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 월 〈나의 피투성이 연인〉 을 선보인 후로 시간이 흘렀잖아요. 지금은 어떤 작업을 하고 있어요?
요즘엔 작업은 내려두고 일상과 마음을 되돌아보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 영화를 개봉하기까지 4년이 걸렸거든요. 세상에 내보일 때는 당연히 기분 좋고 관객들을 만나니까 반가웠는데, 이후로 인간관계에서 부침이 있는 일들을 겪으면서 내가 어떤 상태인지 다시금 돌아봐야겠더라고요. 처음에는 나를 칼로 찌른 사람을 탓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 칼에 대고 원망한다고 없던 상처가 되는 게 아니었어요. 더 찔릴지도 모르죠. 상대방과 상처에 매달려 있기보다 다른 쪽으로 치유를 해야 했어요.
사람은 타인과 문제가 생겼을 때 되려 자신을 살필 기회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제가 유성호 법의학자를 좋아하는데, 유튜브 채널 ‘유성호의 데맨톡’에서 사람은 버킷리스트도 중요하지만 일생에서 하지 않을 걸 정하는 ‘더킷리스트’를 만들어야 한대요. 본인의 첫 번째 리스트는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과 일하지 않는 거라면서요. 어쩌면 창작자들의 취약점 같기도 한데, 가치를 만드는 작업이다 보니까 재거나 계산적인 게 어려워요. 일로 다가오는 사람을 한없이 믿을 때도 있어서 고민의 시작이 인간관계였다면 결국 나는 어떤 걸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까지 닿더라고요. 마음 정리는 현재진행형이에요.
살면서 꼭 필요한 시간일 거예요. 감독님의 작업 스타일이 궁금한데 시나리오는 어떻게 물꼬를 터요?
예를 들어 제가 A라는 주제를 영화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면 관련된 책이나 영화를 찾아보고, 생각을 노트나 아이패드에 써 내려가요. 그게 무르익으면 글로 옮기는데 마인드맵처럼 형식이나 구성에 대한 이미지를 그려보는 거죠. 거기까지 완성되었다면 시나리오는 술술 써져요. 왜냐하면 시나리오는 문학적인 작품성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오해가 없는 글이거든요. 이 글을 바탕으로 모든 스태프와 소통해야 하기 때문에 도면처럼 정확한 치수가 있어야 누가 보든 하나의 건물을 올릴 수 있어요. 글쓰기 양식이나 형식도 고유하기 때문에 단순히 글을 많이 썼다고 시나리오를 잘 쓰는 것도 아니에요.
오해가 없는 글이라는 말이 인상 깊네요. 어느 정도 쓰면 꼭 출력해서 본다고 들었어요.
오래된 습관이에요. 저는 시나리오가 시랑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설명이 되는 문장들이 이어지지만 시는 단어나 문장 사이의 간극이 리듬을 만들잖아요. 시나리오도 장소가 바뀔 때마다 ‘신Scene’이 넘어가는데, 그 리듬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출력해서 보는 게 좋더라고요. 내가 숨기려고 한 것, 보여주려고 한 것들이 만드는 리듬이 와닿아요.
〈나의 피투성이 연인〉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고 싶어요. 주목받는 신인 작가 재이와 학원 강사로 성실히 일하는 건우의 연인 관계가 서로 다른 삶의 우선순위로 뒤틀리는 내용이에요.
함께라는 가치에 대해 고민할 때 쓴 이야기예요. ‘우리 안에서 나를 지킬 수 있을까, 함께하는 와중에 내가 좀더 나답게 살아도 이 관계가 유지가 될까.’라는 일종의 두려움에서 시작됐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오랫동안 만나면서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 같이 살던 연인이 있었어요. 양가 부모님도 뵙고 가구나 가전도 다 마련해서 살았으니 결혼 생활이나 마찬가지였죠. 저는 방 한 칸을 작업실로 쓰고 남자친구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는데, 자연스레 제가 ‘집에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이 퇴근하면 함께 저녁 있는 삶을 보내고 같이 있고 싶으니까 나와 맞지 않는 라이프 스타일이라도 기꺼이 따랐어요. 작업을 하다가도 퇴근 시간에 맞춰서 급하게 청소나 빨래를 하고 저녁을 준비했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요. 좋아하기 때문에 참을 수 있던 게 점점 견디기 어려워지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되더라고요. 그런 삶을 비난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는 함께이기에 타협해야 할 부분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요. 영화를 쓰기 위해 준비하고 고민하다 보면 답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한 편의 영화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네요.
독립 영화의 특징 아닐까요? 자본에 대해 자유로우니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대부분 내가 겪었고 지나왔던 것들 또는 천착하는 화두에서 비롯되고요. 작업을 통해 떠오르는 질문을 해소하려고 하고, 매듭을 짓다 보면 변화된 나를 보기도 해서 이야기 속에 자신이 빠지려야 빠질 수가 없더라고요. 독립 영화만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