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이들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다시 만난다
<중경삼림>의 모든 주인공들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만우절의 이별 통보가 거짓말이길 바라며 “내 사랑의 유통기한을 만년으로 하고 싶다”는 경찰 223(금성무)은 허탈한 마음에 자정이 지나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를 막 뛰어오른다. 매일 고단한 하루를 살아가며 술에 의지하는 금발머리 마약 밀매상(임청하), 여자친구가 남긴 이별 편지를 외면하며 매일 똑같은 곳을 순찰하는 경찰 663(양조위), 경찰 663의 단골 식당에서 일하며 그의 맨션 열쇠를 손에 쥔 페이(왕정문) 모두 이 에스컬레이터에서 스치는 인연을 반복한다.
장장 800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장 에스컬레이터인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중경삼림>이 촬영되던 당시 막 운행을 시작했었다. 그 속도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마치 눈앞으로 영화 슬라이드쇼가 펼쳐지는 것 같은 근사한 기분이 든다.
그러고는 누구나 <중경삼림>에서 양조위의 집을 훔쳐보던 왕 정문처럼 고개를 숙이고 스쳐 지나는 창문과 그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나의 앞뒤로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내 곁을 바삐 지나치는 사람들,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 그렇게 뒤섞여 일렬로 한 방향만을 바라본다. 다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한참 세월이 흘러 <2046>에 출연한 양조위는 말했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스쳤다면 우리의 인연도 달라졌을까?”
<중경삼림>에 나온 양조위의 집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다 린드허스트 테라스Lyndhurst Terrace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카페 시암Cafe Siam의 뒤편 붉은색 간판 코크레인Cochranes 바의 2층이다. 건물 뒤로 돌아 들어가면 가경대하家卿大廈라고 쓰여 있는 정문이 나오는데 ‘대하大廈’는 우리식으로 말 하자면 연립주택, 맨션 같은 의미다. 매일 흠모하는 양조위 몰래 집에 숨어 들어가 청소를 하고 어항의 물을 갈아주던 왕정문이 여기로 들어가려다 그만 양조위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금성무, 임청하의 관계와 달리 왕정문은 양조위에게 첫눈에 반한 느낌이다. 특히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양조위가 왕정문이 일하는 가게로, 저 멀리서부터 천천히 걸어오는 첫 만남의 정면 숏 장면은 홍콩 멜로영화의 기념비적인 순간 중 하나다. 영화사상 가장 압도적인 정면 롱테이크 장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왕정문에게 다가와 모자를 벗고 머리를 쓸어 올린 다음 “샐러드 주세요”라고 말하는 순간까지, 가만히 다가오는 그의 그윽한 눈빛에 빠져 숨을 참고 볼 수 밖에 없다. 누군가를 쳐다보고 사랑에 빠지는 시간이 불과 0.2초라는 어딘가의 연구 결과가 틀린 얘기 만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그렇게 <중경삼림>을 보며 바로 그 순간 우리 모두 양조위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