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설거지와 분리수거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새벽 세시. 성대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치르느라 녹초가 된 아내는 이미 숙면 상태였고, 이현이 역시 싱크대의 요란한 물소리에도 깨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눕자마자 잠이 들었을텐데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핸드폰을 열었다. 혹여 아내가 깰까 불안해 화면밝기를 최소로 낮추고 검색을 시작했다. 

“AAA 충전지"

“에네루프 프로"

“이케아 건전지"

다름 아닌 이현이에게 선물한 기차 장난감에 쓸 건전지 쇼핑이었다. 집에 건전지가 없었던 것도, 건전지 때문에 기차놀이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태어난지 3년 만에 처음으로 본인이 입으로 말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는 하루종일 “칙칙폭폭"을 외치며 흐뭇해 했고 아내 역시 생각보다 퀄리티가 좋다며 만족스러워 했다. 

유일한 문제는 구매한 사람의 자격지심이었다. 아이가 칙칙폭폭이 갖고 싶다고 했을 때 가장 유명했던 제품을 비싸다는 이유로 못 산게 아쉬운 상황이었는데, 건전지마저 급한대로 방구석에 묵혀두었던 누런색 보급형 브랜드로 끼워 넣은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장난감 기차가 언덕 레일을 힘겹게 올라가는 걸 볼 때마다 괜히 건전지 때문인 것만 같았고, 새 것을 사줬는 데 새 것만은 아닌 것 같은 불편함이 이따금씩 올라왔다. 건전지는 죄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부속품 하나 쯤은 가장 좋은 브랜드로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만원이 넘어가는 건전지들을 장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육아를 하다보면 생각보다 건전지를 교체할 일이 많다. 소리와 빛으로 아이를 현혹시키는 국민템 장난감들을 보면 하나같이 건전지로 돌아가는 전자제품이고, 책 역시 사운드북이 많아 종종 작은 십자드라이버를 들고 책 뒷면 나사를 돌려야 한다. 리모콘에 사용되는 AA, AAA 사이즈면 그나마 빠르게 교체가 가능하지만 LR로 시작하는 코인형 건전지를 쓰는 경우에는 구매부터 교체까지 일주일 이상 걸릴 때도 있다.    

건전지가 없으면 고물이 되어버리는 장난감들을 보면서 육아 초기엔 건전지가 참으로 성가시고 별로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어디서나 쉽게 살 수 있지만 이 조그만 부속품 하나를 교체하기 위해 최소로 사야만 하는 구매량과 이를 감싸고 있는 플라스틱 포장지, 폐품이 되었을 때 까다로운 뒷처리, 작은 나사로 꽁꽁 묶인 케이스를 열기 위해 필요한 공구 등 모든 것이 불필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이 장난감에 배터리 문제가 생길 때면, 다른 일을 제쳐두고 어떤 브랜드의 건전지를 살지부터 고민하고 심지어 이 과정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쉽고 빠른 성취, 단순한 행복, 확실한 문제 해결 등 건전지 교체가 주는 효능감이 점점 크게 느껴져서일까. 내 일상과 비교해보면 이보다 큰 엔터테인먼트가 없다

아이 양육과 교육, 부부관계, 건강관리, 워라밸, 주식과 부동산 등의 자산관리 등 무엇 하나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고 새해를 맞이해 버렸다. 아이를 재우다 먼저 잠이 들고, 새벽에 깨서 세탁기 안에 굳어버린 빨래를 널고, 아침이 되어 그나마 마른 옷으로 아이를 입히고, 등원과 출퇴근을 반복했을 뿐인데 앞자리 연도가 바뀌었다. (‘만 나이 통일법’* 덕에 6월부터는 나이가 안바뀐 건 그나마 다행이다)

* 만 나이 통일 법 : 2023년 6월 28일부터 시행 예정

현실은 바꿀 수 없는 배터리의 연속적인 방전이다. 주말엔 육아로, 평일엔 회사일로. 배터리 성능은 점차 저하되는데 해야 할 일은 줄지 않는다. 맘 같아선 몸도 마음도 건전지 갈아 끼우듯이 새걸로 바꾸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아내와의 갈등이 있는 날엔 더욱 그렇다. 마음의 배터리가 방전되기 일쑤고 그나마 배터리가 남았을 땐 더 많은 해명과 변명을 하느라 애를 쓴다.

이러한 현실 때문인지 다 쓴 건전지를 새걸로 갈아 끼울 때면 이상한 쾌감을 느낀다. 반대로 새 건전지가 없어서 다른 곳에서 이미 사용 중인 건전지를 더 급한 곳에 끼워넣어야 할 때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져 온다. 하나는 초현실이고 하나는 극사실 같아서일까. 분리수거를 할 때 수거함에 담긴 일회용 폐건전지들의 모습을 보다보면 가끔은 슬프기까지 하다.  

새해 결심만큼 쓸모없는 일도 없겠지만 만약 하루 이틀정도만이라도 쓸모가 있다면 2023년에는 조금이라도 더 보람있게 방전되는 날을 늘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안전한 영역에서만 노는 것이 아닌 아이랑 같이 새로운 경험에 과감히 뛰어들고, 때론 오직 즐거움에 나를 바치고, 아내와 소모적인 싸움을 이어나가는 것이 아닌 빠른 항복(과 애정공세)를 하는 것이 내가 가진 유한한 에너지를 후회없이 사용하는 길일 것이다. 그리고 꿈까지 꿔본다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몸과 마음의 배터리 용량을 늘리고 싶다.   

그 날 새벽에 고른 새 건전지는 다음 날 집에 왔다. 퇴근하자마자 장난감 기관차에 들은 누런색 건전지를 새하얀 고성능 충전지로 갈아 끼웠다. 기차는 여전히 언덕배기에서 힘겨워했다. 하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애초에 해결해야될 문제는 기차의 건전지가 아니라 내 마음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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