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30ㅣ  구독  지난레터
아홉번째 매생이
글_파래

안녕하세요, 파래입니다.

이른 더위가 찾아온 듯 열기가 느껴지는 날들입니다.

작년보다 개화가 조금 늦어진 벚꽃은 우왕좌왕,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우르르 폈다가 금세 져 버렸습니다.

어디 벚꽃뿐인가요,

꽃샘추위에 트렌치코트를 꺼내 걸쳐보기 무섭게 따뜻해진 날씨 덕에

애매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미련 못 버린 겨울과 봄과 여름 사이에서 헤매던 4월은 정말이지 찰나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4월은 조금 힘겹고 어수선하고 들뜨게 만듭니다.

April is the cruelest month..

<출처: 황무지 / T. S. 엘리엇(황동규 한국어 번역)>

April is the cruelest month... 로 시작되는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입니다.

4월만 되면 어김없이 인용되는 문장입니다. 저도 어쩔 수 없이 이 문장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요, 올해는 총선과 맞물려 여기저기 인용되는 걸 보고 다시금 기가 막힌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대지 위에 라일락 꽃은 피고...


역대급 참패를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이고 당정(黨政)에서

책임질 사람들은 모두 신속히 정리합시다.


폐허의 대지 위에서 다시 시작합시다.

"


4·10 총선이 끝난 뒤 홍준표 대구시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 중 일부분입니다.

황무지의 첫 문장을 이렇게 활용하다니 (앵그리버드) 홍준표 시장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른 체하겠지만 어떤 이들은 뜨끔했을 테지요.


이처럼 시의 전체는 몰라도 첫 문장만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시가 아닐까 합니다. 영문학 전공 수업에 필수로 등장하는 시이기도 하고요. 저도 배웠던 기억이 있지만 도무지 뒷부분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위의 첫 7행만 각인돼 있는데요, 아마 시험에 나올만한 내용만 귀담아들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T. S. 엘리엇의 ‘황무지’는 1922년 발표된 시로 전편이 무려 434행으로 구성된 장편 시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정신적 황폐, 죽음과 삶의 의미, 가치관의 혼란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동시에 엘리엇 본인의 무의미한 삶에 대한 개인적 회의도 동시에 담겨 있는 작품입니다. 시는 영어 외에 독어, 불어, 라틴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산스크리트어 등의 언어가 사용되고, 여러 신화와 종교, 단테의 ‘신곡’, 셰익스피어, 호메로스 등 많은 작가의 작품들이 시 곳곳에 인용되고 있어 엘리엇이 직접 달아놓은 주석 없이는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한 시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계절, 봄이 시작되는 4월이 왜 잔인하다는 걸까요?

작가가 시를 썼던 시대적 상황, 정서와 무관하지 않은데요,

위에서 얘기했듯 작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화된 문명과 기존의 가치가 무너진 상황 속에서 삶의 방향과 의지를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을 ‘황무지’의 상태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 작가 본인이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에 쓴 작품이어서 본인의 모습을 더 많이 투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려는 대지 아래는 생명 탄생의 희망과 욕망이 들끓고 있습니다.

반면 아픔과 고통의 시간으로부터 버티고 인내한 지난 시간을 다시 반복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눈으로 모든 걸 덮고 잠들어 있는 겨울의 평화를 깨트리고 싶지 않은 욕망도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봄이 왔으니 다시 깨어나라고 온 대지를 뒤흔드니 소란스럽고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어있는 대지에 생명의 의지를 일깨우는 것 자체가 고통인 것이죠. 그래서 4월이 잔인하다고 말합니다.

흔히 우리는 봄을 떠올릴 때 생각하는 보편적 이미지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을 지나 대자연의 만물이 깨어나는 탄생의 계절이자 부활의 계절.

하지만 겨우내 얼어붙은 대지에 새싹을 틔우는 일은 요란하고 지난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고통의 시간을 겪고 깨어난 대지의 모든 생명은 눈부시고,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잔인하지만, 또 찬란한 것 아닐까요?


매년 4월만 되면 소환되는 이 강렬한 문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4월, 어떻게 보내셨나요? 라일락꽃은 피우셨나요?

잔인하거나 찬란하거나 어느 쪽이든 의미 있는 4월 보내셨길 바랍니다.

이 글이 나가는 시점은 4월의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젠 온 거리에 이팝나무와 조팝나무의 꽃이 하얀 눈처럼 내려앉았는데요, 초록과 흰색의 조화가 정말이지 싱그럽습니다. 봄의 끝이 보이고 여름이 가까워진 듯합니다.

5월은 더 평화롭길 바라며 ‘황무지’의 마지막 행을 남겨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Shantih shantih shantih

샨티 샨티 샨티

*샨티: 산스크리트어 '이해를 초월한 평화'의 뜻.

p.s 4월을 보내며..


4월은 또 한편으론 참담한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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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올해로 10년째입니다.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날 것의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전원 구조’라는 뉴스 속보에 다행이다,

하며 점심을 먹으러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땐 급변한 상황에 당황했고, 그 이후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모습을 망연히 지켜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이어진 네 탓 논쟁, 지리한 정치·이념싸움, 사실과 거짓, 위로와 공감,

풍자와 조롱의 경계가 사라지고 날 서린 말들만 오갔던 기억도 납니다.

사고가 발생한 지 10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해마다 4월이면 추모와 위로의 말들이 들려옵니다.

세월호뿐만이 아니겠지요, 크든 작든 저마다의 기억들이 있을 겁니다.

기억이란 게 참 무섭습니다. 희미하게 옅어지지만 아주 잊히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하되 애써 가라앉히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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