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를 사랑한 비운의 여자 2" 박명인
발행일자: 2022-08-26 
Vol. no 17 

화가를 사랑한 비운의 여자 2

-  램브란트와 사스키아 - 

 

by 박명인(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화를 그렸다. 여러 곳의 미술관에서 그가 그린 초상화, 자화상을 볼 수 있는데, 특히 1635년경에 그린 《탕자의 우화에 나오는 렘브란트와 사스키아》는 그의 일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가장 유니크(unique)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대부분의 화가는 자화상을 그리고 있지만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자화상을 그린 화가는 보기 힘들 것이다. 술이 담긴 긴 글라스를 오른손에 들고, 왼손은 아내의 허리를 안고, 기쁨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콧수염과 억지 웃음은 왠지 고상해 보이지도 않는다. 자화상이나 초상화라면 누구나 과장되거나 포장해서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심각함이나 고뇌를, 그리고 자신을 욕되게 그리지는 않을 것이다. 욕된 인간일지라도 자신을 속되게 그리는 것은 피할 것이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아름답게 그린다든지, 궁정화가들이 그리는 포장된 수법이 아니라 내면과 개성을 포착하는 특별한 점이 있다.

Rembrandt and Saskia in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1635
                                     드레스덴의 《렘브란트와 사스키아》

   초상화로서 과장된 표현도 없고, 포장된 이미지도 없다. 오히려 경계심이 없는 어수룩한 미소로부터 표정도 익살스럽게 보인다. 또한 사스키아는 머리장식·이어링·어깨장식과 보석을 몸에 장식한 의상은 외출복 같이 보인다. 렘브란트는 사브루(Saber, 남북전쟁 당시의 사관의 긴 칼)을 매단 군장이다. 역시 사스키아의 외출복, 렘브란트의 군장복장, 그리고 술잔을 들고 익살스럽게 웃는 모습은 전체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불합리한 형상이다. 이렇게 유리크한 렘브란트의 미소에서는 기쁨도 슬픔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방비했던 렘브란트와 사스키아의 끔찍한 비극의 예고를 느낀다.

   렘브란트 할멘스조 반 레인은 네덜란드의 라이덴(Leyden)에서 제분업자의 아버지와 유복한 빵집의 딸이었던 어머니와의 9남매 중 막내로 1606년 7월 15일 태어났다. 라이덴(Leyden)은 암스테르담에서 전철로 30분 거리의 대학가에서 관광용 수차(水車)가 지금도 거리의 중심부에서 돌고 있다. 이 거리의 기풍이었던지 양친의 원망(願望)이었던지 렘브란트는 라틴어학교에서 7년간 공부했다. 그 후 라이덴 대학에 적을 두었으나 그림의 재능을 인정받아 그림을 배우기 위해 대학을 그만두고 라이덴에서 단기간 공직에 봉사한 뒤 암스테르담이나 라이덴의 선배 화가에게 사사했다.
   성서(聖書)로부터 종교적인 제재(題材)와 인물화를 특기로 성공한 렘브란트는 1630년, 2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잇달아 초상화 주문이 쇄도해서 1630년대의 연간 수입은 12,000길다에서 15,000길다였다고 추측하는 자료도 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제자도 늘어났다. 따라서 사례로서의 수입도 늘어났다.
   화가로서 제자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명문학원을 경영한 것 외에도 안목 있는 화상이었던 헨드릭 아이렌브르프가 라이덴의 세평을 들고 접근해 왔다. 아이렌브르프의 사업에 렘브란트가 출자한 것은 25세 때였다. 그 후 암스테르담으로 거처를 옮기고 한 때 아이렌브르프가(家)에 의지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처럼 유복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서로 친목을 위해 렘브란트의 선생이었던 피델·라스트만이 살았고 쟁쟁한 화가·건축가들이 있었다. 렘브란트는 여기에서 아이렌브르프의 친척의 딸 사스키아 반 아이렌브르프를 알게 되었다.
   1612년 8월 2일 출생한 사스키아는 아버지가 레와르덴의 시장을 지냈고, 7명의 형제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6세 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10세에 아버지와 사별한 고독한 신상(身上)이었다. 그렇게 성장한 사스키아는 1633년 6월 5일, 렘브란트와 결혼했다. 26세와 20세 커플의 기쁨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사스키아의 소묘와 렘브란트가 써 놓은 육필 문자도 남아있다.
   언제나 종교상의 혹은 풍속을 주제로 맞춘 코스츔(Costume, 시대의상)을 휘감고 있는 사스키아지만, 이 소묘에서는 그녀의 행복한 미소가 그려지고 있다. 가사(家事)를 위해서 몇 명이 고용되어 있던 결혼생활은 젊은 어머니가 된 사스키아에게 이때부터 비애가 시작했다.
   결혼 이듬해인 1635년 12월 1일 장남 룬베르토스가 출생하였으나 3개월 만에 사망하였고, 1638년 7월, 장녀 코르네리아가 출생하였으나 2주 후에 사망했다. 그리고 1640년 7월 29일, 차녀 코르네리아가 출생하였으나 2주일 후에 사망. 출생과 사망이 반복되었고, 이해 9월, 렘브란트의 어머니도 타계했다. 1641년 7월에는 차남 티투스(Titus, 1641-1668)가 태어나 이 아들만이 성장했다. 그러나 사스키아는 4번의 출산에서 그 생명력을 잃고 행복한 남편으로서 무방비한 미소를 내보인 렘브란트에게 1642년 6월 10일, 30세를 목전에 두고 사스키아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렘브란트에게 일생일대의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렘브란트는 물욕과 수집욕이 심해서 작품의 제재로 사용한 귀금속, 신구(新舊)의 무기나 다른 화가의 소묘, 판화를 금액을 생각하지 않고 샀다고 전한다. 사스키아의 후견인들로부터 그 낭비를 비난받게 되자 렘브란트가 명예훼손 그들을 고소하는 사건도 있었다. 사스키아는 딜레마로 고생했다. 렘브란트는 법원으로부터 사스키아 지참금의 자유사용금지 명령을 내렸다.
   어머니의 사망 전 해인 1639년 5월, 32세의 렘브란트는 저택을 구입하고 전거(轉居)했다. 약간의 착수금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6년 연부로 지불 약속했다. 수집벽은 고쳐지지 않았고 한편 네덜란드 경제자체가 하강선을 더듬어 가면서 렘브란트의 수입도 최성기 같이 윤택하지만은 않았다. 새 주택의 구입은 렘브란트 부부의 8년이라는 짧은 생활의 하이라이트였다. 이국정서가 넘치는 수집품의 일부가 부부의 방을 장식했다. 그러나 일가에게 결핵사(結核死)의 혈통이 있어서(당시 치료방법이 없었던 결핵은 가족감염이 많았어도 유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병약했다고 상상되는 사스키아가 병의 기운으로 힘들었던 나날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스키아가 사망했을 때 아들 티투스는 생후 11개월이었다. 사스키아는 발병하여 숨을 거둘 때까지 렘브란트는 병들어 있는 아내의 애정이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못하는 젖먹이 아기를 앞에 두고도 방만한 생활을 일삼았던 무책임한 남편이며 아버지였다. 그림을 그리는 것, 아무도 할 수 없었던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처음으로 회화의 세계로 가져오는 천재 화가는 가정적으로는 부적격자였던 것이다.
   사스키아는 자신에게 만일의 일이 있었을 때, 유산을 자식과 남편이 사용할 수 있게 배려했지만 렘브란트는 계산력이 부족해서 수집벽에 사용되는 자금을 억제하지 못했다. 근면하게 작품을 만들어도 수지가 맞지 않는 형편에 그의 방만한 지출은 집의 대출금도 사스키아의 유산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사스키아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병상의 사스키아는 예기된 불행을 방지하기 위해 유언장을 섰다. 유서에는 티투스를 아들 유산 상속인으로 하고 렘브란트가 재혼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그 용익권(用益權)를 남편에게 주었다.  
램브란트 아들 티투스(Rembrandt’s Son Titus in a Monk’s Habit), 1660

렘브란트의 그림 세계


사스키아는 남편의 타고난 재질을 믿은 것일까? 마음의 내면을 그려 내는 렘브란트의 세계를 사스키아는 이해하고 사랑했을까? 렘브란트는 왜 ‘빛의 화가’라고 하는 것인가, 그러나 《야경(夜警)》(1642)을 비롯한 그 작품을 보고 사스키아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포함해 청년, 늙은 남자나 여자, 가슴을 정면으로 향한 구도로 그려져 있고, 거기에는 고민하거나 후회하거나 하는 인간이 있었다. 그것이 렘브란트의 세계였다. 관자(觀者)의 마음을 촉발하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의 안쪽에서 빛나는 것. 그 효과를 높이고 있는 어두운 배경에서 운명적인 비극이 숨 쉬고 있었다.


   사스키아의 사후 얼마 되지 않아, 30세 정도의 과부 헤르체·딜쿠스를 고용하고 애인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사스키아의 유산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1649年 헤르체로부터 혼약 불이행으로 고소되었다. 이해 10월 23일 재판에서 원고 헤르체는 피고 렘브란트가 결혼을 구두 약속하며 반지를 주고, 결혼 혹은 다른 방법으로 원조한다는 약속을 빙자하여 육체관계를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결혼 약속을 부정하고 육체관계를 인정하는 책무는 없다면서 원고 자신이 증거를 세워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정은 렘브란트에 대해 1년에 200길다를 헤르체의 생존 기간 동안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정을 증오한 것인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지불해야 하는 돈을 애석히 여긴 것인지 렘브란트는 헤르체의 이웃 사람들에게서 그녀가 음란한 매춘부라는 여론을 모으고 시당국에 호소했다. 그 결과 헤르체는 12년형을 받게 되었고, 친구들의 석방 운동으로 5년 후 석방되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간 헤르체는 머지않아 타계했다. 렘브란트의 무서운 책략으로 복수한 것이라고 알려졌다.
  헤르체의 고소는 그녀 쪽에서 가정부로 렘브란트에게 고용된 헨드리케 스토프엘스(하사관의 딸, 1625년 경 출생했기 때문에 화가보다 20세 연하)와 연인관계였기 때문이었다. 헨드리케는 사스키아와 마찬가지로 화가의 모델로 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렘브란트에 대한 공헌을 의미한다. 그녀의 운명도 좋지는 않았다. 렘브란트는 헤르체로부터 혼약 불이행 재판을 교묘하게 벗어났지만, 화가와 함께 헨드리케는 개혁파교회의 조사위원회에 소환되었다. 그녀는 첫째 아이를 유산하고 두 번째가 임신 7개월째 되고 있었다. ‘화가 렘브란트와 간음하고 있는 것을 고백하여 엄격하게 처벌되고 참회하기 위해 경고되어 성찬에 제외 되었다’고 한다.
   1654년 10월 3일 헨드리케는 딸 코르넬리아를 낳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은 하지 않았다. 재혼하면 사스키아의 유언이 실효되어 유산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지만 이미 헨드리케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기 때문에 사스키아와의 약속 불이행으로 경제력이 완전히 막혀 버리고 1656년, 50세가 된 렘브란트는 파산하게 되었다. 이때 헨드리케는 30살이었다. 미술 컬렉션·저택·가구·소묘를 포함한 작품들, 판화 등이 경매되었어도 그래도 여전히 빚이 남아 있었다.
   파산된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품을 환금하는 자유조차 잃었고, 사스키아와의 사이에서 난 19세의 아들 티투스 반 레인과 세 번째 여인 헨드리케스토페르스가 ‘화상’이 되어 렘브란트의 작품을 현금화하게 되었다. 헨드리케는 후견인으로 계약서에 서명했지만 매우 무식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에 의해 렘브란트는 부양받게 되었다. 1663년 7월, 헨드리케 사거. 1668년 2월, 티투스는 막달레나 반 로와 결혼. 1669년 3월, 티투스의 유아 티티아 출생. 렘브란트는 이해 유대인 구역 초라한 집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옷 몇 벌과 그림 도구만을 남기고 빈곤 속에서 63세로 사망했다. 이해 티투스의 젊은 미망인 막달레나도 딸 티티아를 남기고 타계. 헨드리케가 낳은 단지 코르넬리아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녀는 1673년에 남아를 출산, 렘브란트라고 명명했다. 10대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1680년 무렵, 네덜란드領 보르네오에서 사망했다. 26세 전후에 지나지 않았다.   

램브란트 자화상, 1659 
미술품 한 점으로 화가의 일생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화가가 귀족 여인을 아내로 삼아 살면서, 검소하지 못하고 탕아로 살면서 가족을 돌보지 않은 것은 스스로 비극을 자초한 것이었다. 렘브란트의 재물 탕진, 수집광, 여자 편력으로 인한 불행, 이 모두가 자신의 인생을 비극으로 끌고 간 원인이었다. 렘브란트와 인연이 된 사스키아, 헤르체, 10대의 어머니였던 헨드리케는 26세에 사망했다. 대부분 렘브란트로 인해 젊은 인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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