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리브스,『복음주의 바리새인』

독자님, 안녕하세요.

복 있는 사람 마케터 B입니다.


오늘은 질문으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이 질문은 각자가 평소에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에 따라 다양한 답변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독자님들은 어떤 답변을 하실지 궁금하네요!


물론 이 질문을 던지는 의도는 있지만, 준비한 텍스트의 스포일러가 될 듯하여 따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함께 읽을 《복음주의 바리새인》을 통해 우리가 각자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월요일의 복음 “성경에 관해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를 시작하겠습니다.

#27 성경에 관해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주위를 내려다보는 그들의 마음 자세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주위를 내려다보면서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했고, 같은 태도로 다른 이들의 칭찬을 추구했다. 주위를 내려다보는 이런 태도는 연구에 집착했던 바리새인들의 삶에 잘 어울렸다. 그들은 이런 마음으로 성경을 살폈으며, 그 본문의 주인이 되려 했다. 그들이 성경의 지적인 통달을 목표로 삼은 이유는 이를 통해 생명을 얻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었다. 결국 그들은 성경의 인도를 따라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이 위선에서 생겨나는 신학적 문제는 정확히 어떤 것이었을까? 깊은 병에 걸렸을 때 흔히 그렇듯이, 겉으로는 상당히 그럴듯해 보였다. 결국 그들은 성경을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신들의 특권을 민감하게 의식했고(롬 3:2), 철저한 성경 학도가 되었다. 그들은 성경 각 권의 단어와 글자 수까지 헤아리면서 음, 절 하나하나의 의미를 파헤치려 했다. 엄격한 율법의 훈육을 받은 그들은 스스로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 될 수 있다 고 믿었다(롬 2:19-20).


바리새인들은 단순히 하나님 말씀을 정확하고 책임감 있게 다루려 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근면한 성경 연구 자체를 경건의 핵심으로 여겼다. 랍비들의 타르굼(Targums, 고대 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한 본문—옮긴이)에서는 하나님을 한 분의 꼼꼼한 학자로 묘사하면서 이렇게 언급한다. “그분은 날마다 성경 연구에 몰두하신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대한 지적인 이해만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요 5:39). 이것이 바로 그들의 태도였다. 어떤 글에서는 이렇게 언급한다.

[랍비 힐렐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토라를 많이 배울수록 풍성한 생명을 얻으며, [학자들의 모임에] 오래 앉아 있을수록 깊은 지혜를 터득한다.……어떤 이가 선한 평판을 얻었다면, 이는 상당한 유익이다. 그러나 토라의 지식을 쌓을 경우, 이는 곧 내세의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 된다.”

바리새인들은 이처럼 성경의 어구들에 몰두하면서도 정작 성경의 진리를 헤아리지 못했다. 그들의 탐구는 영적인 감화와 깨달음이 없는 지적인 분석이었다. 그들은 구원의 신앙을 일종의 지식과 정보로 간주했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돌아보지 못했으며, 인간의 문제가 그저 지적인 무지에 있다고 여겨 배움과 연구만으로 그것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자신들의 깊은 영적인 질병이나 구속의 절실한 필요성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들은 열심히 성경을 연구했지만 정작 예수님께 나아가서 생명을 얻는 일은 원치 않았다.


복음주의자들 역시 이 바리새인들의 죄에 빠질 수 있다. 우리도 성경 자체를 목적으로 삼곤 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경우처럼, 그 일은 우리에게도 유혹 거리가 된다. 인간의 근본 문제를 일종의 무지로 여기고 그 해결책이 단순히 성경 지식에 있다고 믿는다면, 자기 마음을 살피면서 그 숨은 죄들을 파악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내면의 깊은 어둠과 더러움을 애써 외면하고, 독서와 연구를 통한 자기 계발에 치중하게 된다. 이는 건전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택할 길처럼 보이지만, 그 길에는 모든 일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아래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이사야처럼 “화로다, 나여!”라고 부르짖는 마음의 고뇌가 배제되어 있다(사 6:5).


여기에는 기이한 아이러니가 자리 잡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늘 기독교 예식주의를 경계하면서, (교회 출석 등의) 단순한 행위들을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으로 착각하는 명목상의 미신에 반대해 왔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인간이 성례들을 통해 ‘사효적인’ 방식(ex opere operato, 이는 본질상 자동적인 방식이다)으로 은혜를 받는다고 가르치며,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그들의 사상을 우리가 인격적인 믿음으로 영접해야 할 복음에 대한 모욕으로 여긴다. 하지만 우리도 성경을 이와 똑같이 대할 수 있다. 우리의 성경 읽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자동으로(ex opere operato) 임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성지 순례를 가거나 속죄를 위한 고행에 몰두할 때, 복음주의자들은 규칙적으로 성경 읽기의 의식을 수행한다. 때로 그것은 너무나 조잡한 미신이어서, 성경책을 거꾸로 들고 읽어도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이때 우리의 ‘예배’는 그저 매일 고요한 시간을 갖는 하나의 의식이 되고 만다. 기계적이고 무정한 태도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그분을 높이려는 마음이 전혀 없이 그 일을 행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 그랜트 매캐스킬은 이렇게 언급한다.

우리는 조용히 성경 읽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 말씀 듣는 법을 훈련하기보다, 무심코 그 일 자체를 목표로 삼게 된다. 그리고 정기적인 친교 행사 자체를 기독교적인 성장의 토대로 삼기도 한다. 이때 우리는 하나의 중대한 요점을 놓치고 만다. 우리는 자칫 이 모든 일을 그릇된 동기에서 행하는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새로운 지식 습득을 즐기고 친교 모임을 통해 사회적 활력을 얻으며, 꾸준한 종교적 실천을 통해 자기 존재가 확인되는 느낌을 맛보면서도 정작 예수님에 관해서는 아무 관심도 쏟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모든 일의 주관자이심을 망각하고 그분을 우리 삶의 한 작은 영역 속에 가두려 할 때, 다른 모든 영역이 왜곡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우리 삶에 찾아오시는 그분의 손길을 체험하려는 마음으로 구약을 읽는 대신에, 그것을 그저 우리 삶의 방식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들을 파악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바리새주의의 덫에 걸려든다.

복음주의자들이 성경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때, 바리새인들과의 섬뜩한 유사성이 조금씩 드러난다. 이때 우리는 성경을 우리의 참모습을 비춰 주는 거울로 여기고 소중히 아끼는 것이 아니라(약 1:22-25), 다른 이들을 공격하는 무기나 자신의 탁월함을 과시하는 도구로 삼게 된다. 성경의 참빛을 깨닫지 못한 채 그 어구들에만 숙달되면 우리 안에서 교만이 점점 자라난다. 성경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설교는 그저 자신의 회중을 성경의 전문가로 양육하는 일이 된다. 때로 그들은 꼼꼼하고 착실한 성경학도가 되지만, 그때도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일종의 율법학자일 뿐이다. 그들은 해박한 성경 지식을 갖췄으면서도 자기 문제의 심각성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이들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내세우고 자랑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께 경배하며 그분을 사랑할 수 없다.


이 복음주의자들은 자만심에 찬 태도로 지적인 면모를 드러내곤 한다. 그들은 주로 지식에 관심을 쏟으며, 무지를 가장 중한 죄로 여긴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이 ‘신조 대신에 성경’을 지향하는 반지성주의와 신학을 의심하는 태도로 잘 알려져 있음을 생각할 때, 이는 다소 놀랍게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적이면서도 얄팍한 모습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 만약 성경의 내용이 그저 우리가 습득해야 할 정보들일 뿐이라면, 그 내용이 단순한 것이기를 바랄 이유가 더 뚜렷해진다. 그러면 성경의 전문가가 되는 일이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탁월함을 더 널리 과시하게 된다. 그 결과로, 잘난 체하면서도 피상적인 복음주의자들의 문화가 생긴다. 이때 복음은 외부인과 입문자들만을 위한 신앙의 기초 단계로 취급된다. 그리고 나머지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지 않은 채 지식의 얄팍한 위안 속에 머무는 것이다.


요점은 이것이다. ‘과연 우리는 성경 읽기를 통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고 있는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성경 읽기는 우리를 개인 기도의 자리로 이끄는가? 우리가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위선자들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마 6:5). 따라서 대중 앞에서의 기도는 우리의 신앙이 올바름을 입증할 수 없다. 중요한 문제는 과연 다른 이들이 보지 않을 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 기도 하[고]” 있는가(6:6). 성도와 바리새인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 은밀하고 자연스러운 영혼의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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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번째 <월요일의 복음>은

『복음주의 바리새인』에서 발췌했습니다.


제목: 복음주의 바리새인
지은이: 마이클 리브스 | 옮긴이: 송동민
판형: 신국변형(123*190) 168쪽 | 가격: 11,000원

 

* 자세한 도서 소개

알라딘: http://aladin.kr/p/N4dv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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