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에 살아 있는 여인들 VIII -모네의 새옹지마의 삶과 아내 카미유 "
명화속에 살아 있는 여인들 VIII
"모네(Claude Monet)의 새옹지마의 삶과 아내 카미유"
by 박명인(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
클로드 모네가 《인상·해돋이》란 작품을 발표했을 때 이 명제에 의해 인상파가 탄생했다. 그러나 모네는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겉으로 잘 나타나지 않아 그의 삶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파란만장한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인생이었다. 생전에 두 여성을 사랑했고, 인상파의 틀에 갇히지 않고 훨씬 자유로운 세계를 활동하며 86세까지 장수했다.(1840-1912).
두 사람의 아내에 대해서 구체적인 인생이 알려지지는 않지만, 첫 아내였던 카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만은 처음 만나는 시점부터 임종까지 그림으로 남겨져 있다. 모네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은 하지 못한 상태로 살았다.
또 한 명의 여인은 알리스로 알려져 있으나 알리스가 거부해서 초상화는 그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카미유의 인물화는 상당히 많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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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 미국 볼티모어시의 미술관에서 열린 클로드 모네전에는 여러 점의 카미유 작품이 출품되었다. 1876년 일본 옷을 입고 있는 《라·자포네스(보스톤 미술관 소장)》가 눈길을 끌었다. 등신대라고 할 만큼 큰 그림이었다. 의상은 진홍색 비단 바탕의 일본 우치카케(打掛け)에 금실은실을 사용해 자수로 무늬가 그려졌으며, 옷자락의 소매가 두껍고 양감(量感)이 있다. 화문석과 같은 무늬의 깔개 위에 카미유가 서 있고, 배경과 바닥 위에 16개의 부채가 놓여 있다. 그리고 카미유의 가발은 금발, 오른손에는 펼친 부채. 부채를 가지고 있는 손과 얼굴만 정면을 향하고 있는 흰 피부가 일본의상의 배경과 바닥에 열여섯 개의 부채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물론 금 채색 등은 그다지 까다롭지는 않지만 금실을 재현하기 위해 복잡하게 혼합한 황백색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무늬의 중심인 작은 칼자루에 손을 댄 무사는 그림 안에 또 한 장의 초상화 같기도 하고, 십대의 모네가 특기로 그리던 캐리커처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 그림은 처음 2,000프랑이라는 당시 모네에 있어서는 경이적인 값으로 팔렸고, 모네가 소감을 말하기도 전에 15만프랑으로 전매되었다.
또 한 점은 《정원의 카미유와 아이》(1875)인데, 화단의 꽃을 배경으로 벽 앞에 앉아 흰 천을 무릎에 펴고 바늘을 끼고 있고, 작은 그림책을 보고 있는 어린이는 앞 머리에 리본을 달고 있다. 카미유는 브루넷(brunet)의 긴 머리를 정수리에 쓸어 올려 묶고 바늘을 쥔 손가락 끝에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다. 표정은 그다지 분명하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강렬한 인상이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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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아르장퇴유 정원에 있는 카미유 모네와 아이
(Camille Monet and a Child in the Artist's Garden in Argenteuil), 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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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가 카미유의 인물화를 많이 그리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물론 모네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카미유를 사랑하고 있었으면서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아들 장을 낳았고, 아들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 또한 카미유가 아름다운 미모와 작은 몸매가 예뻤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모네는 인물희화(人物戱畵)를 그려서 축적한 2000프랑을 갖고 19세에 그림 수업을 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화가로서의 출발은 순조로워서, 1865년 25세에 바다를 그린 2점이 살롱에 입선하였고, 이때부터 까미유·동시외와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당시 18세 정도에 모네의 모델이 되어 완성한 《초록의복의 여인》은 살롱에 출품하여 상찬(賞讚)을 받았다. 그러나 모네와 카미유와의 사랑은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와의 불화를 초래하여 아들에 대한 경제원조를 끊었다. 아들이 화가로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몰이해(沒理解) 때문이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일체의 구속을 뿌리치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만 충실했던 모네를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대표작으로 알려진 《풀밭 위의 점심》(1865), 《정원의 여자들》(1866)에도 카미유가 있다. 두 그림 모두 흰 바탕에 검은 물방울 무늬, 검은 깃이 있는 긴 의상을 입고 있어서 동일 인물인 것을 알 수 있다.《녹색의 가는 줄무늬 여성》도 같은 의상으로 카미유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버지로부터 지원이 끊겨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을 때의 그림들이라 같은 의상을 입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카미유는 1867년 아들 장)(Jean)을 낳았다. 모네는 살아갈 수단으로 카미유와 아들 장을 데리고 파리로 가서 백모 밑에서 살았다. 이때 모네는 곤궁을 헤어나지 못해 물에 빠져 죽으려고 했다고 술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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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점심(Luncheon on the Grass), 1865-18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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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선배화가 쿠르베를 증인으로 결혼했지만 아들 장과 함께 떠난 신혼여행으로 인해 무일푼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공교롭게도 이때 7월 19일, 보불전쟁이 시작되었다. 모네는 카미유와 장을 런던으로 도피시켰다. 런던에서의 어려운 생활을 모네는 후에 회상하게 된다. 런던 체류 중 르누아르 작품도 다루었지만 화상 류엘을 소개받아 전속화가가 되었으나 류엘에 대한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어려운 역경 속에서 모네는 비관적인 우울한 날을 보냈다. 이때까지도 카미유는 빈곤과 싸우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사업가 콜렉터 에르네스트 오셰데(1838년 출생)가 모네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모네에게 두 번째 여인이 등장한다. 바로 오셰데 부인이다. 공교롭게도 카미유는 중병을 앓게 되고, 이듬해 오셰데는 파산하게 되어 모네의 가족과 오셰데 가족은 파리 교외의 작은 마을 아르장퇴이유(Argenteuil)의 집을 빌려 경제적인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오셰데 부인은 이때 나이가 카미유보다 세살 많은 33세였다. 오셰테는 2남 4녀로 6명의 어머니였다. 카미유가 암으로 고생할 때 오셰데 부인이나 그의 딸들에게 도움을 받았고, 이곳에서 다시 베퇴이유(Vétheuil)로 이사 갔다. 이 때 까미유는 32세였다.
까미유는 차남 미셸(Michel)을 낳은 다음 해에 사망했다. 모네는 임종 자리에서 까미유를 그렸다. 사랑한 아내의 최후의 모습을 남기려는 의도보다 죽음에 의해 변화되어 가는 아내의 안색에 모네가 반응하면서 반사적으로 그리려는 동작을 이끌었다고 화가들은 말한다.
‘사랑스러운 아내는 몹시 괴로워하다가 오늘 아침 10시 30분에 숨을 거뒀습니다. 혼자 남겨진 자신과 불쌍한 아이들이 남아 한탄하며 슬퍼할 뿐입니다’라고 모네는 글을 남겼다. 그런 사연으로 인해 그림은 색채가 거의 없고, 희고 투명한 피막 넘김 효과로 그려 자신의 슬픔을 표현했다.
‘그녀가 한마디라도 불평했으면 나는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텐데’라는 모네의 술회가 있다. 가난의 위협을 견디면서, 카미유는 많은 그림의 모델이 되었고 화가 모네의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되어 인생을 마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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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솔을 든 여인-마담 모네와 아들
(Woman with a Parasol - Madame Monet and Her Son), 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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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오셰데에 대해서는 6명의 아이 어머니라는 것과 에르네스트 오셰테의 부인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아내를 잃은 모네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집을 떠나 있으면서 알리스가 옆에 없는 아쉬움을 편지로 썼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애정이 생겼다. 모네에게는 유일한 이해자였던 알리스였다. 알리스의 남편 에르네스트·오셰데는 1891년에 사망했고, 모네는 다음 해 7월에 알리스·오셰데와 재혼했다. 『인상파의 참 모습』이란 저서에는 오셰데 부부의 막내 장(피에르 오셰데)의 아버지는 모네라는 강한 주장이 실려 있다. 장(피에르 오셰데)가 자신은 모네의 자식이라고 암시했다고 한다.
장은 1877년(오셰데가 파산하던 해)의 출생(1961년 몰). 에르네스트 오셰테가 사망하기 1년 전에 임신중절로 몸을 손상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알리스가 모네의 아이를 임신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까미유가 차남 미셸을 낳은 것은 1878년이다. 그다지 뒤 얽힌 남녀관계를 시간적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모네와 알리스가 카미유 생존시에 깊은 사이기 되었다고는 단정할 수 없고, 아내가 사망한 후, 건강한 오셰데 부인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다. 까미유의 죽음과 모네의 화가로서의 ‘성공’은 교착점이 있다.
모네와 알리스는 에르네스트 오셰데를 그들이 살고 있었던 지베르니(Giverny)에 매장했다. 여기에서 모네는 《수련》연작을 그린 연못 있는 큰 정원을 만들고, 죽을 때까지 살았다. 까미유의 무덤은 베퇴이유에 있고 묘비명은 까미유 모네가 아니라 ‘까미유 돈슈였다. 알리스도 1911년 사망하고 모네 혼자 남겨졌다. 백내장으로 실명 위기가 닥쳤고, 고독한 모네를 돌본 사람은 모네의 장남 장(1914년 사망)의 아내였던 블랑쉬 오셰데였다. 알리스의 전 남편 에르네스트 오셰테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 중 한 사람이다.
까미유는 짧은 삶을 미로에서 헤매다 사망했고, 카미유의 인물이 많이 그려진 것은 카미유가 ‘모델이 집에 들어오면 나간다’라고 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리스의 딸들은 그림으로 남겨져 있고, 외광에 의해 인물을 그리게 된 동기로써 ‘인생의 지혜’가 된 요소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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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아틀리에서의 자화상(Self Portrait in his Atelier), 18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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