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9번째 절기인 망종이 지났어. 그 다음 절기는 하지야. 바야흐로 맥주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어. 차갑게 먹는 스파클링 와인도 좋지. 진저에일 하이볼을 무한정 먹고 싶어지는 날씨이기도 해. 한낮 산책의 기회는 뜨거운 햇빛 때문에 점점 사라지지만, 그래도 아직 하루가 더 남은 듯 밝은 여름 밤의 여유는 기분이 좋아. 냉동실에 아이스크림을 채워둬야겠어. 나는 더운 여름을 제일 좋아해. 해가 길고 뭐든지 무성한 자연을 보면 생명력이 느껴지거든. 쉽게 무기력해지는 나도 여름엔 자꾸만 몸을 움직이고 싶어져. 햇빛 많이 쬐고 눅눅함 같은 건 눈에 띄지 못하게 다 말려버리자.

지난 주 칸 영화제 수상작이 발표되었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몬스터>도 경쟁부문 후보였는데, 장편 데뷔작 <환상의 빛> 이후 처음으로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쓰지 않은 작품이야. 눕방일기에서도 [오오마메다 토와코와 3명의 전남편]으로 소개한 적 있는 작가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으로 이번 칸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어. 이번 주는 사카모토 유지의 작품 중 국내에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꽤 팬덤이 두터운 현실 로맨스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를 추천해줄게. 제목에서도 예상할 수 있겠지만 시들고 마는 사랑에 관한 과거형의 이야기야. 웨이브, 티빙에서 볼 수 있어. 


대학생 키누(아리무라 카스미)와 무기(스다 마사키)는 막차를 놓친 후 첫 차를 기다리는 새벽에 우연히 시간을 함께 보내는데, 자신의 취향을 그대로 복제해 만들어놓은 이성인 것 처럼 너무 닮은 모습에 서로 금세 호감을 갖게 돼. 몇 차례의 데이트 후 사랑에 빠지고 함께 살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행복을 만끽하지. 좋아하는 책, 영화, 음악만 나누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와중 무기는 키누에게 내 인생의 목표는 너와의 현상유지라는 말을 하는데, 행복을 유지하는게 쉽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을거야. 그들에게 찾아오는 첫 위기는 바로 취업이야. 문화 예술에 관심이 더 많았던 키누와 무기는 처음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프리타 생활에 만족하지만, 여러 현실 속에서 안정적인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꿈과 관심과는 전혀 상관없는 직종에 어렵게 취직하게 돼. 물론 처음엔 사회인이 되어 1인분의 몫을 해낸다는 것에 들떠 있기도 한데, 모두의 첫 사회생활이 그랬듯 마음의 여유는 줄어들고, 즐겨보던 만화 신간이 나왔는지도 알 수 없고, 그토록 좋아했던 것들을 향한 열망은 온데간데 없어지지. 지하철까지 도보 30분이 걸리는 대신 넓고 바깥 풍경이 아름다운 집에 살던 두 사람은 퇴근 후 그 길을 함께 걷는 것이 힘든 게 아니라 하루의 행복이었는데, 그 루틴마저 사라져버려.

좋아하는 것과 해야하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키누와 무기는 사뭇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되어있어. 특히 여전히 자신의 취향을 포기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으로 일을 하고 싶어하는 키누를 무기는 현실감각 없이 철 없는 사람처럼 취급해. 키누는 더이상 자신을 응원하지도, 따뜻하게 바라봐주지도 않는 무기가 느닷없이 말하는 결혼이 점점 더 멀게만 느껴져. 사실 나는 현실 로맨스라고는 해도 일방적으로 무기라는 캐릭터가 비뚤어졌다고 느끼긴 했어. 혼자 힘든 일 다 하고 있다고 느끼는 전형적인 대리병 말기인데, 본인이 포기한 것들을 직시하기엔 자신의 삶이 너무 비참하니 상대방을 까내리면서 본인의 자존감을 지키는 그런 캐릭터랄까..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 역시 무기와 비슷한 나이에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살 수 있을까, 꿈은 어디까지 포기할 수 없고, 어디서부터 현실과 타협해야하는 걸까, 로맨스 영화의 탈을 쓰고 이런 구체적인 청춘의 고민들을 차근차근 따라가는 이 영화의 끝엔 5년 후의 무미건조한 연인의 얼굴이 남아있어. 하지만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닐거야. 살다보면 영원히 좋아할 것 같았던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게 생기기도 하니까. 어느 누구도 먹고 사는 책임을 지는 사람에게 꿈을 포기했다고 욕할 수는 없어. 사실 이러한 과정은 굉장히 보편적인 이야기라 오히려 영화가 평이하다고 느껴졌는데 마지막 장면이 의외로 마음에 오래 남더라고.


시들기 전 예쁜 꽃다발이었던 순간은 누구에게나 분명히 존재하고 그 순간이 있었던 것 자체가 기적인거야. 그리고 인생은 계속 이어진다는 게 중요한거지. 키누와 무기가 헤어졌다고 해서 그들 인생의 사랑이 끝인 건 아니야. 두 사람은 앞으로도 각각 또 다른 기적들을 만나고 여러 꽃다발같은 사랑을 하게 될거야. 그러니 과거를 부정할 필요는 없어. 그때 고마웠고, 잘 지내라고 그렇게 서로를 흘려보낼 수 있게 된 두 사람의 미래를 기대하게 되는 결말의 힘이 좋았어. 그리고 이 메세지를 단 한 장면으로 연출한 것에 감탄을 하고 말았어. 마지막 장면을 위해서 이 영화를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소한 관람포인트1. 도이 노부히로 감독

각본 이야기만 했지만 <지금, 만나러 갑니다>로 국내에서도 일본영화 붐을 일으켰던 도이 노부히로 감독 작품으로, [뷰티풀 라이프][굿 럭][중쇄를 찍자!][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등 메가히트 드라마를 연출해왔어. 사카모토 유지 작가와는 드라마 [콰르텟]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어.

소소한 관람포인트2. 아사노 페코
영화에서 무기가 그리는 일러스트는 아사노 페코라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이야. 크레딧에 올라오는 그림이 너무 귀여워서 끝까지 봤어. 각본을 소설화한 책에 일러스트가 삽입되어 있어. 나처럼 소장하고 싶었던 사람은 이 책을 사면 될 것 같아.

소소한 관람포인트3. 연관영화 <소라닌>

나의 20대를 관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영화 <소라닌>이 떠올랐어. 동명 만화가 원작이고, 아시안 쿵푸 제너레이션이 주제곡을 만들었어. 이 영화도 꿈과 현실 사이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하는 청춘들의 분투를 그린 이야기야. 만화에서 기대했던 음악이 그대로 영화로 구현되서 감동이 배가 되는 것 같아. 
레이지 카우 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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