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 #1
🍀 영.레터 #8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 🍀
오늘의 장면 : <중경삼림>에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바깥으로 보이던 양조위의 집을 훔쳐보는 왕정문
두근두근 새 책의 홍보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의 <중경삼림최애캐는 페이’(왕정문 扮)인데요, 크리피하지만 사랑스러운 페이의 매력에 빠진 게 이 에스컬레이터가 나오는 장면부터였어요그 뒤로는 사실 크리피함이 좀 더 커져서(?!) 놀라면서 봤던 것 같은데… 😇 그래도 다 보고 나니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어쩐지 이거네요.

누가 봐도 홍콩 영화를 사랑하는 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양조위가 이별 후 집 안의 사물들을 위로하는 장면을 보며 집이 곧 그의 마음이라고 느꼈습니다. 왕정문이 그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와 청소를 하는 것도 양조위 본인도 모르는 사이 왕정문이 마음에 들어와 전 애인의 흔적을 지워내는 거죠!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이 나지만, 저는 결국 왕정문이 양조위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을 거라고 상상합니다 😁

헤어진 이들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다시 만난다

  <중경삼림>의 모든 주인공들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만우절의 이별 통보가 거짓말이길 바라며 “내 사랑의 유통기한을 만년으로 하고 싶다”는 경찰 223(금성무)은 허탈한 마음에 자정이 지나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를 막 뛰어오른다. 매일 고단한 하루를 살아가며 술에 의지하는 금발머리 마약 밀매상(임청하), 여자친구가 남긴 이별 편지를 외면하며 매일 똑같은 곳을 순찰하는 경찰 663(양조위), 경찰 663의 단골 식당에서 일하며 그의 맨션 열쇠를 손에 쥔 페이(왕정문) 모두 이 에스컬레이터에서 스치는 인연을 반복한다.

  장장 800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장 에스컬레이터인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중경삼림>이 촬영되던 당시 막 운행을 시작했었다. 그 속도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마치 눈앞으로 영화 슬라이드쇼가 펼쳐지는 것 같은 근사한 기분이 든다.

  그러고는 누구나 <중경삼림>에서 양조위의 집을 훔쳐보던 왕 정문처럼 고개를 숙이고 스쳐 지나는 창문과 그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나의 앞뒤로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내 곁을 바삐 지나치는 사람들,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 그렇게 뒤섞여 일렬로 한 방향만을 바라본다. 다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한참 세월이 흘러 <2046>에 출연한 양조위는 말했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스쳤다면 우리의 인연도 달라졌을까?”

  <중경삼림>에 나온 양조위의 집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다 린드허스트 테라스Lyndhurst Terrace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카페 시암Cafe Siam의 뒤편 붉은색 간판 코크레인Cochranes 바의 2층이다. 건물 뒤로 돌아 들어가면 가경대하家卿大廈라고 쓰여 있는 정문이 나오는데 ‘대하大廈’는 우리식으로 말 하자면 연립주택, 맨션 같은 의미다. 매일 흠모하는 양조위 몰래 집에 숨어 들어가 청소를 하고 어항의 물을 갈아주던 왕정문이 여기로 들어가려다 그만 양조위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금성무, 임청하의 관계와 달리 왕정문은 양조위에게 첫눈에 반한 느낌이다. 특히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양조위가 왕정문이 일하는 가게로, 저 멀리서부터 천천히 걸어오는 첫 만남의 정면 숏 장면은 홍콩 멜로영화의 기념비적인 순간 중 하나다. 영화사상 가장 압도적인 정면 롱테이크 장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왕정문에게 다가와 모자를 벗고 머리를 쓸어 올린 다음 “샐러드 주세요”라고 말하는 순간까지, 가만히 다가오는 그의 그윽한 눈빛에 빠져 숨을 참고 볼 수 밖에 없다. 누군가를 쳐다보고 사랑에 빠지는 시간이 불과 0.2초라는 어딘가의 연구 결과가 틀린 얘기 만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그렇게 <중경삼림>을 보며 바로 그 순간 우리 모두 양조위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800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장 에스컬레이터.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인연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스치기도 한다.
<중경삼림>에서 양조위의 집이 있던 코크레인 바.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런데 이제 <중경삼림>에서 양조위의 집은 사라지고 없다. 2018년경 센트럴을 찾았을 때 1층에 코크레인 바가 있던 양조위의 집은 헐리고 재건축에 들어가고 있었다. 평소 센트럴을 찾으면 코크레인 바에서 맥주 한잔하는 것이 변함없는 일과 중 하나였기에, 건물이 헐리고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마주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왕정문이 아르바이트하던 패스트푸드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2001년 처음 홍콩을 찾았던 때부터 이미 다른 가게로 바뀌었기에 별 느낌이 없었건만, 여기만은 달랐다. 금방이라도 그 집에서 양조위가 나와 출근하고,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왕정문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내려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중경삼림>은 1995년 추석 즈음 첫 실연의 아픔을 겪은 뒤, 극장에서 넋을 잃고 내리 세 번을 연달아 본 적이 있다. 지금처럼 지정좌석제도 아니던 시절, 다음 회차 영화가 매진만 아니면 딱히 나가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24시 간 연속 상영관이었다면 아마도 밤새 이 영화를 봤을 것이다. 실연의 고통을 잊기 위해 금성무가 운동장을 열심히 뛰면서 “땀을 많이 흘려서 수분이 다 빠지면 더 이상 나올 눈물도 없겠지” 라는 대사에 엉엉 울고, 마찬가지로 실연의 고통을 잊기 위해 집 안의 금붕어는 물론 야윈 비누와도 대화를 나누던 양조위를 보면서도 얼마나 눈물을 훔쳤던가.

  스마트폰이란 게 없던 시절 ‘다시 전화를 해볼까 말까’ 밤새 동네 어귀를 맴돌며 공중전화와 씨름하며 보냈던 그 시간을 위로 해준 영화가 바로 <중경삼림>이었다. 묘하게도 그 위로의 대사는, 각각 다른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금성무와 왕정문이 만나던 순간 “그녀와 나의 거리는 단 0.01cm였고 6시간 후 그녀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라는 금성무의 내레이션이었다. 정지된 화면에 그 짧은 대사 하나로 완전히 다른 시간과 정서의 에피소드로 ‘바통터치’ 하는 영화의 구조를 보면서, 힘들지만 전혀 다른 내 삶의 에피소드로 점프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통스러운 지금의 시간도 한참 지나고 보면, 기나긴 삶에서 단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할 테니까.

하나의 공간 안에 이렇게 서로 다른 영화가 만나고,

별개로 흘러갔던 서로의 시간이 겹쳐져

이야기를 건네는 곳이 홍콩 말고 또 있을까.


아무리 변해간다 해도
영화가 있는 한 홍콩은 영원한 홍콩이다


〈방구석 1열〉, 〈무비건조〉의 영화평론가,

주성철 기자의 홍콩영화 성지 순례기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오늘부터는 새 책,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를 격일로 다섯 편 보내드립니다.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부터 구룡성채까지 종횡무진 누비던 영화, 장국영과 유덕화, 장만옥이 스크린을 누비는 그 영화, 우리가 사랑한 그 영화를 떠올릴 수 있는 내용들로 꼭꼭 채우고 있으니, 기대해주세요 🥰  

- 담당자 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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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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