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V. IMPACT LETTER

요새 날씨가 한 발자욱 더 봄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창밖에서 초등학생 아이들이 신나게 게임을 하며 놀고 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제법 따뜻해진 덕에 아이들도 밖에서 더 놀고 싶나 봅니다. 놀이는 아이가 자발적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 것입니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에서도 놀이란 아이가 스스로 시작하고 통제하며 구조화하는 행동이라 지칭하였습니다. 정신없이 달리거나, 흙을 파보기도 하고, 돌멩이를 쌓아보기도 하고, 놀이는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때로 길가의 자그마한 돌과 풀도 자신의 놀이 대상으로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모처럼 따스해진 날씨를 맞아 작년 봄에 출간했던 MSV 3호 <놀이>에 실린 글 일부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김영준, MSV 객원 에디터

놀이의 위기

놀고 자빠지는 일

‘놀자!’ 이 한마디에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가방은 냅다 던져 놓고 놀이터로 전력 질주하는 아이들이나 볼풀장에 뛰어들며 깔깔 웃는 아이들의 모습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분명 놀이에는 우리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놀이가 어른의 입말에 오르내리면 그 의미가 사뭇 달라진다. 어른이라면 ‘잘들 논다’, ‘놀고 있네’를 ‘자알 논다’, ‘노올고 있네’와 같은 뉘앙스로 아주 자연스럽게 읽어 낼 수 있다. 그래도 ‘놀고 있네’는 양반이다. ‘놀고 자빠졌네’처럼 정도가 심한 말도 많다. 이처럼 어른들은 놀이를 핀잔과 비아냥의 언어로 폄하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하는 몸 놀이는 죄다 놀다 자빠지는 일이다. 아이와 침대에서 뒹굴어 봤거나 트램펄린 위에서 땀을 뻘뻘 흘려 본 사람은 놀고 자빠지는 일이 얼마나 유쾌한 일인지 잘 안다. 놀이라는 단어만큼 아이의 입장과 어른의 입장에서 상반된 대우를 받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아이에게 놀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언어적으로는 놀이를 하찮게 대하는 어른의 불편한 모순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 MISSIONIT
놀이, 인간의 본능

아이는 놀이에 목마른 자
놀이 Play는 ‘갈증’을 뜻하는 라틴어 프라가 Plaga에서 유래됐다. 사막에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오아시스에 코를 박고 물을 마시는 사람처럼 놀이는 거스를 수 없는 본능이라는 의미가 이 말속에 담겨 있는 듯하다. 아이는 놀이에 목마른 자들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 갈증을 해소하기가 쉽지 않다. 가장 안정적인 놀이공간이어야 할 집에서조차 “뛰지 마!”라는 잔소리를 매일 들어야 하는 게 요즘 아이들이다.


통계도 비관적이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0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2019년 10대 청소년의 사교육 참여율은 2016년 67.8%에서 71.2%(2017년), 72.8%(2018년), 74.8%(2019년)로 해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그 결과 여가 활동 시간이 매년 줄고 있다. 이마저도 대부분을 인터넷 사용에 쓰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2018년 아동종합실태조사」도 그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동이 하루 중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48분에 불과했다.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수준으로 OECD 평균(2시간 30분)의 1/3에도 미치지 못했다. 결핍의 요소를 물었더니 신발(3.7%)이나 옷(3.5%)과 같은 물건이 아니라 정기적인 여가활동이 필요하다는 답변이 26%로 월등히 높았다.


사교육의 긍정적인 기능을 부인할 수 없다. 신체 발달과 예술성, 창의성에 도움이 되는 활동도 많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교육이라는 이유로 가장 놀기 좋은 때와 놀이의 기쁨을 만끽할 기회를 점점 잃고 있다.

그러함에도 놀이는 계속되어야 한다

핀란드의 헤이스쿨스 Hei Schools 유치원의 아이들은 종일 논다. 이중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깥 놀이시간이다. 아이들은 장난감 하나 없는 자연으로 나가 주변을 탐색하며 놀거리를 찾는다. 여기까지는 우리 아이들이 경험하는 바깥 놀이와 아무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가 다른데 바로 야외 활동이 가능한 기상 조건이다. 이 유치원은 영하 15도 이하로 내려가지만 않으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무조건 야외로 나간다. 영하 5도가 아니라 영하 15도다. 오히려 아이들은 비 오는 날을 더 좋아한다. 물웅덩이에서 놀거나 진흙으로 무언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유치원에는 장화, 우의, 장갑이 항상 준비되어 있고 활동이 끝나면 곧바로 건조기에 넣어 말린다. 내일도 놀이를 이어가기 위해서다. 어떤 상황에서도 놀이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핀란드의 놀이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사례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과 관계를 맺는 존재로 성장한다. 그 안에서 스스로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 서로 다르지만 함께 살아가는 방법도 연습한다. 놀이의 기쁨을 어렸을 때 온몸으로 경험한 아이만이 삶이란 놀이로 가득 차 있기에 숙제가 아니라 축제라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이 놀이를 지속하게 만드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다. 놀이란 아이가 성장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놀이 방법은 예측할 수가 없다. 숨바꼭질이나 오르내리기를 할 줄 알았는데, 원형 통 위에서 온 몸으로 미끄럼을 타다니. © MISSIONIT

놀이의 회복을 위한 조건

01 선택의 자유  

환경에 따라 몰입하기 쉬운 놀이는 있어도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놀이는 없다. 놀이터에 가도 미끄럼틀이나 그네가 아니라 주변의 풀, 흙, 돌, 모래, 나뭇가지에 관심을 더 갖는 아이가 있다. 하지만 어른 입장에서 이를 좋게 보기가 쉽지 않다. 나도 그렇다. 색칠해야 하는 종이를 가위로 난도질해 놓으면 무척 당황스럽다. 비싸게 주고 사 왔는데 엉뚱하게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날 때도 있다.

아이의 자기 선택권을 위협하는 요소는 어른의 계획성이다. 놀이터에 갔으면 그네를 타야 하고, 축구장에 가면 축구공을 차야 한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 놀이동산에 갔는데 기구는 타지 않고 벤치에 앉아 사람만 관찰하는 아이를 좋게 볼 부모가 있을까. 그러나 이 아이도 노는 중이다. 로제 카이와는 놀이를 4가지 범주로 구분했는데 사람을 관찰하는 일을 즐긴다면 미미크리에 관심이 많은 아이일 가능성이 높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놀이로 삼는 것이 아이들이다. 어른의 눈에는 다 똑같아 보여도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를 기어코 찾아내는 것이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어른의 섣부른 판단과 게으른 계획성은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놀이의 시작은 “00하고 놀아!”가 아니라 “뭐 하고 놀래?”라는 질문이어야 한다.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놀이로 삼는 것이 아이들이다. 어른의 눈에는 다 똑같아 보여도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를 기어코 찾아내는 것이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어른의 섣부른 판단과 게으른 계획성은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놀이의 시작은 “00하고 놀아!”가 아니라 “뭐 하고 놀래?”라는 질문이어야 한다.
02 신체의 자유  

둘째가 처음 철봉에 매달렸을 때 날갯죽지가 간지러웠는지 온몸을 빌빌 꼬며 깔깔댔다. 쭉쭉 늘어나는 옆구리 피부와 손바닥에 느껴지는 커다란 압력을 처음 느꼈을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신체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치와 한계치를 경험하며 스스로 몸을 이해한다. 이때 가장 큰 적은 위험이다. 어른의 위험 신호는 신체의 자유를 제한한다. 아이들의 활동 반경을 좁히고 움직임을 위축시킨다. “위험하니까 내려와!” 하며 경고하고 아이가 넘어졌을 때는 “그것 봐! 위험하다고 했잖아!” 하며 정당성까지 챙긴다. 그러나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면 안전은 얻어도 스스로 자기 몸을 돌보는, 한 단계 성숙한 단계로 진입할 기회를 잃는다. 어쩌면 조금 얻고 더 많이 잃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아이들은 멍들 권리’가 있다는 어느 속담처럼 위험 역시 아이 스스로 인지하고 깨닫는 탐험의 영역임을 배울 필요가 있다.
03 관계의 자유  

서너 가정이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에 왔다. 아이들이 뛰놀며 소란스럽게 노는데 한 아이만 혼자서 모래성을 쌓았다. 보다 못한 엄마가 와서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혼자 뭐 하냐. 너도 가서 애들이랑 같이 놀아. 좀!”

뇌의 성장에 따라 아이의 놀이는 달라진다. 홀로 놀다가 타인을 인지하고 사고력과 판단력이 생기면서 점점 함께 놀기 시작한다. 놀이에 등급이 있는 것은 아닌데 어른들은 함께하는 놀이에 더 높은 점수를 매기는 경향이 있다. 군중 속에 속하지 않거나 혼자만 남과 다를 때 불안을 느끼고 어딜 가든 집단에 속해야 하는 어른의 강박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러나 아이는 함께 놀 대상을 스스로 정하거나 혹은 거부할 수 있다. 오롯이 혼자 노는 것도 놀이의 한 방법이다. 놀이에 따라 놀이 참여자의 수나 관계의 깊이가 다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심리학자 밀드레드 파튼 Mildred Parten의 연구는 흥미롭다. 그는 아이들의 놀이 발달 과정을 사회적 참여도를 기준으로 구분했다.
협동 놀이를 했으면 하는데 아이는 단독 놀이에 푹 빠져 있을 수 있다. 어른의 기대에 미치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를 다그칠 필요는 없다. 선호하는 놀이도, 그 놀이에 푹 빠져있는 기간도 아이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놀이 단계를 권장하고 싶다면 말이 아니라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유도해야 한다. 친구를 초대하거나 협력이 필요한 장난감을 준비하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결정은 아이의 몫이다.
04 규칙의 자유  

그네 하나도 그냥 타는 법이 없다. 뒤로 타고, 서서 타고, 한 발만 걸쳐 탄다.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함께 타거나 한 사람은 앉고 한 사람은 서서 타기도 한다. 줄을 꽈배기처럼 꼬았다 풀 때 느끼는 색다른 재미도 빠질 수 없다. 아이들은 스스로 패턴을 찾고 규칙을 정하고 노는 방법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놀이 참여자가 합의한다면 규칙은 얼마든지 바뀐다. 무엇이든 예측 가능해야 하며 매뉴얼에 익숙한 어른에게는 무척 피곤한 일이지만 아이들에게 규칙이란 재미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니 아이의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하며 주의를 주기보다 “그렇게도 할 수 있어?” 하며 경탄해 주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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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의 회복

잘 노는 공동체를 위해
“그럼 처음부터 다시 해!” 동생의 앙탈에 누나가 크게 양보한다. 이 모습을 보면서 성서의 희년(禧年)을 떠올렸다. 히브리어로 요벨이라 부르는 희년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해를 시작으로 50년마다 반복되는 해를 말하는데 이 해에는 기업이 회복하고, 종들이 자유를 누리고, 빚진 자는 빚을 탕감받고, 땅은 안식을 누린다. 공동체 모두에게 자유와 안식이 주어지는 셈이다.

아이들의 놀이 세계에는 경쟁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사람을 깍두기로 대우한다. 낙오시키지 않고, 벽을 세워 구분하지 않는다. 형편에 맞는 특징을 부여해 끝까지 함께한다. 연대의 미덕도 있다. 혹시 동료가 두려움에 꽁꽁 얼어버렸다면 터치만으로 다시 살려낼 수 있다. 상대방이 너무 속상해하면 한 번 봐주는 일도 흔하다.

놀이란 그런 것이다. 무한경쟁, 적자생존, 제로섬(Zero-sum) 게임처럼 누군가는 실패해야 내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평화와 안녕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놀이 안에는 있다. 우리가 놀이와 함께 잃어버렸을 뿐이다. 우리가 잘 노는 어른이 된다면 우리 공동체의 불행과 아픔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놀이의 회복은 궁극적으로 공동체 모두를 위한 일이다. 마치 희년의 축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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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호모 루덴스』, 요한 하위징아, 2018, 연암서가
『놀이와 인간』, 로제 카이와, 2018, 문예출판사
『놀이의 힘』, EBS 놀이의 힘 제작진, 2020, 성안당
Parten, M. B. (1932). Social participation among pre-school children. The Journal of Abnormal and Social Psych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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