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절절 2021 / 05월호

유령
나는 꼬인, 부풀어오른, 맺힌, 망령, 폐허, 커다란 구의 끝, 편지의 스팸함, 여러개의 이름,

너가 나를 부르면 어떻게 될까?
내가 너를 부르면 어떻게 될까?

지금 시간은 5월 9일 00시 00분
어, 거기 오른쪽 어깨 위
너 누구야?

05월호 목차
1) 혼 에게로 부터 - 이안
2) 유령에게 - 구 
3) 고스트 - 이어
4) 울렁 울렁 울렁 - 귤
5) 주제 토크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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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절절 2021
05월호
01
혼 에게로 부터 

이안

오늘 하루를 무사히 마무리 하는 당신에게
어떤 말부터 해야할지 몰라 망설이는 마음을 담아
닿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된 채로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게 되는 그런 날에
당신이 걸어온 길에 있는 내가 힘이 될 수 있다면

하루하루 지쳐가는 당신을 보며
내일은 오늘과 다를 거라는 진부한 말 대신에
당신에게 바다를 보여줄 수 있다면

반복되는 낮과 밤 혼자라고 생각하는 당신이
집에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밝은 온기가 되어줄 수 있다면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에는
내가 당신의 손을 잡아줄 수 있다면

어쩐지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어
당신을 등진 것만 같은 세상을 원망하는 날에
내가 당신의 세상이 되어줄 수 있다면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눈물이 당신의 볼을 타고 흐르는 날에
그 품 속으로 파고들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당신과 내가 함께하지 못하는 그 날에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여
땅으로 간 당신과 하늘로 간 내가
이 세상에 길이 남을 수 있다면

02
유령에게



발목이 다쳤다. 

오늘따라 참 - 뭐가 잘- 풀려간다 했다. 
신호등에 서자마자 들어온 초록불이 수상했다.
환승 검색 하자마자 도착한 7612 버스가
또 내리자 마자 다시 들어온 초록불이. 

이상하게 잘 풀려가던 교통신호에 들떴는지 
울퉁불퉁한 연희동 골목 바닥 깊은 곳을 밟고 그대로.
복숭아뼈와 바닥의 만남. 

아작. 소리가 났다. 
귀를 의심한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귀를 의심했다. 
목 젖 끝에서 부터 나오는 비명. 
악!
정적. 
거리를 걷던 사람들의 시선. 
유유한 산책 한 가운데 던져진 민망함. 
머리가 시키지 않은 중얼거림.
아, 이게 왜. 여기 있어. 아.. 하하, 하..

난 괜찮아요. 
멀쩡하게 걸어요. 
아무렇지 않은 듯 일어서자 마자 
시큰한 복숭아뼈. 

온 다리에 오는 전율에 꼼짝도 못하다, 
부은 발목을 자르는 상상을 한다. 
유령처럼 둥둥 떠다닐 수 있다면.

발목 없는 당신이 부러워요. 
맥락 없이 불쑥 불쑥 자유로운 당신이. 

나는 오늘도 무수한 맥락 속에 굳어갑니다. 

03
  
고스트

 이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닐에 덮인 나무를 보았다.
4층 짜리 건물 앞 자투리 공간에
불투명한 비닐에
전보다 선명한 나무의 윤곽
 
 무언가에 덮인 것은 대게 흥미롭다.
방수 된 천에 덮여진 오토바이는
어떤 네발 동물의 형태와
먼 곳에서 바라보는 산의 모양과
뭔가로 만들어 지기 직전의 흙덩이 같다.
덮여진 채로 올라 타서는
시동을 걸어 길을 질주하고 싶다.
날 선 조명이 번쩍이는 지하차도를 지나
연희동 집 앞에 서면
배달이 온 줄 알고 누스는
왕왕왕
짖겠지
우리 집 창을 한번 보고
도로 나와서
빠르게 달린다 달리다보면
발이 바닥에 떨어지고
미친듯이 팔락이다가
천이 날아가버리면
허공에서 잠시 허우적 대다가
바닥으로 떨어질 거야

04
울렁 울렁 울렁


샹들리에에 매달려 그네를 탄다
삐죽삐죽한 몸이 날린다
거꾸로 매달려도 멀미는 나지 않는다
가야 할 데라곤 없다
 해야 할 일도 없다
정수리 몇 십 개가
모이고 흩어진다
모이고 흩어지고
모이고 흩어지고
그 위에 누우면
울렁 울렁 울렁
바다가 이랬던가
누군가 깔깔댄다
그리고 말한다
더는 안 믿어요
이젠 없다
저는 아직 믿어요
다시 있다
끔찍한 무한이
울렁 울렁 울렁

05
주제토크 <유령>

종이 : 주제는 어떠셨나요. 
이어 : 워낙 유령 같은 회색.. 빈 공간… 이런 개념을 좋아해서 유령 주제를 들었을 때 흥미롭다고 생각했어요. 
: 처음에는 예전에 봤던 영화가 계속 생각이 났어요. 어떤 사람이 죽어서 유령이 되어서 계속 그 집에 상주하는…<고스트 스토리> 여튼 그걸 생각하다 보니까 내 옆에 누군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 걔 한테 편지를 써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제 이어랑 공포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유령이나 귀신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안나와서 놀랐어요. 오히려 혼자있는 것에 대한 공포가 더 많이 나왔고. 이제 사람들은 유령이 더이상 무서운 거라고 인식하지 않나? 하는 질문. 유령마저 귀여워져 버린 것인가 하는 생각. 
이어 : 공포에 대해서 자아 성찰적인 부분을 더 많이 이야기 했던 것 같아요. 
종이 : 전에 사진 위에 전형적인 유령의 형태를 그려본 적 이 있는데, 진짜 물성이 있는 것 처럼 되어버려서 그걸 버렸습니다. 유령을 그리려고 하니까 유령이 안나왔어요. 그래서  아예 예전에 찍었던... 사진첩을 뒤져서 가장 유령같은 사진을 골랐습니다. 

이어 : 왜 주제를 유령으로 정했는지?
종이 : 뭔가 선이 강하고 뚜렷하고, 명확한 것 보다 모호하고 경계가 없는 것이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무엇을  만들 때도 여기저기 넘나드는 게 좋았는데,  우리(구구절절)가 지금 쓰고 있는 글도 결도 다 다르고 명확한게 하나도 없고… 아예 이런 주제로 글을 써보면 사람들이 어떤식으로 쓸까 궁금했습니다.
이어 : 공포에 대한 이야기 할 때 고인물에 대해 구가 이야기 했는데,  주관이 한 방향으로 뚜렷한 것에 대한 경계심도 느껴지고. 저도 그런 것에 대한 경계심이 있어서 생각이 났어요. 
종이 : 유령이 재밌는 이유 중에 베스트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데 존재한다는 것인 것 같아요.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라 유령이 먼저 의지를 가지고 찾아오는 것. 그런데 반대로 그걸 부르고 싶거나 원해서 찾으러 가는 것도 흥미로움. 무너진 곳, 폐가에 가던가 분신사바라던가. 
이어 : 유령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릴 때도, 천에 덮혀있는데, 천을 치우면 아무 것도 없을 것 같고. 천이 입혀져 있는 아무것도 없는 형태. 알 것 같은데 모르는 존재. 신호에는 잡히는 데 막상 없어. 이런 게 많잖아요.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존재. 
종이 : 반대로 일부러 실존하는 존재인데도 배제시키고 싶어서 유령이라고 하는 것도. 재밌어요. 

[유령에게- 구의 글을 읽은 후]

: 발목을 다쳤는데 뼈의 존재를 느꼈어요.  순간 발목을 잘라서 뼈를 확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유령은 발목이 없는 것…! 굉장히 편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유령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주위를 돌면서 놀래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 : 어떤 전개로 갈까 궁금해하면서 읽었는데 발이 꺾였을 때 강렬한 느낌이 오고, 마지막 ‘맥락’ 부분이 강하게 딱 와닿는 느낌이었어요. 처음에는 별 생각 없다가 마지막 문장에 마냥 재밌는 글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반에 운이 좋은 일이 생기는데… 왜 운이 좋은 부분을 넣었을까 생각해보니 발목 꺾이는 거랑 반전 되는 것. 이 사람이 원래 엄청 행복한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음.
발목이 없는 유령이 부럽다고 한 것이 그렇게 이어지고.  발목이 꺾였는데 발목이 없는 유령이 부럽다고 한 게... 살아가는 게 몸을 가지고 숨쉬고 하는 게 쉽지 않고,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인데 버겁게 사는 게  느껴지고.... 그것을 무겁지 않게 이야기로 쓴 것 같아요. 멜랑콜리한 우울함이 느껴졌어요.구가 유령에게 부러운 점을 말하는 게 재미있었는데, 그걸 넣어볼 수 있을지?  읽으면서 재밌었어요. 
종이 : 생각 나는 걸 말하자면. 뭔가 글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역시 발목이 부러졌는데 발목을 자르고 싶다고 생각해서 그런걸까요. 아작- 부분에서 진짜 소리를 내면서 읽었음. 너무 몰입해서. 유령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요, 글 자체가 처음에 뭐가 잘 풀려서 초록불이 수상했고, 다시 들어온 초록불이 어땠고, 일상의 언어가 아니라 이미 모호하고 유령같은 말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느낌이 되게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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