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성공 후 처음부터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하셨나요?
PD 채용 시 장르를 구분하는 방식은 계속 바뀌었어요. 제 경우에는 TV와 라디오를 구별해 뽑아 놓고 세부 장르는 입사 후 본인이 선택하게끔 했습니다. 그 당시는 시사교양 PD가 최고였어요. 데모하고 토론하는 것이 일상이고 당대 트렌드였다 보니 신입 TV PD 중 대부분은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어 했고 예능과 드라마는 늘 인력부족에 시달렸어요. 신입 때는 주로 그 빈자리를 메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1년차는 지역에서, 2년차는 드라마국에서 보내고 3년차에 시사교양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시사교양 쪽으로 옮겨오신 후에는 만족스러우셨나요?
처음엔 좋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머리가 복잡해지더군요. <TV내무반>, <6시 내고향>, <피플 세상속으로> 등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내용에 천착하지 못하고 형식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순간 조금 더 깊이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역사스페셜>로 보내달라고 했어요. 8-9년차 즈음인데 아직 경험도 일천하고 보여준 게 없던 때라 해당 부장님이 반대가 심했지만 모른척하고 떼를 썼습니다.
<역사스페셜>에 가면 또 다시 막내인데 굳이 가고자 하신 이유는요?
단순히 시키는 것만 열심히 하면서 8-9년을 보낸 후 '내가 뭘 위해서 달려가고 있는 거지?'라는 자문을 하게 됐어요. '전공'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모아둔 입사 준비 때 썼던 글들을 다시 꺼내 읽어봤어요. 그 중에 'KBS PD로 들어오면 뭘 하고 싶냐'는 예상 질문에 제가 "우리 역사를 재밌게 만들어 보고 싶다"고 답변을 달아 놓았더라고요. 그동안 직장인으로 허겁지겁 사느라 꿈을 잊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막연하던 미래를 과거에서 찾았다랄까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꿈을 꾸기 시작한 거죠.
그러고 보니 보통 몇 년씩 준비하는 방송사 시험을 1년 만에 합격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일단 운이 좋았죠. 나름의 노력이라고 한다면 한 20개의 예상 주제를 정해놓고 한 주제당 A4 10장씩 에세이를 써놨습니다. 그리고 거의 외웠죠. 그러다보면 주제가 달라져도 트랜스포머처럼 변신-합체가 가능해집니다. 그 과정이 논술과 면접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역사'를 다뤄보고 싶다는 대답을 준비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종이 열등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프랑스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깊은 역사와 예술, 성숙한 시민의식, 패션, 자유, 평등, 박애, 똘레랑스... 지금의 프랑스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지만...당시엔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너무 없어보였죠. 일종의 오기 같은 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 아이들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즐기며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프랑스 사람들처럼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엔 역사가 딱이죠.
<역사스페셜>에 가서 그 꿈을 펼칠 수 있으셨나요?
처음에는 어려웠죠. 이전 작업은 현장 순발력이 중요했는데, 역사는 장기간 축적된 전문지식이 필요했어요. 준비하는 과정도 완전 달랐죠. 시간도 오래 걸리고 읽어야하는 정보량이 너무 많았거든요. <역사스페셜> 한 편을 만드는데 논문 2-30개, 책 열권 정도는 읽어야 겨우 시작 해볼 수 있을 정도였어요. 역시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꿈을 펼치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정규프로를 하다 <의궤>와 같은 특집 다큐를 하신 계기가 있었나요?
의궤 반환 이슈가 있었을 때 이건 역사팀이 다뤄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어요. 그러나 역사프로그램을 만들어본 PD라면 누구나 알 수 있죠. 이게 만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잘 되기도 어려운 딱 그런 소재라는 것을. 결국 팀 내에서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고 막내였던 제게 떨어진 거죠. 큰일 났다 싶어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것은 일반적인 다큐로 찍어서는 안 되겠다. 마치 CG를 엄청나게 쓴 영화처럼, 사람들에게 볼거리로서 어필해야겠다. 단순히 의궤를 다루기보다 그 시대 속으로 들어가 버리자라고.’
당시 화제였던 <의궤>의 콘셉트는 처음단계부터 기획이 되었던 거군요!
모든 것이 처음부터 멋지지는 않아요. 알고 보면 대부분 좌충우돌하다가 생기는 것들이 많죠. 오랜 기간 실패와 좌절로 누적된 것들이 어느 순간 딱 맞아떨어지는 때가 있죠.
방송사도 회사인데, 프로그램 기획을 할때 어떠한 절차들이 있나요?
정규프로의 경우는 팀에서 아이템 회의를 거쳐 평가를 받고 채택이 되면 제작 리스트에 올라가 진행이 돼요. 특집의 경우에는 회사 차원에서 마련한 공모에 응해야 합니다. 이때 PD들이 기획안을 내는 데 공고가 뜨고 나서 준비하기는 어렵습니다.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기획안이라는 것이 단순 아이디어 단계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예산, 스케줄, 촬영 기법, 출연자, 제작인력 등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어야 해요. 소위 '숙성'된 기획안이 채택될 수 있죠. 심사위원단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로 꾸려져요. 그들이 내 스토리에 공감을 해줘야 채택이 될 수 있습니다.
PD를 꿈꾸는 친구들에게 선배로서 미리 준비해두기를 조언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미리부터 걱정하지 마세요. 미리 준비한다고 갖춰질 수 있는 것들도 아니고요. 회사에 들어와서는 본인의 단계에 맞는 문제들이 생길 겁니다. 그러니 첫 번째로는 방송사 시험을 잘 분석해 입사 준비를 잘하시고요. 두 번째로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나를 찾으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내가 몰두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남들과 확실한 비교우위를 갖는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 그게 패션이든 음식이든, 밴드가 될 수도 있고 특정 장소 그 어떤 것도 좋습니다.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아요.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도 그 분야를 놓지 않고 있어야 해요. 유행을 좇다보면 그런 것을 만들어 놓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은 너무 빠르고 또 뛰어난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이 유행한다고 해서 내가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세상의 관심은 금방 또 다른 분야로 옮겨갑니다. 엄청나게 뛰어난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를 오래해야 해요. 선택은 자유지만 저는 후자를 택한 편입니다.
마지막으로 뉴스레터 구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평가보다 이해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시험을 잘 분석하라고 말씀드렸는데, 여기서 분석이라는 건 평가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회사가 그동안 지원자들에게 어떤 문제를 내왔는지, 어떤 사람과 일하기를 원하는지, 이해해보라는 겁니다. 평가는 잠시 미뤄두고 이 회사가 뭘 원하는지 이해하고 공감해보려고 노력해보세요. 저는 '개별성'이라고 표현하는데요, 대부분의 방송사는 자기만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시험을 잘 보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길게 봐서는 자기만의 스토리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