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9년 차 무자녀 부부입니다. 아이가 없는 분들은 노후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부양이라는 측면이 아니라요. 저희 부부는 다행히 서로 죽이 맞아 여전히 장난도 잘 치고 정서적 거리는 딱 적당하다고 느끼는데, 나중에는 여느 노부부처럼 점점 말이 없어지고 서먹해지는 그런 순서를 따라가게 될까요? 여행은 자주 다닐까? 아이가 있다고 해서 막 화목하고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무자녀 부부는 흔치 않은 라이프스타일이다 보니 다른 집은 어떻게 지내는지도 참 궁금합니다.

 

시오랑 님께서 이 편지를 보내신 지 시간이 꽤 흘렀으니 이제 결혼 10년 차가 되셨겠군요. 답장이 늦었습니다.

 

이른바 ‘신혼’으로 분류되는, 결혼 3~5년 정도 된 무자녀 부부가 가장 흔히 듣는 말은 “둘이서 무슨 재미로 살아?”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은 결혼 후 아이 갖는 시기가 점점 늦춰지면서, 신혼부부 특별공급 분양 대상 기준이 혼인신고 7년 이내로 늘어나기도 했다지만요. 거기서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지금은 좋지, 늙어서 자식도 없이 무슨 재미로 살래?” 같은 말이 먼저 인생을 살아본 어른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처럼 자주 들려오구요.

 

미래의 일은 아직 모르겠지만, 평생 ‘잼얘(재미있는 이야기)’ 중독자로 살아온 저는 사실 10년째 둘이 사는 생활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시오랑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서로 죽이 맞는” 사람과 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리고 이것은 내가 선택해서 가족이 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저희 아버지는 시니컬한 농담과 고맥락 대화를 즐기는 분인데 저희 어머니는 모든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허튼소리라곤 안 하는 분이다 보니 서로 그야말로 로또만큼이나 안 맞으시거든요. 

 

사실 저와 남편은 취미나 취향이 거의 겹치지 않습니다. 남편은 야구를 포함한 모든 스포츠 중계를 좋아하지만 저는 어떤 스포츠 경기에도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면서 발생하는 역동을 소화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스포츠에서의 승패에 이입하지 못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처럼 주 6일 거실 TV에 프로야구가 틀어져 있으면 저는 중계를 백색소음처럼 깔고 아이패드로 넷플릭스 드라마를 봅니다. 그리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다른 화면을 향해 독백하지요.

 

“홈런이야? 홈런이야? 홈런? 홈런? 홈런? 홈런!!!!!!”

“아니, 이 XX는 이럴 거면 왜 처음부터 피임을 안 해?”

 

다만 저희에게 유일한 공통의 취미가 있다면 옛날 드라마 같이 보기입니다. 둘 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프리랜서다 보니 케이블 채널에서 <아들과 딸>(1992), <서울의 달>(1994), <아줌마>(2000) 같은 명작이 재방송될 때마다 쏘팔메토, 붕붕예초기, 두부짤순이 등 길고 요란한 중간광고를 견디며 하염없이 보곤 해요. 그중에서도 김수현 작가의 <내 남자의 여자>(2007)는 나올 때마다 채널을 고정할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지금은 김상중 씨의 “감자 좀 쪄줄래?” 짤과 하유미 씨의 “교호양? 이게 니 교양이야?”라는 대사 등 밈으로 언급되는 일이 많지만, 제가 결혼하고 주인공들과 비슷한 나이가 되어서 본 이 드라마는 단순한 ‘불륜’ 이야기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제도, 부부라는 관계, 중년의 위기, 부모의 욕망이 자녀의 삶을 망가뜨리는 과정 등 여러 생각할 거리를 주는 작품이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중년을 맞이한 두 사람이 드라마의 전개에 따라 떠오르는 말을 두서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거지요. 2천년대 중반 여성 패션의 특징부터 김희애와 배종옥의 연기 행보, <아줌마>의 장진구(강석우)와 <내 남자의 여자> 홍준표(김상중) 비교 분석, 이 드라마에서 지수(배종옥)의 훈남 후배로 등장한 배우 이종원이 김수현 작가의 또 다른 명작 <청춘의 덫>(1999)에서는 어땠는가 등등.

 

그래서 올여름 저희가 함께 보낸 가장 즐거운 시간은 가족 여행...이 당연히 아니라, MBC ON에서 평일 오후에 재방송한 <사랑이 뭐길래>(1991) 시청이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방영되었을 때 저는 부모님, 언니,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초등학생이었는데, 시청률 60%를 넘나들었던 작품인 만큼 온 가족이 함께 본 기억은 있지만 지금 다시 보니 가부장제와 결혼제도에 관한 통렬한 풍자가 담겨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드라마의 큰 줄거리는 ‘남녀 평등한’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란 대학원생 박지은(하희라)이 엄청나게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란 레지던트 이대발(최민수)와 결혼해 첫 아이를 출산하기까지의 과정입니다. 지독한 ‘유교맨’에 집안의 독재자였던 대발이 아버지 이병호(이순재)가 신세대 며느리라는 낯선 존재와 부딪히고 아내 딸과 갈등을 겪으며 조금씩 변해, 마지막 화에서는 몸져누운 아내 대신 아침밥을 하려다 들키자 놀라서 양푼을 엎는 엔딩은 정말 명장면이더라고요. 대발이 어머니 여순자 역 김혜자 씨의 연기는 이 드라마에서도 가장 놀라운 경지인데, 김수현 작가의 또 다른 명작 <엄마가 뿔났다>(2008)에서의 연기와 비교해 봐도 무척 재밌습니다.

또 제가 흥미롭다고 느낀 건, 옛날에는 다정한 아빠이자 최고의 애처가로 보였던 지은의 아버지 박창규(김세윤)가 지금 보니 아내 한심애(윤여정)에게 어머니를 포함한 자신의 원 가족 돌봄을 은근슬쩍 떠맡기고 일정 부분 모른 척한다는 면에서, 상당히 이기적인 남자라는 점이었어요. 대발이 아버지와는 다른 양상이지만, 실은 그 또한 가부장제의 수혜자이자 수호자인 거지요. 그래서 90년대의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에서 어떤 지점을 읽어냈을지, 2024년의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를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는 이야기 같은 걸 끝없이 주고받다 보니 어느덧 8월이 끝나갑니다. (<사랑이 뭐길래>를 비롯해 김수현 작가의 여러 작품이 웨이브에 올라와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이 있다면 찾아보시길!)

 

왠지 좋아하는 드라마 영업으로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네요. 하지만 꼭 여행같은 이벤트가 아니더라도, 무엇을 하든 서로 죽이 잘 맞는다는 건 어느 정도 가치관이 맞고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를 포함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나이를 먹더라도 데면데면해질 것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다만 함께 있는 시간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요즘 밥 먹을 때 스마트폰 보는 버릇을 고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답장을 쓰다 보니 다른 무자녀 커플은 어떻게 정서적 친밀감을 유지하고 확장하는지 궁금해지네요.

 

 

정말로 ‘처서 매직’이 온 걸까요. 왠지 조금 선선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안녕히 계세요.

* 추신. 얼마 전 셀럽 맷 님이 진행하시는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 313화 "모범생들 얘기가 이렇게 재밌다고!?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편에 소설가 민지형 작가님과 함께 출연해 이야기 나누었어요.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며느라기>로 유명하신 만화가 수신지 작가님이 단행본으로 내고 계신 작품인데, 90년대 중반 대전을 배경으로 여고생들의 성장과 우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요. 저 역시 그 시기에 고등학생이었다 보니 공감되는 내용도 많고, 또 청소년기의 친구 관계에 관한 고민은 세대 불문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주 재미있게 봤어요. 책 이야기와 함께, 속은 반항기로 가득하나 실제로는 소심한 모범생이었던 저의 중고등학교 시절 기억도 탈탈 털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들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