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을 ( )한다
〈사랑의 고고학〉과 〈ㅅㄹ, ㅅㅇ, ㅅㄹ〉
다른 사람에 의한 상처가 급성이라면, 스스로 입히는 상처는 만성이라 했던가. 영실(옥자연)은 타인의 칼을 맨손으로 쥐는 사람이다. 잦은 상처가 이상할 것도 없다. 낫기 전에 생기는 상처들은 흉터로 남고, 긁히는 땅처럼 영실의 역사는 갖가지 층위로 남아있다. 그가 만성적으로 낸 흉터들은 곧 그의 역사인 셈이다. 흙바닥을 긁어내듯이 영화는 영실의 과거를 찬찬히 걷어낸다.
샹탈 애커만은 영화가 개인적일수록 관객의 무의식과 욕망을 파고들어 외려 보편성을 띠게 된다고 말했다. 두 영화는 바로 이 말처럼, 매우 개인적이기에 존재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소음의 기원을 과거서부터 찬찬히 돌이켜본다는 점에서 지금 소개하는 〈ㅅㄹ, ㅅㅇ, ㅅㄹ〉은 일종의 소음의 고고학이다.
아직 파내지 못한 유물이 여전히 거기에 존재하듯이, 묻혀 있지만 과거에는 분명히 존재했던 것들이 여전히 현재를 이룬다. 〈ㅅㄹ, ㅅㅇ, ㅅㄹ〉은 과거 감독 본인 주변에 가득했던 소리, 혹은 소음에 관한 내용이다. 소리는 몰라도 소음은 결코 사랑스럽지 않다. 그런가하면 〈사랑의 고고학〉은 사랑에 대한 내용이다. 모든 사랑이 행복하지는 않다. 하지만 짧지만 사랑이 시작되어 달뜬 공기와 설렘이 〈사랑의 고고학〉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 영화를 사랑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애증도 분명히 사랑이므로.
따라서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다. 소리는 어째서 소음이 되었을까. 또 사랑은 어째서 증오가 되었을까. 〈사랑의 고고학〉에서 희미했던 대답은 〈ㅅㄹ, ㅅㅇ, ㅅㄹ〉에서 뚜렷해진다. 소리가 괴로운 사람은 소리를 잘 감각하기 때문에 괴롭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영실은 사랑을 잘 감각하는 사람이다. 바로 그렇기에 나는 영실을 느리고 답답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포크레인을 두고 땅을 붓으로 긁어내는 방식은, 바로 그가 사랑을 감각하는 방식이다. 느리고 예민한 감각으로 마음껏 아파하는 것이 그의 고고학이다. 영실을 미워할 수 없고, 이 영화의 고고학이 모두의 고고학인 이유다.
〈사랑의 고고학〉에서 사랑이 증오가 되는 원인은 오로지 폭력이었듯, 〈ㅅㄹ, ㅅㅇ, ㅅㄹ〉에서도 소리가 소음이 되는 순간은 일종의 폭력이다. 홈비디오 속 아이는 소리에 둘러싸여 그 자신도 소리를 낼 것을 강요받는다. 〈ㅅㄹ, ㅅㅇ, ㅅㄹ〉는 소음을 미워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영화는 사실 모든 순간이 증오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의 말미, 감독은 마침내 직접 내레이션한다. 스스로 발화하게 되며 소음은 어느새 소리가 된다. 즉, 〈ㅅㄹ, ㅅㅇ, ㅅㄹ〉은 자신의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사랑의 고고학〉이 자신의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듯이 말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역사가 더해지면서 소음이 소리로 감각되는 경험은 경이롭다.
소음이 일상을 포용하는 것처럼 사랑도 똑같다. 그래서 둘은 미워할 수는 있지만 피할 수는 없다. 일상을 파고든다는 것, 그래서 나를 구성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소음이 지독하게 자신을 괴롭혔다는 감독의 말은 그래서 그가 소리를 매우 사랑했다는 일종의 고백처럼 들린다. 나는 사실 소리를 매우 사랑했었고, 그래서 때때로 그것을 소음으로 규정하였노라고. 그것을 계속해서 사랑하려면 어쩔 수 없었노라고. 나의 층위를 켜켜이 걷어내는 고고학을 통해 그것을 깨달았노라고 말이다. 영화는 바로 그 깨달음을 보여주는 과정이다. 그렇다. 영화는 그저 나와 당신의 고고학을 보여주는 과정일 뿐이다.
이 글의 제목을 괄호로 비워 놓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다. 당신이 직접 발화해 보기를 바란다. 당신이 원하는 소리를 찾기 위해, 당신만의 고고학을 펼쳐보기 바란다. 발화함으로써 소리는 스스로의 것이 되고 당신의 지층은 한 층 걷히거나 차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스스로의 고고학을 헤쳐 나가는 과정이다.
인디즈 안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