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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야구 시즌입니다. 여러분은 야구 좋아하시나요? 내가 그깟 공놀이에 이렇게까지 일희일비하는 사람이었나, 스스로에게 흠칫 놀라게 만드는 마성의 스포츠, 야구. 오늘은 야구팀과 팬의 이야기로 시작을 하려 합니다. 작년 가을, 한화 이글스가 19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올랐습니다. 정규시즌 2위, 구단 역사상 단일시즌 최다승. 이 자체로도 대단한 성과였지만 야구팬들 사이에서 더 큰 화제가 된 건 경기력이 아니었습니다. 팬들이었습니다. 한화 이글스는 지난 10년간 KBO 리그에서 가장 낮은 승률을 기록한 팀입니다. 최하위를 가장 많이 기록한 팀이고, 2020년에는 18연패라는 리그 역대 최다 연패 타이 기록까지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팀의 팬들은 매 경기 8회가 되면 일어나 "나는 행복합니다"를 불렀습니다. 원정 구장 관중 동원력은 1위, 중계 시청률도 수년째 1위. 계속 지는 팀을 계속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은 "보살"이라 불렀습니다. 반은 존경이고, 반은 놀림이었죠. 그래서 작년 가을, 한화 이글스가 19년 만에 가을야구를 치르게 되었을 때, 조명은 뜻밖의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정규시즌 1위 팀보다, 2위 팀의 팬들에게 더 큰 박수가 쏟아진 겁니다. 타팀 팬들까지 "한화 팬들은 이걸 받을 자격이 있다"고 리스펙을 보냈고, 마치 자신이 한화 팬인양 함께 즐기고 기뻐했습니다. 실례로, 한화의 오랜 팬으로 알려진 배우 차태현, 조인성 씨는 방송에 나올 때마다 "축하 드린다"는 인사를 받았을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팀의 성적이 아니라, 팬으로서 버텨온 시간에 대한 축하와 격려를 받은 거죠. 아쉽게도 한국시리즈 경기 결과는 준우승을 차지하는 데에 그쳤지만, 명실상부 그 가을의 주인공은 한화 이글스와 보살 팬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브랜드의 팬덤에 대해 좋은 레슨을 주고 있습니다. 팬덤의 가치는 브랜드가 잘나갈 때가 아니라, 그렇지 않을 때 되려 증명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증명된 팬덤은, 브랜드가 다시 일어설 때 더욱 빛나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 궁금해졌습니다. 대체 팬심이라는 것은, 어떤 이유와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걸까, 그리고 한 브랜드를 오랫동안 아낌없이 지지하고 애정하는 그 마음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래서 오늘 13호 노트에서는 그 감정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가급적,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브랜드의 팬이 된 소비자의 시선에서 말입니다.
Chapter B
Belonging: 팬이 되는 순간은 브랜드가 만드는 게 아니다소비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네 가지 순간
마케팅 교과서에서는 팬덤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로열티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팬 이벤트를 기획하면 팬이 만들어진다고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순서가 좀 다릅니다. 팬심, 그리고 팬이 되는 순간은 브랜드의 회의실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비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거죠. 그리고 그 순간은 대부분, 브랜드가 의도하지 않았던 지점에서 빚어지게 됩니다. 하나씩 살펴볼까요? 기대를 넘어선 순간첫 번째. "팬이 되어버렸어"라고 말하게 되는 순간은 제품이나 브랜드가 "이 정도면 충분하지"라는 기대를 조용히 넘어서는 순간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에요. 애플 제품을 처음 꺼낼 때 상자가 열리는 각도, 스타벅스에서 내 이름이 불리는 경험, 호텔에서 지난번 투숙 때의 베개 취향을 기억해주는 것. 이 사소하고도 섬세한 감각을 한 번 느끼고 나면, 그때부터는 비교의 기준이 바뀌게 되고 맙니다. 이전에는 가격 대비 성능을 따졌다면, 이제는 "그때 그 느낌"을 기준으로 다른 브랜드를 평가하게 되는 거죠. 나를 알아봐 준 순간두 번째. 군중 속에서 한 사람으로 호명된 경험을 했을 때 팬심이 피어나기도 합니다. 수천 장의 응모작 중 내 사진이 "Shot on iPhone" 캠페인에 선택된 순간, 혹은, 브랜드의 공식 채널이 내 리뷰를 인용하고 샤라웃을 보내주는 순간을 상상해보세요. 기분이 좋은 것은 물론이요, 브랜드에 확 몰입하게 되고 맙니다. 고객에서 참여자로 위치가 바뀌게 되면서, 브랜드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되죠. "이 브랜드에 돈을 쓰는 사람"에서 "이 브랜드와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던 순간세 번째. 이 브랜드를 좋아하는 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순간에도 팬심이 생기게 됩니다.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가다가 도로에서 다른 라이더를 만나 손을 드는 순간이나, 룰루레몬 커뮤니티에서 같은 취향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순간. 반갑고 신기한 감정은 곧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구나"라는 안도감과 그리고 "우리"라는 감각, 즉 소속감으로 안착하게 됩니다. 소속감은 소비자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이지, 브랜드가 설계하거나 의도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팬덤의 가장 원초적인 연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치관이 겹친 순간네 번째. 브랜드의 어떤 행동이 내 믿음과 정확히 포개진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들을 경험하게 되면, 이 브랜드를 사는 행위는 더 이상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지지하는 행동이 되게 됩니다. 그리고 소비자는 "나는 이 브랜드의 고객"이 아니라 "나는 이 브랜드의 편"이라고 느끼기 시작하죠. 가장 강력하지만, 가장 위험한 팬덤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가치관이 겹쳤기 때문에 팬이 된 소비자는, 가치관이 어긋나는 순간 가장 먼저 떠나는 소비자이기도 하니까요. 이상으로 다뤄본 '팬심이 만들어지는 네 가지 순간'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전부 브랜드가 리드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스스로의 경험 속에서 어느 순간 문턱을 넘으며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팬은 모집하는 게 아니라 발생하는 겁니다. 브랜드가 할 수 있는 건, 그 문턱을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넘을 수 있도록 만들어놓는 일뿐입니다. 다음 챕터에서 사례를 통해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Chapter C
Cult Moments: 브랜드의 팬이 만들어진 네 개의 순간Case Study 01
Apple — 뇌가 먼저 반응한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스쿨의 신경과학자 마이클 플랫(Michael Platt) 교수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애플 제품 사용자와 삼성 갤럭시 사용자에게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를 촬영하면서 각 브랜드에 대한 긍정적·부정적·중립적 뉴스를 동시에 보여준 겁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애플 사용자들은 애플 관련 긍정적 뉴스에 뇌의 쾌락 중추가 활성화되었고, 부정적 뉴스에는 슬픔과 관련된 영역이 반응했습니다. 가족에 대한 칭찬이나 비난을 들었을 때와 거의 같은 패턴으로 말입니다. 반면 삼성 사용자들은 자기 브랜드인 삼성에 대해 같은 수준의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실험이 말해주는 건 단순합니다. 어떤 소비자에게 브랜드는 더 이상 "내가 사용하는 제품"이 아니라 "나의 일부"일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상태에 도달한 소비자는 브랜드에게 네거티브한 이슈가 생겼을 때 스스로 나서서 방어한다는 것 말입니다.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선택이 아니라 반사적으로요. 친구가 아이폰을 비난했을 때 괜히 언짢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품을 비난한 게 아니라, 나를 비난한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애플이 이 상태를 의도적으로 "설계"했을까요? 아마 부분적으로는 그렇겠지만, 전부는 아닐 겁니다. 애플이 한 건 제품의 품질, 디자인의 일관성, 경험의 세밀함을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것이고, 팬이 되는 결정은 소비자의 '뇌'가 한 겁니다. 문자 그대로요. Case Study 02
BTS — "내가 키운 브랜드"라는 감정
K-pop 팬덤은 전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고 조직화된 브랜드 팬덤의 원형입니다. 그중에서도 BTS와 아미(ARMY)의 관계는 독보적인 사례입니다. 아미가 다른 팬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팬들이 BTS를 "완성된 스타"로서 소비한 게 아니라 "성장 과정에 함께 참여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BTS는 2013년, SM·YG·JYP로 대표되는 '빅3'가 아닌 중소 레이블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에서 데뷔했습니다. 2007년에는 직원이 4명에 불과했고 파산 위기까지 겪었던 회사입니다. 초기에는 방송 출연 기회도, 음원 유통력도 부족했습니다. 이 빈자리를 채운 건 팬들이었습니다. 아미는 자발적으로 영상에 자막을 달아 해외에 퍼뜨렸고, 빌보드 어워드 투표를 조직해 2017년 Top Social Artist 부문에서 저스틴 비버의 6연승을 꺾었으며, SNS에서 콘텐츠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유통했습니다. BTS의 글로벌 성장 경로 위에는 기획사의 전략만큼이나 두터운 팬심과 팬들의 적극적인 지지 행동들이 깔려 있는 거죠. 심리적 소유감(Psychological Ownership).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그렇게 부릅니다. 내가 시간과 감정과 노력을 투자한 대상에 대해 "이건 내 것"이라는 감각이 생기는 현상입니다. 아미에게 BTS는 단순한 소비 대상이 아니라 "내가 함께 만든 존재"입니다. 그래서 팬은 보호하려 하고, 자랑하려 하고, 때로는 기획사보다 더 나은 결정을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건 K-pop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크라우드펀딩으로 탄생한 브랜드, 초기부터 SNS로 고객과 소통하며 제품을 개선해온 스타트업에서도 비슷한 감정선을 가진 소비자들을 제법 볼 수 있습니다. 소비자가 브랜드의 성장 과정에 개입할수록, 그 브랜드에 대한 감정은 소비가 아니라 소유에 가까워지고, 좋아하는 것을 넘어 책임감을 갖게까지 합니다. Case Study 03
Nike — 팬과 안티가 동시에 만들어진 날
2018년 9월, 나이키는 콜린 캐퍼닉(Colin Kaepernick)을 "Just Do It" 30주년 캠페인의 얼굴로 내세웠습니다. 캐퍼닉은 흑인에 대한 경찰 폭력과 인종 불평등에 항의하며 미국 국가 연주 중 무릎을 꿇었던 전 샌프란시스코 49ers 쿼터백입니다. 그 항의 이후 그는 2017년 3월부터 어떤 NFL 팀과도 계약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나이키가 캠페인의 얼굴로 내세우자, 소비자 베이스는 극명하게 둘로 갈라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키 운동화를 불에 태우는 영상을 SNS에 올렸고, 어떤 사람들은 그날 바로 나이키 매장으로 향했습니다. 이 사건이 팬덤에 대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강한 팬을 만드는 브랜드 행동은, 동시에 강한 안티를 만든다는 것. 모두에게 사랑받는 브랜드는 누구의 팬도 만들지 못합니다. 팬덤은 본질적으로 "편"의 감정이고, 편이 있으려면 반대편도 있어야 합니다. 캠페인 발표 직후 나이키의 주가는 3% 하락했습니다. 하지만 2주 만에 사상 최고치를 다시 기록했고, 온라인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1% 증가했습니다. 해당 분기 전체 매출도 10% 성장하며 애널리스트 기대치를 넘어섰습니다. 떠난 고객보다 똘똘 뭉쳐 남은 고객의 지갑이 더 두꺼웠다는 뜻이죠. 나이키는 그날, 고객의 일부를 잃는 대신 팬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아마 많은 브랜드가 하고 싶지만, 동시에 가장 두려워하는 선택일 겁니다. 팬을 만들려면 안티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Case Study 04
성심당 — 팬을 만들려 하지 않은 브랜드
성심당은 1956년 대전역 앞 찐빵 노점상에서 시작된 빵집입니다. 70년이 지난 지금, 이 빵집에는 하루 2~3만 명이 줄을 서고, 연간 천만 명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대전 중구는 줄서기 현황을 AI로 분석해 실시간 안내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2024년 매출 약 1,937억 원, 비프랜차이즈 빵집 전국 1위. 사람들은 이 빵집을 방문하는 행위에 "빵지순례"라는 이름까지 붙였습니다. 이런 성심당이 팬을 만들기 위해 한 일은 뭘까요. 사실 거의 없습니다. 서울에 진출하지도 않았고, 프랜차이즈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인플루언서 마케팅도, 팬클럽 운영도, 앰배서더 프로그램도 한 적이 없습니다. 이 브랜드가 한 것이라곤 단 두 가지뿐입니다. 빵을 잘 만드는 것, 그리고 그 빵을 만드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 것. 성심당의 팬이 된 사람들에게 물으면, 처음에는 빵 맛 때문에 찾아갔다고 말합니다. 튀김소보로를 한번 맛보면 다른 데에선 그 맛을 찾지 못해 결국 또 가게 된다고요.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방문으로 이어지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들이 동력이 되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데도 대전을 떠나지 않는 고집, 역량 있는 직원에게 독립 창업을 독려해서 결과적으로 대전 전체를 "빵의 도시"로 만든 구조, 가톨릭 정신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에 환원하는 경영 철학까지. 사람들은 어느 순간 빵이 아니라 이 브랜드의 '태도'에 대한 팬이 되어 있었던 거죠. 앞서 Chapter B에서 팬이 발생하는 네 가지 순간을 이야기했습니다. 성심당에는 그중 두 가지가 겹쳐 있습니다. 기대를 넘어선 순간 — 빵 하나의 품질이 "이 정도면 됐지" 선을 조용히 넘기는 것. 그리고 가치관이 겹친 순간 — 확장하지 않는 것, 떠나지 않는 것, 나누는 것이라는 이 브랜드의 선택이 소비자 자신의 믿음과 포개지는 것.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작동하자, 소비자는 고객에서 순례자가 된 겁니다. 성심당도 결국 같은 결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팬은 모집하는 게 아니라 발생하는 것이고, 브랜드가 할 수 있는 건 팬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매일 쌓아가는 것뿐이라는 것 말입니다. Chapter P
Protocol: 팬을 잃지 않는 브랜드의 원칙팬을 만들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잃기는 놀라울 만큼 쉽습니다. 팬의 이탈은 대부분, 브랜드가 팬을 "활용"하려는 순간에 발생합니다. 자신이 응원하고 있다고 느끼는 한 브랜드 옆에 함께하지만, 자신이 동원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떠나는 거죠.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경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슬아슬합니다. 그래서, 브랜드가 팬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봤습니다. ① 팬을 KPI로 환산하지 말 것 팬 수, 팬의 참여율, 팬이 만든 콘텐츠의 도달 수. 이 숫자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 숫자를 팬이 "보게" 되는 순간 관계가 변합니다. 팬은 자신이 응원의 대상이 되고 싶지, 실적의 근거가 되고 싶지는 않거든요. "우리의 열정적인 팬 커뮤니티 덕분에 매출이 30% 성장했습니다"라는 보도자료가 팬에게 어떻게 읽힐지 상상해보세요. "아, 나는 그저 숫자였구나, 매출을 위한 도구였구나." 씁쓸함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요. ② 팬에게 보답하되 거래하지 말 것 팬 감사 이벤트, 팬 전용 할인, 선공개 — 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너희가 이만큼 해줬으니 우리도 이만큼 해줄게"라는 메시지가 되는 순간, 관계는 응원에서 거래로 바뀝니다. 팬은 보상을 바라고 팬이 된 게 아닙니다. 보답은 감사의 형태여야지, 계약의 형태여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다시 한화 이글스를 떠올려봅니다. 작년 포스트시즌, 한화는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삼성에 3-7로 졌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자 구장 위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실수로 터진 게 아니냐며 웅성댔습니다. 하지만 그건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구단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승패와 상관없이, 선수단을 격려하고 팬들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아 불꽃 공연을 진행했다." 한국시리즈 홈 경기에서도 사전에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불꽃을 쏜다"고 공지했고, 3차전에서는 극적인 역전승과 함께 그 불꽃이 승리의 불꽃이 되었습니다. 져도 불꽃을 쏘는 팀이라는 스케일은 한화 팬들에게 또 하나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늘 함께 해줘서 고맙다"는 메시지는 이렇게 전달되는 겁니다. 매출 보고서가 아니라, 밤하늘 위에서요. ③ 팬의 비판을 안티의 비판과 같은 칸에 놓지 말 것 팬의 비판은 브랜드가 받을 수 있는 가장 값비싼 선물입니다. 팬은 브랜드가 더 나아지길 바라기 때문에 비판합니다. 그런데 많은 브랜드가 팬의 비판을 안티의 공격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합니다. 방어하거나, 무시하거나, 최악의 경우 팬을 적으로 돌립니다. 팬이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했을 때 브랜드가 "저희를 믿어주세요"라고 답하면, 팬은 믿음이 아니라 무시를 느끼게 됩니다. 진짜 위험한 건, 그다음입니다. 무시당한 팬은 안티가 되는 게 아니라 조용히 떠납니다. 비판조차 하지 않는 팬은, 이미 팬이 아닙니다. ④ 팬을 대표자로 만들지 말 것 열성적인 팬에게 "앰배서더"라는 타이틀을 주고 브랜드를 대변하게 하는 건 매력적인 전략입니다. 하지만 팬은 브랜드의 직원이 아닙니다. 팬에게 공식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순간, 팬은 자유로운 응원자에서 브랜드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이 롤을 즐거워하는 팬도 있지만, 많은 경우 팬은 그 무게에 지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던 걸 공식화하면 재미가 사라지는 법이니까요. ⑤ 모든 소비자를 팬으로 만들려 하지 말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일 수 있습니다. 팬은 전체 소비자의 소수입니다. 그리고 그래야 합니다. 모두가 팬인 브랜드는 없습니다. 모두를 팬으로 만들려는 브랜드는 결국 아무도 팬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나이키가 캐퍼닉 캠페인에서 보여줬듯이, 팬을 만드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팬덤을 만드는 일은, 전체 고객의 보편적 만족을 올리는 것과는 다른 게임입니다. 깊이의 게임이지, 넓이의 게임이 아닙니다. ⑥ "팬심에 기대는 브랜드"가 되지 말 것 마지막으로, 팬이 있다는 것에 안주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팬이 있으니까 괜찮아"라는 생각은 팬덤을 보험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고, 이건 팬을 가장 빠르게 잃는 방법입니다. 팬심은 브랜드가 계속 노력하고 있다는 감각을 먹고 커집니다. 브랜드가 멈추면 팬도 멈춥니다. 팬이 가장 오래 남는 브랜드는 팬이 아무리 많고 든든하게 지켜줘도 끊임없이 긴장을 놓지 않고 성장을 해내는 브랜드입니다. Epilogue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관계저는 가수 성시경의 오랜 팬이에요. 그의 목소리, 그의 음악이 좋아서 스며들었다가, 그의 또렷한 주관과 일관된 태도를 보며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성시경의 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저와 비슷한 이유로 팬이 되었더라고요. 혹자는 건방지다고 볼지 몰라도, 한결같이 대쪽 같은 태도,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는 않을 것 같은 프라이드를 지켜보는 건 팬으로서 기분 좋고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작년 11월, 힘든 일이 생겼습니다. 10년 넘게 함께한 매니저가 오랜 믿음을 져버렸거든요. 결혼식 비용을 전액 부담해줄 만큼 가족처럼 아꼈던 사람에게 당하는 배신이라, 지켜보는 팬으로서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이슈 이후 성시경은 SNS에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어요. 최근 몇 개월이 참으로 괴롭고 견디기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다고요. 그런 상황에서 그는 12월, KSPO DOME에서 4일간 연말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매년 해오던 팬들과의 약속이기는 했지만, 그해 그 결정에는 깊은 고심이 있었을 겁니다. 과연 이 상황에서 노래를 잘할 수 있을까, 괜히 실망을 주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망설임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결과는? 오픈과 동시에 4회 전석 매진!!! 아이돌도 아니고, 지금 막 전성기에 오른 스타도 아닌, 데뷔 25년 차 발라드 가수의 콘서트에 숨어있던 모든 팬들이 뛰쳐나왔습니다. 슬픔에 젖은 뮤지션을 환호로 감싸 안았고, 뮤지션은 최고의 무대로 보답한 겁니다. 팬이 된다는 건, 냉정하게 말하면 합리적 소비자로서는 지는 게임입니다. 더 좋은 대안이 있어도 떠나지 않고, 가격이 올라도 수용하고, 실수를 해도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사람들이니까요. 하지만 성시경의 2025년 겨울을 보면, 팬덤이라는 게 일방적인 감정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팬은 브랜드가 힘들 때 남아서 지탱해주고, 브랜드는 그 팬들 앞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으로 답합니다. 어쩌면 팬덤의 본질은,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데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오늘 13호에는 사심과 팬심을 가득 담아 풀어봤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팬을 넘어,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브랜드가 의도해서 만들 수는 없는, 다만 스스로 그렇게 되는 존재들이 브랜드에 무엇을 해주는지, 그리고 브랜드가 그들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다뤄볼테니, 기대해주세요! Positively Yours, 이나연 드림 References
Michael Platt, Wharton Neuroscience Initiative, UPenn — Apple/Samsung fMRI 브랜드 감정 반응 실험 Pierce, Kostova & Dirks (2003), "The State of Psychological Ownership," Academy of Management Review Nike "Dream Crazy" / "Just Do It" 30주년 캠페인 (2018.9) — CNBC, Fortune, CBS News 한화 이글스 2025 포스트시즌 불꽃 공연 — 충청투데이, 엑스포츠뉴스 성시경 2025 연말 콘서트 — 한국경제, 머니투데이, 중앙이코노미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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