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선을 나눕니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요

우수수 잎을 떨어뜨린 나무들과 그 끝에 덩그러니 매달린 감 몇 알을 바라보며 돌아온 겨울을 실감했습니다. 님, 온기 속에 하루를 시작하셨나요? 엇비슷한 매일을 터벅터벅, 걷다 보면 문득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기 어려운 때를 마주합니다. 허무함이나 지겨움으로 삶의 공기가 탁해졌을 때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에 눈을 맞추고 문학을 손에 들게 되는 것 같아요. 나이와 성별도, 하는 일이나 취미도, 기상 시간과 말하기 부끄러운 버릇, 하다못해 손톱 모양마저 다른 누군가가 되어 그의 삶에 푹 젖어 들죠. 이야기가 끝났을 땐 다시 나로 돌아와 그간의 삶을 견주어 보게 됩니다. 거기서 내일을 가뿐하게 맞이할 정도의 의미를, 더 작게는 잠시라도 여운에 잠겨 마음이 충만해졌다면 충분해요. 그건 더운 볕과 찬바람을 이겨내고 가지 끝에 달린 감 몇 알처럼 달큰하기만 할 테고요. 이번 레터에서는 《AROUND》 97호 속 대구에 뿌리내린 영화감독 유지영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나로부터 시작된 물음표의 답을 찾기 위해 다른 삶을 이야기로 지었답니다.

우리는 일생이라는 긴 길을 걷는다. 걸음은 쉬이 멈추는 법이 없는데 끝내 무엇과 닿을지는 오리무중이다. 저벅저벅 내딛기만 하던 일생에 감독 유지영은 영화로 물음표를 남겨둔다. 〈수성못〉(2017)에서 살거나 죽기 위해 열심인 ‘희정’과 ‘영목’, 〈나의 피투성이 연인〉(2022)에서 각자의 우선순위를 따라 맹렬하게 어긋나는 ‘재이’와 ‘건우’도 삶 어딘가에서 물음을 마주했던 자신의 모습이 투영됐다. 감독의 집에서 만난 우리는 삶에서 마음 둘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눴다. 그 끝에 유지영은 나에게 말했다. “대구에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제가 아는 사람이 될게요.” 나긋한 목소리로 전해진 진심을 나는 덥석 붙잡았다. 생경한 얼굴을 한 이 도시에 비빌 언덕이 생긴 순간이었다.

지난해 11 월 〈나의 피투성이 연인〉 을 선보인 후로 시간이 흘렀잖아요. 지금은 어떤 작업을 하고 있어요? 

요즘엔 작업은 내려두고 일상과 마음을 되돌아보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 영화를 개봉하기까지 4년이 걸렸거든요. 세상에 내보일 때는 당연히 기분 좋고 관객들을 만나니까 반가웠는데, 이후로 인간관계에서 부침이 있는 일들을 겪으면서 내가 어떤 상태인지 다시금 돌아봐야겠더라고요. 처음에는 나를 칼로 찌른 사람을 탓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 칼에 대고 원망한다고 없던 상처가 되는 게 아니었어요. 더 찔릴지도 모르죠. 상대방과 상처에 매달려 있기보다 다른 쪽으로 치유를 해야 했어요. 

 

사람은 타인과 문제가 생겼을 때 되려 자신을 살필 기회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제가 유성호 법의학자를 좋아하는데, 유튜브 채널 ‘유성호의 데맨톡’에서 사람은 버킷리스트도 중요하지만 일생에서 하지 않을 걸 정하는 ‘더킷리스트’를 만들어야 한대요. 본인의 첫 번째 리스트는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과 일하지 않는 거라면서요. 어쩌면 창작자들의 취약점 같기도 한데, 가치를 만드는 작업이다 보니까 재거나 계산적인 게 어려워요. 일로 다가오는 사람을 한없이 믿을 때도 있어서 고민의 시작이 인간관계였다면 결국 나는 어떤 걸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까지 닿더라고요. 마음 정리는 현재진행형이에요. 

 

살면서 꼭 필요한 시간일 거예요. 감독님의 작업 스타일이 궁금한데 시나리오는 어떻게 물꼬를 터요? 

예를 들어 제가 A라는 주제를 영화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면 관련된 책이나 영화를 찾아보고, 생각을 노트나 아이패드에 써 내려가요. 그게 무르익으면 글로 옮기는데 마인드맵처럼 형식이나 구성에 대한 이미지를 그려보는 거죠. 거기까지 완성되었다면 시나리오는 술술 써져요. 왜냐하면 시나리오는 문학적인 작품성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오해가 없는 글이거든요. 이 글을 바탕으로 모든 스태프와 소통해야 하기 때문에 도면처럼 정확한 치수가 있어야 누가 보든 하나의 건물을 올릴 수 있어요. 글쓰기 양식이나 형식도 고유하기 때문에 단순히 글을 많이 썼다고 시나리오를 잘 쓰는 것도 아니에요. 

 

오해가 없는 글이라는 말이 인상 깊네요. 어느 정도 쓰면 꼭 출력해서 본다고 들었어요. 

오래된 습관이에요. 저는 시나리오가 시랑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설명이 되는 문장들이 이어지지만 시는 단어나 문장 사이의 간극이 리듬을 만들잖아요. 시나리오도 장소가 바뀔 때마다 ‘신Scene’이 넘어가는데, 그 리듬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출력해서 보는 게 좋더라고요. 내가 숨기려고 한 것, 보여주려고 한 것들이 만드는 리듬이 와닿아요. 

 

〈나의 피투성이 연인〉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고 싶어요. 주목받는 신인 작가 재이와 학원 강사로 성실히 일하는 건우의 연인 관계가 서로 다른 삶의 우선순위로 뒤틀리는 내용이에요. 

함께라는 가치에 대해 고민할 때 쓴 이야기예요. ‘우리 안에서 나를 지킬 수 있을까, 함께하는 와중에 내가 좀더 나답게 살아도 이 관계가 유지가 될까.’라는 일종의 두려움에서 시작됐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오랫동안 만나면서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 같이 살던 연인이 있었어요. 양가 부모님도 뵙고 가구나 가전도 다 마련해서 살았으니 결혼 생활이나 마찬가지였죠. 저는 방 한 칸을 작업실로 쓰고 남자친구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는데, 자연스레 제가 ‘집에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이 퇴근하면 함께 저녁 있는 삶을 보내고 같이 있고 싶으니까 나와 맞지 않는 라이프 스타일이라도 기꺼이 따랐어요. 작업을 하다가도 퇴근 시간에 맞춰서 급하게 청소나 빨래를 하고 저녁을 준비했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요. 좋아하기 때문에 참을 수 있던 게 점점 견디기 어려워지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되더라고요. 그런 삶을 비난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는 함께이기에 타협해야 할 부분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요. 영화를 쓰기 위해 준비하고 고민하다 보면 답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한 편의 영화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네요. 

독립 영화의 특징 아닐까요? 자본에 대해 자유로우니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대부분 내가 겪었고 지나왔던 것들 또는 천착하는 화두에서 비롯되고요. 작업을 통해 떠오르는 질문을 해소하려고 하고, 매듭을 짓다 보면 변화된 나를 보기도 해서 이야기 속에 자신이 빠지려야 빠질 수가 없더라고요. 독립 영화만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지만요. 

〈나의 피투성이 연인〉 속 주목 받던 신인 작가 ‘재이’를 보면 ‘건조하다’는 말이 먼저 떠오릅니다. 말투와 행동에서 드러나는 감정을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면, 재이는 중심선에서 한참 떨어진 위치일 것 같은 사람이거든요. 그러나 내심은 다릅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 속 솟구치는 불안감을 온몸 전체로 흡수하듯 괴로워하죠. 재이로 변하기 위해 배우 한해인은 “목소리에 사람의 내면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는 생각”으로 “얇은 목소리를 내고, 그 속에서 나오는 미세한 떨림으로 그의 예민함”을 표현했다고 해요. 인상 깊던 재이의 얼굴을 올해 개봉한 영화 〈폭설〉의 ‘수안’으로 새로이 마주했습니다. 배우 지망생 열아홉 살 수안과 아역배우 출신 설이는 특별한 마음을 나누지만 작은 오해는 이별을, 이별은 불현듯 찾아온 재회로 이어지죠. 마치 펑펑 쏟아진 눈이 녹아내렸다가 다시금 눈이 되어 내리는 모습 같기도 해요. 오가는 눈빛들이 아름다운 영화 속에서 한해인은 앳된 얼굴로 새로운 감정을 깨우쳐가던 수안과 성숙하지만 불안한 어른이 되어버린 수안을 섬세하게 그려나갑니다.

97호에는 ‘이 도시의 새 장면’이라는 이름을 단 기사가 있습니다. 세월을 품은 대구에서 저마다의 꿈을 갖고 새 장면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소개한 건데요. 함께해준 ‘더커먼’ 강경민 대표, ‘씨소’ 최수진 대표, ‘페이퍼보이스튜디오’ 배현재 대표와 작은 이벤트를 준비했답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 또는 피드로 각 공간에 비치된 《AROUND》를 찍고, 방문한 곳과 어라운드 계정을 태그해 업로드해주세요. 그 자리에서 바로 안아갈 수 있는 선물을 드릴게요.


· 더커먼 I 무포장 대나무 칫솔 1ea 증정
· 씨소 I 식물/화병 10% 할인 (*생화 제외)
· 페이퍼보이스튜디오 I 연필 1ea 증정 (*선착순 50, 소진 시 엽서 증정)
기간 : 11월 16일 ― 11월 29일

더 나은 일상을 위해 동네와 사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로컬스티치에서 11월 22일부터 25일까지, ‘크리에이터 위크, 홍대’를 선보입니다. 도시의 창작자를 응원하고 성장을 돕는 이번 프로그램은 전문가들의 공간을 둘러보는 오픈 스튜디오와 브랜드 세미나를 비롯해 일하기 좋은 카페와 코워킹 스페이스, 라운지에서 나만의 작업 공간을 제공하는데요. 어라운드의 ‘발견담’은 ‘프리 워킹 존’으로 여러분의 발걸음을 기다립니다. 아래 버튼을 통해 알아보세요.

뉴스레터에서는 이번 소식을 끝으로대구 면면을 살피던 97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이어지는 새로운 달에는 주제를 안고 인사드릴 텐데요. 어라운드와 함께 해를 마무리하기 좋을 만한 이야깃거리를 가다듬고 있으니 많이 기대해 주세요. (남아있는 97 이야기는 어라운드의 공식 홈페이지와 인스타그램에서 더욱 자세히 들려드릴게요.) 다음 뉴스레터에서는 어라운드 식구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한편, 98 소식도 더해 찾아옵니다. 그럼, 다다음주 목요일에 만나요!

오늘의집 𝗫 𝗔𝗥𝗢𝗨𝗡𝗗


오늘의집의 바이너리샵과 어라운드가 함께 제작한 Point of View 는 일상에서 저마다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번에는 빌라레코드(@villa_records_) 김성빈 대표의 이야기를 바이너리샵의 시선으로 들여다봅니다. 집에서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낼 있도록, 가구를 통해 솔루션을 제공하는 빌라레코드의 제품과 스토리를 만나보세요.

We Are Hiring !

· 브랜드기획팀 프로젝트 매니저(PM)


어라운드 프로젝트 매니저는 콘텐츠 기획·편집·제작까지 모든 과정을 이끌어나가는 프로젝트 오너이자 브랜드와 제작팀의 든든한 파트너입니다. 서류 접수는 11월 28일까지 받으니, 관심을 갖고 지켜본 분들은 마감 일자를 꼭 확인해주세요.

We Are Waiting !

· 브랜드 프로젝트 파트너(외주)


어라운드 브랜드기획팀과 함께할 외주 콘텐츠 제작 파트너를 찾습니다. 에디터, 포토그래퍼, 비디오그래퍼, 디자이너 등 독자적으로 활동 중인 프리랜서 분들의 프로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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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운드 뉴스레터에서는 책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펼쳐 보입니다.

또 다른 콘텐츠로 교감하며 이야기를 넓혀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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