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딤돌, 걸림돌 판결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코트레터
2026. 6. 19.

코트워치 기자들이 이번 주 주목한 이야기를 '키워드' 중심으로 풀어갑니다.

2주기를 앞두고, 다시 읽는 아리셀 판결

디딤돌, 걸림돌 판결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주·장애 인권 단체들에서 오랜 기간 이어 온 기록 활동의 이름이기도 한데요. 저는 이 표현이, 판결이 갖는 힘과 한계 두 가지 모두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판결이 어떤 변화로 나아가기까지 작은 디딤돌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모든 걸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은 될 수 없고, 어떤 측면에서 후퇴한 판결이라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만들어진 변화를 모두 무력화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그 판결이 쌓이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기준, 경향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이러한 잠재적인 힘 때문에 지난 아리셀 참사 항소심 판결에 큰 관심이 쏠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리셀 참사의 책임자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지난 4월 항소심에서 형량이 큰 폭으로 줄어 징역 4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래서 상상해 보게 됐습니다. 이 판결이 현실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을까 하고요.


이 질문의 답은 과거에 있었습니다. 국회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지던 때의 여러 논의들입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사업장의 안전 시스템을 만들고, 실현할 권한과 책임이 있는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법입니다. 사고가 발생해도 법정에 설 일이 없었던 법인의 대표이사, 사업주 등을 처벌함으로써 산업재해를 예방할 동기를 만드는 것이 입법 목적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법안 심사 과정에서는 '어떻게 해야 실질적인 예방 효과를 가질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법원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일정 수준의 형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가 필요한지' 등이 논의됐습니다. 핵심은 법이 예방 효과를 낼 수 있을 정도의 처벌 수준이 유지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022년 1월, 법이 시행됐습니다.


* * *


아리셀 참사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가장 많은, 23명의 노동자가 희생된 사고였습니다.


아리셀 1심 재판부는 판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기업가는)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유족과 합의를 시도하고, 유족은 막다른 길에 몰려 생계 유지를 위하여 선택의 여지 없이 합의에 이르게 되어 결국 기업가는 합의가 되었다는 이유로 선처를 받게 되는 선례가 많다. (...) 이러한 악순환을 뿌리뽑지 않는 한 우리나라에서 산업재해 발생률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피고인들이 유족들과 합의하였다는 사정은 일부 제한적으로만 양형 사유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


유족과의 합의, 사측의 재발방지대책 마련 노력 등을 이유로 중대재해 사건 24건 중 21건(2024년 11월 기준)에서 집행유예·벌금형이 선고되던 때였습니다. 아리셀 1심 재판부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 같은 것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7개월 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형량을 큰 폭으로 낮추며 아래와 같이 적었습니다.


"피해자 측과의 합의를 제한적으로 양형에 반영하게 되면, 오히려 피고인으로 하여금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소극적으로 하게 하거나 급기야는 포기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고, 이는 결국에는 피해자 측의 실질적이고 충분한 피해 회복을 어렵게 한다."


* * *


위 문장을 읽고 느꼈던 의문, 어떤 답답함을 풀어가면서 6월의 '이달의 판결'을 작성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 아리셀 판결을 되돌아보며 제가 고민했던 지점은 1심과 항소심 사이에 존재하는 중대한 관점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였습니다.


아리셀 참사 희생자 2주기를 전후로, 대법원으로 넘어간 상고심의 진행 상황을 지켜보며 지난 판결이 궁금하셨던 분들께 도움이 되는 글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권한 있는 자에게 책임을 물어' 기업이 사고를 예방하도록 만들기 위해 제정됐습니다. 법이 시행되고 4년.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1심·항소심 판결이 우리 사회에 남긴 질문들을 정리했습니다. 나아가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진 과정, 입법 취지 등을 살펴봤습니다.

(이 레터는 코트워치 후원회원 워처 90분의 지원을 받아 김주형 기자가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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