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이번 레터는 아들 셋 아빠 정우님이 보냅니다. 셋째가 태어나고 육아휴직 두 달을 쓴 게 전부인 정우님이 다시 한 번 더 육아휴직을 하기로 했답니다. 이번에는 휴직 기간이 꽤 길어질 것 같다는데 잘할 수 있을까요?

랩탑을 열고 미팅 링크에 접속했다. 매니저가 보인다. 온라인으로 매주 보는 얼굴이지만 오늘따라 표정이 진지하다. 매니저는 나의 커리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잔다. 얼마 전 진급의 문턱에서 미끄러졌었다. 조직 내 한 직급 높은 포지션에 지원했다가 최종 단계에서 탈락했다. 매니저는 정작 본인인 나보다 더 내 커리어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진급을 내심 기대한 건 사실이다. 막연히 때가 되기도 했고 근래 성과도 나쁘지 않았다. 그저 기대만 한 건 아니었다. 진급을 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더 큰 역할과 책임을 요구받게 될 테니까. 걱정이 되었다. 워라밸까지는 갈 것도 없이 당장 오늘 하루의 균형조차 맞추기 버거운 나에게 진급은 균열을 의미했다. 간신히 균형을 맞춰놓은 저울의 워크 접시에 물방울 하나만 더 해도 라이프 접시는 급격히 기울어지거나 요동칠 것이다. 저울 위에서 제로섬 게임은 성립하지 않는다. 한쪽 접시에 무게를 더하면 반드시 다른 한쪽 접시에도 무게를 더해야만 균형이 유지된다. 

그래서 나에게 진급은 돼도 좋고 안돼도 그만인, 막연히 좋기만 한 것도 막연히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저 때 드링킹한 김칫국이 참 차갑디다). 매니저는 나에게 프로젝트 하나를 맡아서 진행하기를 제안했다. 맡은 업무뿐만 아니라 프로젝트를 주도해서 더 큰 성과를 내면 진급에 유리할 것이라고 했다. 수긍이 가면서도 순간 아찔했다. 진급을 하게 되면 업무가 많아질 텐데 그 많은 업무를 하기도 전에 더 많은 업무를 해야 하다니. 

대답을 기다리는 매니저에게 정중하게 입을 뗐다.

나 : “아무래도 육아휴직을 해야 할 것 같아”

매니저 : “그래?”

나 : “응” 

매니저 : “얼마 정도?”

나 : (손가락 세 개를 모니터 앞에 든다)

매니저 : “3개월?”

나 : “아니 3년, 정확히는 34개월”

첫 육아휴직은 겨우 2개월이었다. 휴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조리원에서, 셋째는 인큐베이터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첫째와 둘째를 돌보면서 틈 나는 대로 조리원과 신생아실을 왕복했다. 다행히 아내와 셋째는 어느 정도 회복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로 돌아갔다. 매번 출렁였던 저울은 이내 균형을 맞추고 얼마간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균형이란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 가족 구성원 모두의 노력과 타협이 크든 작든 필요하다. 아무리 안정적으로 보여도 크고 작은 노력과 타협으로 인한 내부적인 균열이 발생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 가족에게는 올 초부터 이러한 균열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첫째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어느 정도 학교에 적응했지만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둘째는 모든 것이 새로운 시작이었다. 다 같은 어린이집을 다니던 셋째는 형들이 초등학교에 올라가면서 혼자가 되었다. 아내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갔다. 이런 상황에서 점점 나 또한 업무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워졌다.

매니저는 잠시 놀란듯했지만 침착했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매니저가 한 첫 마디는 “가족이 우선”이라는 것이었다. 육아휴직급여 대신 실업급여를 받게 될 수도 있겠다고 걱정하던 마음이 금세 안정되었다. 매니저는 인사팀과 육아휴직 절차를 협의하고 나중에 본인에게 이야기해달라며 미팅을 마무리했다.

저울은 앞으로도 계속 요동칠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내가 신경써야 할 저울의 접시가 두 개만 있는 것도 아니다. 긴 휴직 기간 동안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을 것이고 다시 회사로 돌아올 때 적응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복직 이후의 커리어도. 아마 그때는 어떤 프로젝트를 주도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워크 접시를 잠시 내려놓고 라이프 접시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무게를 올려놓을 생각이다.

덧, 이런 나를 거두고 있는 회사와 매니저에게 심심한 위로와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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