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 마지막으로 서이제 작가의 <두개골의 안과 밖> 얘기를 해볼까요.
욱: 저는 일단 형식이 되게 좋았어요. 덩어리로 나눠진 소설 보면 *기호를 많이 쓰잖아요, 그런데 무한대로 형상화되는 기호들도 그렇고 신경을 많이 썼단 느낌을 받았어요. 격을 깨는 방식으로서 작동하는 이야기들이 어쩌면 격이라는 것 자체를 신경 쓰지 않고 만들기도 하잖아요. 해체를 주제로 하거나, 일반적인 구성을 깨트리는 방식으로 되어 있는 창작물을 보며 저는 사실 크게 공감을 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저는 해체를 하려면 알아야 해체를 하지, 라는 말을 되게 많이 생각하고 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는 되게 공들여 만든 해체의 구조가 느껴져서 좋았어요. 잘 정리할 수 없으니 내던지는 방식으로 표출하는 작품들이 간혹 있잖아요.
하지만 이 작품은 읽으면 읽을수록 이 형식과 내용이 잘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리고 다양한 글자를 쓰고, 다양한 방식으로 글자와 문자를 넘나들고 있어서 보는 재미도, 읽는 재미도 좋았어요. 이질적인 존재가 눈에 띄면서도 잘 읽히고, 작가가 만들어 놓은 하나하나의 장치와 존재하지 않는 ‘새 인간’이라는 대상에 대해 바라봤을 때, 되게 현실적이고 참혹한 묘사들이 어우러지고… 다 엮어보듯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인 것 같아서 그 자체로도 되게 즐거웠다고 말하고 싶더라고요. 이 내용과 즐겁다라는 것을 쉽게 말할 수 없겠지만,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으며 보며 해석하는 재미로 이 소설을 감상했습니다, 일단 되게 큰 틀에서 이야기하지만 그렇습니다.
솔: 저는 우선 되게 고마웠어요. 비거니즘을 지향하면서 제가 느꼈던 미안함과 분노와 인간으로서 이래도 되나 싶은 한 번씩 느껴봤던 감정들이 여기에 서술이 되어있어서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여기 쓰여져 있는 느낌이 강했어요. 소재에서 떠오르는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 파격적인 형식을 공들여 썼다는 부분에서 고마움이 먼저 들었었던 것 같고, 이 무한대 기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무한대가 확장, 반복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저는 이걸 끊을 수 없는 연결이라고 생각했어요. 새나 동물이나 인간이나 이 연결고리 안에서 끊어질 수 있는 건 없다고 해석을 하면서 이 기호의 쓰임이 적절한 것 같다고 느꼈어요. 동시에 제목이 나중에 다 읽고나서 너무 잘 지은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게 두개골의 안과 밖이 처음에는 되게 추상적인 이미지라서 그 의미를 잘 몰랐는데, 결국 이 소설에서 하려는 말을 은근히 또 적나라하게 잘 보여주는 말이었다고 생각했어요.
훈: 저는 은솔이가 말한 이 무한대에 덧붙여서 얘기하자면, 이 소설은 단락 단락으로 나눠져 있잖아요. 그런데 이걸 어떤 순서대로 읽어도 이게 다 유기적으로 전달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거든요. 모양으로 따지자면 벌집이나 까치집처럼. 그게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우리는 문학에서도 인간중심적인데 이 소설은 그걸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고, 익숙한 형식을 박탈했죠.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려면 세심한 관찰과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러다보면 형식도 이렇게 되지 않을까? 굳이 기승전결이라는 구조 필요없이 틀을 깨고 소설을 쓰는. 그런 것들을 잘 보여주는 소설 같았고, 그래서 되게 카타르시스가 느껴졌어요 저는.
욱: 그래서 처음에는 한 사람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 깨지잖아요. 그래서 그 자체도 형식적으로도, 서사에서도 충분히 납득이 되고 합리적인 구조라고 생각을 했고요. 또 엄청 파편적으로 해체되어 있지만 그 자체가 되게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인상깊었던 장면이 278쪽에 병든 아픈, 자주 아픈 닭 닭 닭 닭…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어쩌면 이게 닭이 아니라 사람으로 충분히 치환되어서 읽히기도 하잖아요? 우리가 인간 중심적인 생각을 했을 때는 새, 닭 하나하나가 와닿지 않았을지라도 이게 사람, 사람, 사람 혹은 이름을 가진 어떤 무엇, 무엇, 무엇으로 분류가 된다면 그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잖아요. 실제로 그만큼의 이름을 가진 닭이 이름 없이 존재하고 있는데도요. 그 자체가 살처분이나 매장이나 공장식 축산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들어요.
림: 맞아요 생각하게 됐어요. 마지막에 또 돼지 얘기 나오잖아요. 비닐을 덮어 썩지 못한 그걸 다시 드러내는 그게 너무….
욱: 그래서 저는 작가노트를 보면서 신기했던 게 닭이 살처분 된 뉴스를 보았다,가 아니라 까치가 집을 짓고 있었다는 이 순간에서 출발했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그곳에서 출발해서 이런 소설을 쓸 수 있구나 하는. 어쩌면 작가의 윤리적인 감각이 이 소설을 쓰게 한 것 같기도 하고요. 슬픈 걸 봤으니까, 힘든 걸 봤으니까, 힘든 걸 써야지 하는 생각이 아니라 이 작가에게는 까치가 집을 짓는 이 순간이 어떤 닭이 파묻혀 죽는 순간을 생각하는 감각으로요.
훈: 동물을 불쌍한 존재로 여겨 쓰는 것이 아니라 동물이 하는 경이로운 것을 흡수하는 감각 같은. 물론 작가의 말처럼 인간 역시 하나의 동물이라는 사실에 입각하면서요.
솔: 적힌 글 중에 이런 게 있잖아요. 돼지, 돼지, 돼지는 계속 되지. 이런 게 되게 사이버틱한 어투 같기도 했거든요. 계속 입력어처럼.
욱: 어 맞아요, 사람의 육성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솔: 따닥따닥, 따다다닥. 이런 느낌이라서 그 효과가 엄청 컸던 것 같아요.
림: 그게 감정을 배제하고 뭔가 기록물을 읽는 느낌이 되게 컸어요.
솔: 타자기로 이렇게 치는 것 같은.
림: 그래서 저는 글의 시작 문구가 너무 완벽한.
욱: 새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림: 네, 새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뭔가 이렇게 살아온 인류의 미래의 기록물을 훔쳐보듯이 그런 느낌을 되게 많이 받았었어요. 그리고 저는 그 부분이 정말 좋았던 게 외국인 노동자들이 말하는 어투를 단어 별로 딱딱 끊어서 이야기하는데, 그게 처음에는 이게 누굴까 하고 읽다가 농장얘기가 나오면서 깨달음을 얻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표현을 할 생각을 했을까, 되게 놀랬어. 그래서 인간 중심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서도 나눠지는 인간의 계급과 그러면서 인간과 비인간을 모두 다룬다는.
욱: 그런 문제의식을 내던지지 않고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솔: 진짜 똑똑하다.
림: 너무 치밀하게 엮여있다. 서로서로? 그런데 이게 우리가 사는 지구의 외면할 수 없는 진실 같기도 하고, 이런 엮임이 결국 다 돌고 돌아서 반복되는 것 같아요. 음, 뭐라고 해야되죠? 인류의… 미래의 예언같으면서도 이미 지난 과거의 기록같은? 그런 느낌을 동시에 받았던 것 같아요. 2025년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되겠지, 이미 이렇게 되어있고, 라는 생각.
훈: 289쪽에 보면 '세상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쓰기'라고 나오죠. 근데 그 위에 보면 내가 겪지 못한 고통에 대해서는 쓸 수 없음. 차마 묘사할 수 없음. 함부로 재현할 수 없음. 아니, 재현될 수 없음.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음. 그렇게 때문에 쓰면 안된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야된다는 생각이 교차한다,고 했는데 이게 비거니즘에 대해 쓰고 싶은 사람으로서 너무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어요. 비거니즘이 도래한 세상이 되려면 인간들을 설득을 해야되는데 그러려면 인간의 언어로 설득을 해야되고 그러면서 비인간동물에게 당사자성을 대입해보게 되는거죠. 내가 비인간동물의 이야기를 써도 돼? 내가 뭔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럼에도 그런 세상을 만드려면 기꺼이 써야된다는 생각도 동시에 하고.
실제로 동물들을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이동시'라는 단체가 있어요. 거기서 느슨하게 연결된 작가들이 모여 각자 개, 돼지, 새, 뱀 등등 각각의 동물에 대해서 그 동물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시도들을 해요. 정혜윤 작가의 경우 박쥐의 입장에서 이렇게 말해요.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인간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나에게로 왔다. 그 뒤로 많은 것이 파괴되었다. 인간은 죽을 힘을 다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인 힘으로 산다.'
비인간동물의 삶에 대해 쓰는 것 자체에 실패는 따라올 수밖에 없고 어떤 딜레마를 느끼거든요. 이런 소설에 그런 딜레마가 너무 잘 나타나서 이 부분이 마음이 쓰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빗금을 찍찍 그은 문장을 쓰는 것도, 대욱형이 얘기했던 부분처럼 닭닭닭닭...하는 지점에 자연스레 사람을 대입해서 읽게 만드는 것도 언어로 해볼 수 있는 소설 안에서의 여러가지 장치들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잘 드러나서 좋았어요.
욱: 어떤 의미에서는 저평가를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런 형식이나 주제의식이 탁월하다고 먼저 이야기할 텐데 이 안에서 다루는 서사나 문장의 논리도 있잖아요. 시간의 흐름이나 전개 같은 것도 되게 치밀하게 잘 쓰여 있는데, 까치를 잡는 사람과 닭을 살처분하는 사람과 그 현장에 착출되듯이 내밀린 곳에 있는 사람,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 노동자라든가 하는 이야기도 충분히 있는데, 누군가에게는 형식이 특이하니마니 그렇게만 소비될 것 같아서 좀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훈: 이게 되게 충격적인 소설이다. 그러고만 끝날 것 같은 느낌인 거예요.
욱: 맞아요, 파격.
훈: 파격, 그러지 않았음 좋겠는데.
솔: 그리고 저는 초반에 이 형식을 견디거나 적응하는 기간을 못 견디면 뒤를 안 읽을 수 있겠다, 저도 한계를 느꼈어요. 처음에는 이게 뭐지 하고 읽다가 중간에 그만두고 다시 읽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깊이 들어가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하는 소설인 건 확실히 느껴졌던 것 같아요.
욱: 그런 의미에서 이런 소설을 읽을 때, 독자로서 해야하는 태도는 아까 은솔씨가 말한 것처럼 내가 단숨에 읽지 못하면 쉬었다가 다시 읽는 태도가 필요한 건데,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불친절하다거나 어렵다거나 이런 식으로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아까 영훈씨가 말한 것처럼 인간 중심의 종을 벗어난 글쓰기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지금 내가 생각하고 사회화한 언어가 아니면 어렵다고 쉽게 말하는 것 역시 배제의 방식이잖아요, 그런 지점에서 저는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이 소설에겐 좋은 핑계가 있잖아요. 형식이 어렵다거나 난해하다거나 하는 핑계가 있는데, 더 읽어보면 충분히 좋은 미덕이 많아요. 심지어 앞에 있는 다른 작품들은 훨씬 더 인간중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도요. 어떤 사람이 알라딘 댓글에 남긴 것처럼 ‘너무 페미니즘적이다’ 하는 거나 ‘너무 퀴어이야기 아닌가’ 하는 식으로 말하며 요즘 소설을 안 보는 사람도 있잖아요.
훈: 이 소설이 7편 중에 마지막에 있는 게 신기했던 게, 앞에서 이걸 읽으며 다양한 사유들을 하게 만들고, 마지막에 와서 다 해체 시켜버리는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욱: 맞아요, 중간이 아니라서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배치는 가나다순으로 보통 하지 않나요? 그쵸? 이게 대상작 빼고는 그러지 않나요?
림: 아, 작가 성으로 하면은?
욱: 이것도 책갈피 날개 보면 2021년은 그런 것 같고, 2020년은 아닌 것 같고, 이게 등단 횟수인가 어떤 규칙이 있었던 걸로 이해하는데요.
솔: 그럼 마지막에 들어간 우연이 참.
훈: 저는 이번에도 소설을 영상에 빗대어 보는데...
욱: 그런데 너무 좋은 소설을 보면 당연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훈: 이거는 어떤 영상이라기보다 어디 전시장 가서 전시 보는 느낌.
욱: 필름 같은 거 있잖아요. 처음도 끝도 모르고 틀어져있는? 그래서 내가 갔는데 뭐가 나오는 그런.
훈: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들어가서 보는 그런 전시 같았어요.
솔: 결국에는 이게 인간이 아닌 동물에 대해 쓰면서도 인간도 들어가 있잖아요.
림: 새인간.
솔: 그래서 뭔가 신기한 건 책 페이지를 접어놓았던 데를 보면 한쪽은 인간적인, 소외된 인간에 대해서 묘사한 부분이 좋아서 접어놓고, 다음 장에서는 소외된 동물에 대해서 적은 거를 접어놓고. 이래서 진짜 아까 말한 것처럼 형식 때문에 가려질 것 같은 좋은 내용들이 거의 모든 단락에 배치되어있었던 것 같아요.
욱: 단순히 동물권에 대한 소설 이렇게만 하기에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고요.
솔: 밤에 탈출하는 사람들 두 명이 나오잖아요. 손 꼭 붙잡고 그런 장면들에서도 되게 섬세하게 이런 사람들이 놓치 못하고 잡는 그런 관계에 대해서도 짤막하게 나오고.
욱: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잖아요. 중국에서 코로나 걸리면 다 격리하고, 중국이 아닌 우리 주변에도 있을 거고요.
훈: 소외된 인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동물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이런 게 결국 인간도 동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하기 위해 엄청 세심하게 짰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서 동물은 짐승같고 야만적인 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 아닌 동물과 인간의 구분을 해체하는 느낌으로요. 그래서 제목이 두개골의 안과 밖이구나 생각하기도 했어요. 두개골이라는 게 동물에게도 있고 인간에게도 있는데 그 안과 밖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인지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욱: 그리고 저는 안과 밖을 생각하게 되었을 때, 단순히 머리 안과 밖이 아니라 총알이 머리를 뚫고 나가는 느낌? 관통해서 나가는 그런 생각도 했어요.
림: 그만큼 날카롭고 강렬한 작가의 시선같기도 하고.
욱: 네. 그런 이미지들이 계속 나오잖아요.
림: 맞아요, 총알을 쏘기도 하고 실제로.
욱: 쏘고 잡고 하는 게 어느 순간에는 이제 흉조, 인간을 위협하는 새였다가 어느 순간 그게 인간이잖아요, 새인간도 이제 총을 쏘고 있는 그러면서.
림: 인간한테도 겨누고 있는.
욱: 그러다가 결국 이제 모두가 공유하고 두개골 안과 밖이 구분없이 터져나가는.
훈: 이거야말로 그거 아니에요? 총 대신 펜을 들었다.
림: 저는 이게 담담하고 서술적으로 쓰여졌는데, 공사현장에서 까치가 집을 짓는 걸 보는 장면이 있잖아요. 공사현장 사람들이 보는 그 장면이 약간 뭉클하더라고요. 이런 지점들이.
욱: 너무 아름답다고 느껴질 만큼의 바라보는 일이.
훈: 집이 무너져도 계속해서 쌓아올린다.
림: 계속 한다라고 이야기하고, 그 다 부서진 삭막한 곳에서 쌓아올리려는 건 결국 인간이나 새나 어떤 동물이든 그런 식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라는 게 보여져서 저는 그게 어쩌면 동물과 인간을 나누지 않고 같이 보는 시선같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동일시하는.
욱: 그 자체의 본능을 우리가 되게 인간 편의상으로 구분을 하잖아요. 법적인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인간의 집, 허가를 받지 못하는 다른 새의 집 같은 식으로. 그런 의미에서 사실 계속 내몰리고 있다는 생각도 할 수밖에 없잖아요. 지금 우리가 새인간이 아니라서 이렇게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 우리가 있는 공간에서 법적으로 허가 받지 못해서 살처분을 받는 것처럼 꼭 굳이 동물에게 이입하지 않아도 인간 입장에서만 봐도 충분히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지점이 많은 작품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동물권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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