. 그때가 되면 이날들을 또 그리워하지나 않을까.
나는 일을 할 때는 몰아쳐서 하는 스타일이다. 상당히 몰입하는 편인데, 24시간 내내 오직 일만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봐서, 내 경우엔 그편이 일을 끌고 가는데 훨씬 효율적이었다. 긴장감을 가지고 일하다 보면 진행도 빠르고 아이디어도 더 많이 떠오른다. 하루에 하루에 8시간씩 석 달을 일하는 것보다, 한 달 동안 하루에 16시간씩 하는 것이 나았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렇다는 말이니 오해 마시길. 일을 끝냈을 땐, 그 일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어떤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 더 좋은 성과를 내는 것 같다. 일의 시작 단계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정상 궤도에 올리는 것이 중요한데, 이때는 쉴 새 없이 몰아쳐야 한다.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다가는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버린다. 비행기는 이륙 후 일정 고도에 오르기까지 연료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조종사가 가장 바쁜 때도 이때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정지 상태에서 출발할 때 가장 많은 연료를 소모한다. 이 시기만 지나면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긴다. 기어 5단으로 탄력 주행을 할 수도 있다.
요즘 많이 듣는 말이 ‘워라밸’이다. 더 좋은 삶을 위해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인 것 같은데, 나는 지금까지 일과 삶이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떻게 일과 삶을 정확히 분리할 수 있을까. 출퇴근 시간이 명확한 직장인들은 이게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나 같은 프리 워커에게는 사실 좀 힘들다. 일과 삶을 칼로 두부 자르듯 반듯하게 나눌 수 있다면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일과 삶은 분리할 수 없다. 사진가에게 사진은 일이자 삶이다. 요리사에게도 마찬가지다. 일과 삶은 하나의 엉킨 줄기로 흘러갈 뿐이다. 일에서 삶을 찾고, 삶의 성취를 일을 통해 이루는 것이 프리 워커다. 아마도 워라밸은 기업이 일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해낸 개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노을이 물러가고 어느새 어둠이 왔다. 별이 떴다. 오늘은 별이 볼 만하군. 반짝이는 별을 보니 지친 마음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된다. 하루를 온전히 내 것으로 살았다는 생각도 든다. 하루의 끝에서 이런 만족감이 든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바쁘게 일을 했든, 후회 없이 놀았든,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만족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것이다. 워라밸 같은 건 난 잘 모르겠고, 오늘은 집에 가서 스테이크를 굽고 괜찮은 와인을 따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