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메일 #292 | 2026년 10월 6일 - WEEK 41

처음부터 AI에게 일을 맡기면 일이 더 힘들어집니다. (feat. 논문)

내 생각을 위한 마찰을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진대연



요즘 AI와 함께 일하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메일 답장도, 기획서 초안도, 회의 정리도 일단 AI에게 먼저 맡겨 보죠. 솔직히 말하면 귀찮아서입니다.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것보다 「이거 해 줘」 한 줄을 치는 게 훨씬 빠르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받은 결과물은 처음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읽다 보면 이상한 부분이 하나씩 눈에 띕니다. 내가 하려던 말과 조금 다르고, 강조하고 싶던 부분은 빠져 있고, 굳이 없어도 되는 문장은 들어가 있죠. 그래서 하나씩 고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끝도 없이 고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내가 쓰는 게 더 빨랐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렇다고 적당한 데서 그냥 내보내면 사람들은 금방 알아봅니다. 「이거 AI로 만든 거죠?」라고요. 이렇게 그럴듯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결과물을 요즘 AI 슬롭(AI slop), 즉 AI로 손쉽게 대량으로 만들어 낸 품질 낮은 콘텐츠라고 부릅니다.


슬롭(slop)은 원래 돼지에게 주는 음식 찌꺼기를 뜻하는 영어 단어입니다. 양은 많은데 아무도 공들여 만들지 않은 것, 그래서 누구에게도 맞춰져 있지 않은 것이라는 뜻으로 AI 결과물에 붙었습니다.

ChatGPT 생성 이미지

그런데 최근에 흥미로운 논문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겪는 이 문제를 실험으로 확인한 연구입니다.


구글 딥마인드는 AI가 먼저 쓰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10월 1일 구글 딥마인드 연구진이 「누가 먼저 생각하는가?(Who Thinks First?)」라는 논문을 공개했습니다. 실험은 이렇게 진행됐습니다.


  1. 참가자 398명에게 「주 4일 근무」에 대한 자기 주장을 담은 글을 쓰게 했습니다. 200단어 이상이었고, 참고할 자료 요약 4개(찬성 근거 2개, 비판 근거 2개)를 함께 줬습니다.
  2. 참가자를 네 집단으로 나눴습니다.
    • AI 없이 혼자 쓰는 집단
    • 처음부터 글을 대신 써 주는 AI를 쓸 수 있는 집단 — 우리가 평소에 쓰는 방식입니다
    • 처음에는 되묻기만 하는 AI만 쓸 수 있는 집단 — 이 AI는 입장도, 근거도, 문장도 대신 주지 않습니다. 「자료에서 무엇이 눈에 띄나요?」처럼 질문만 돌려줍니다. 참가자가 글에 자기 입장과 그 입장을 받치는 근거 하나를 직접 쓰고 나면, 그때 글을 써 주는 AI가 열립니다
    • 세 번째 집단과 같은 시간이 지나면 글을 써 주는 AI가 열리는 집단 — 내가 얼마나 썼는지와는 상관없이 시간만 맞췄습니다
  3. 글을 낸 뒤에는 AI가 쓴 짧은 글 8개를 AI 도움 없이 검토하게 했습니다. 절반은 멀쩡했고, 나머지 절반은 자료를 왜곡했거나 논리가 비약된 글이었습니다. 참가자는 글마다 맞는지 틀린지, 틀렸다면 왜 틀렸는지를 골라야 했죠.
  4. 연구진은 단계마다 걸린 시간, AI에게 보낸 질문 수, 최종 글에 AI 문장을 그대로 옮긴 비율, 그리고 검토 정확도를 측정했습니다.


연구진은 세 번째 집단의 방식을 생산적 마찰(productive friction), 즉 사람이 생각해야 할 자리에 일부러 남겨 둔 작은 수고라고 부릅니다.


보통 마찰은 없애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버튼을 한 번 덜 누르게, 단계를 하나 덜 거치게 만드는 것이 좋은 설계라고 배우죠. 생산적 마찰은 그 반대입니다. 모든 마찰을 없애지 않고, 사람이 직접 생각해야 하는 지점에만 일부러 마찰을 남겨 둡니다.

위에서부터 AI 없이 쓰는 집단, 처음부터 AI가 써 주는 집단, 되묻는 AI와 시작해 내가 먼저 쓰면 열리는 집단, 시간이 지나면 열리는 집단입니다. ChatGPT 생성 이미지

걸린 시간은 같았지만 각자 다르게 활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땠을까요? 먼저 전체 작업 시간은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AI를 쓴 집단과 먼저 쓰고 나서 AI를 연 집단 모두 약 45분이 걸렸죠.


그런데 그 45분을 어디에 썼는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 먼저 쓴 집단은 글을 쓰는 데 4.8분을 더 썼습니다(28.0분 대 23.3분).
  • 대신 AI 글을 검토하는 데는 4.8분을 덜 썼습니다(17.4분 대 22.2분).

논문에 실린 그림입니다. 왼쪽이 글쓰기, 오른쪽이 검토에 걸린 시간입니다. 진한 파란 선이 먼저 쓰고 나서 AI를 연 집단, 주황 선이 처음부터 AI를 쓴 집단입니다.



그렇다고 AI를 덜 쓴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먼저 쓴 집단은 AI에게 질문을 두 배 넘게 보냈습니다(평균 7.7개 대 3.4개). 그런데 최종 글에 AI 문장을 그대로 옮긴 비율은 47%에서 27%로 줄었습니다. AI와는 더 많이 대화했는데, 글은 더 자기 것이었던 셈이죠.


또한 검토에서도 차이가 났습니다. 전체적으로 맞힌 비율은 집단끼리 비슷했습니다. 다만 틀린 글을 찾아낸 뒤 왜 틀렸는지까지 맞힌 비율은 90%와 78%로 갈렸습니다.


연구진은 이 결과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처음부터 AI에게 맡긴 사람들은 글을 쓰는 동안 주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나중에 AI 글을 판단할 기준을 세우는 데 시간이 더 들었다는 것입니다. 즉 처음에 AI에게 맡겨서 아낀 시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뒤로 미뤄졌을 뿐이라는 거죠.


물론 공짜는 없었습니다. 먼저 쓴 사람들은 쓰는 동안 노력이 더 들었다고 답했습니다(7점 만점에 5.15점 대 4.47점). 그런데 짜증이 났다거나 시간에 쫓겼다는 응답은 차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힘은 더 들었지만 그만큼 괴롭지는 않았던 것이죠. 마찰이 「생산적」이라는 말은 이런 뜻인 것 같습니다.


"An important design problem for human–AI interaction is not only determining how much humans should think, but where they should think."
(사람과 AI가 함께 일할 때 중요한 설계 문제는 사람이 얼마나 생각해야 하는지만이 아니라, 어디서 생각해야 하는지다.)
— 「Who Thinks First?」, 구글 딥마인드


그냥 기다린다고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AI를 그냥 늦게 열기만 해도 비슷한 효과가 나지 않을까요? 네 번째 집단은 바로 이것을 확인하려고 만든 집단입니다.


결과는 달랐습니다. 시간이 되어 AI가 열린 60명 가운데 38명, 즉 63%는 그 순간까지 자기 입장과 근거를 아직 쓰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중 16명은 글이 아예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AI가 열리는 시각은 같았지만, 그 시각에 머릿속이 준비되어 있었는지는 전혀 달랐던 것이죠. 이 집단은 먼저 쓴 집단보다 AI에게 질문도 덜 했고, 검토에도 3분 가까이 더 걸렸습니다.


먼저 쓴 집단에서는 반대 장면도 나옵니다. 논문 부록에 실린 한 참가자는 되묻는 AI와 여섯 번 대화하면서 자료 속 연구가 수면과 스트레스를 본인 일기로만 기록했다는 약점을 스스로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29분쯤 글을 써 주는 AI가 열렸지만, 결국 한 번도 쓰지 않고 218단어짜리 글을 혼자 완성해 냈죠. 실제로 글을 써 주는 AI가 열린 사람 가운데 그 AI에게 한 번이라도 요청한 사람은 절반이 안 됐습니다(47%).


결국 차이는 단지 AI가 먼저 시작했느냐, 내가 먼저 시작했느냐뿐이었습니다.


AI는 내 취향도 맥락도 잘 모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이유를 생각해 보면 간단합니다. AI는 사실 내 취향도, 내가 처한 맥락도 잘 모릅니다. 지난 291호에서 내 맥락을 담아 두는 환경, 즉 하네스 이야기를 했었죠. 그런데 잘 만들어진 하네스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이번에 무엇을 말할지, 진짜 중요한 핵심 주제를 정하는 사람은 나여야 합니다. 하네스는 내가 정한 방향을 잘 따라가게 해 줄 뿐, 방향 자체를 대신 정해 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가 그 핵심 주제를 정하려면, 결국 그 내용을 어느 정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논문에서 먼저 쓴 사람들이 검토를 빨리 끝낸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자기 입장과 근거를 한 번 세워 봤기 때문에, AI 글을 볼 때 무엇이 맞고 틀린지 비춰 볼 기준이 이미 머릿속에 있었던 것이죠.


그것이 우리가 일을 덜 하게 만들고, AI가 일을 더 잘하게 만드는 비결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이번 호도 그렇게 썼습니다. 논문을 읽고 핵심 주제와 제목과 글의 흐름을 먼저 열 줄 남짓 적은 다음에 AI에게 넘겼습니다. 그 열 줄이 없었다면 AI는 논문 요약문을 깔끔하게 써 줬을 겁니다. 아마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빠진 채로 말이죠.

그래서 AI에게 먼저 물어보라고 지침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AI 지침을 바꿨습니다. 제가 맥락 없이 무작정 일을 시키면, 마음대로 시작하지 말고 일의 목표와 맥락과 핵심 주제를 먼저 저에게 물어보라고요.


사실 원래 지침에도 비슷한 문장은 있었습니다.


확인을 먼저 한다. 불명확하면 추측하지 말고 핵심 질문으로 좁힌다. 바로 답할 수 있는 질문에는 곧바로 답한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빈틈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무엇이 불명확한지를 AI가 판단한다는 점입니다. AI 입장에서는 「기획서 써 줘」도 충분히 명확한 요청입니다. 그러니 바로 그럴듯한 기획서를 만들어 오죠. 그래서 이렇게 바꿨습니다.


맥락 없이 일을 받으면 시작하기 전에 먼저 묻는다.

글·문서·기획·조사처럼 결과물을 만드는 일을 목표나 맥락 없이 받으면,
바로 만들지 말고 세 가지를 먼저 묻는다.
1. 이 일이 끝나면 무엇이 되어 있어야 하나 (목표)
2. 누가 받고, 어디에 쓰나 (맥락)
3. 꼭 들어가야 할 핵심 주제나 주장은 무엇인가 (방향)

- 폴더 문서나 지난 대화에 이미 답이 있으면 묻지 않고 그 답을 인용한다.
- 빈손으로 묻지 않는다. 모아 둔 자료로 해석 두세 개를 만들어 고르게 한다.
- 묻는 대신 그럴듯한 초안부터 내밀지 않는다. 방향을 고르는 자리는 내 몫이다.


핵심은 마지막 줄입니다. 「일단 만들어 봤습니다」는 친절해 보이지만, 사실은 방향을 고르는 자리를 AI가 먼저 차지하는 일입니다. 논문 속 「되묻기만 하는 AI」를 제 일에 들여온 셈이죠.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목적부터 세웁니다


몇 주씩 이어지는 프로젝트라면 한 단계가 더 있습니다. 저는 새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project-charter라는 스킬을 먼저 돌립니다. 이 스킬을 쓰면 AI에게 일을 시키기 전에 딱 세 가지를 먼저 문장으로 정하게 됩니다.


  1. 목적 — 무엇이 되어 있으면 이 프로젝트가 끝난 것인가
  2. 나의 역할 — 이 프로젝트 안에서 나는 어떤 판단을 하는 사람인가
  3. 위임 범위 — AI에게 어디까지 맡길 것인가


그런데 여기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AI가 백지 상태로 「목적이 뭔가요?」라고 묻지 않습니다. 먼저 폴더 안의 자료, 관련된 다른 프로젝트, 노트를 다 모아서 목적과 역할의 초안을 두세 가지로 만들어 옵니다. 고르고 고치는 것은 제가 합니다. 위임 범위도 다섯 단계로 나눠서 정합니다. 시키는 대로 하기, 조사해서 선택지 가져오기, 추천안까지 만들고 승인은 내가 하기, 결정하고 실행한 뒤 알려 주기, 알아서 하기.


예를 들어 지금 준비하고 있는 인테리어 대표님들 대상 AI 강의 폴더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목적: 강의 당일, 참가한 대표님 각자가 자기 일정표로 돌아가는
「작업자 일정·고객 안내 비서」 하나를 직접 만들어 들고 나간 상태

성공 기준: 강의가 끝날 때 참가자 전원이 자기 데이터로 작동하는 자동화를
하나씩 갖고 있다. 「따라 했다」가 아니라 「내 것이 돈다」.

범위 밖: 3D 실사화, MCP·스킬 같은 용어 교육, 홈페이지 제작.
기초만으로 진짜 고민을 푼다.

나의 역할: 대표님들의 진짜 고민을 5시간 안에 되는 실습 과제로 바꾸고,
현장에서 각자 것이 돌아가게 만든다.

위임: 커리큘럼은 추천안과 대안 두 개까지만 / 실습 템플릿과 자료 조사는 만들고 보고 /
주최 측 연락, 금액, 대외 공개는 끝까지 내가 한다.


이 몇 줄이 있으면 AI는 이 폴더에서 무엇을 만들든 이 문장에 비춰 봅니다. 「범위 밖」 한 줄이 있으니 친절하게 MCP 설명 슬라이드를 끼워 넣지 않고, 「위임」 한 줄이 있으니 주최 측에 먼저 메일을 보내지 않죠. 방향은 제가 정했고, AI는 그 안에서 마음껏 일합니다.


지휘권은 언제나 나에게 있어야 합니다


간단합니다. 지휘권은 나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유도 간단합니다. 그래야 내가 일을 덜 하고, AI가 제대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전체 맥락과 방향을 꿰뚫고 있어야 합니다. 완벽하게 꿰뚫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우리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는 갖고 있어야 하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AI 슬롭만 만들고, 그걸 고치느라 아낀 시간을 다 쓰게 될 겁니다. 논문 속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이번 주에 AI에게 일을 하나 맡기기 전에, 세 줄만 먼저 적어 보면 좋겠습니다. 이 일로 무엇이 되어 있어야 하는지, 누가 어디에 쓰는지, 내가 꼭 말하고 싶은 한 가지가 무엇인지. 만약 그 세 줄을 쓰기 어렵다면, 그 일은 아직 AI에게 넘길 때가 아닌 것일지도 모릅니다.


ChatGPT의 맞춤 설정이나 Claude의 프로젝트 지침에 아래 문장을 그대로 붙여 넣어도 좋습니다.


내가 목표나 맥락 없이 일을 맡기면 바로 만들지 말고 먼저 물어봐 줘.
1. 이 일이 끝나면 무엇이 되어 있어야 하는지
2. 누가 받고 어디에 쓰는지
3. 꼭 들어가야 할 핵심 주제가 무엇인지
물을 때는 네가 이해한 방향을 두세 가지로 정리해서 내가 고를 수 있게 해 줘.

ChatGPT 생성 이미지

참고한 글

  • 🧭 처음부터 AI에게 맡기면 아낀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나중에 고치고 검토하는 시간으로 미뤄질 뿐입니다.
  • ✍️ 구글 딥마인드 실험에서 내 입장과 근거를 먼저 쓴 사람들은 같은 시간 안에 AI를 더 많이 쓰고도 AI 글을 덜 옮겼고, 검토는 더 빨리 끝냈습니다.
  • 🎯 그래서 AI에게 맥락 없는 일을 받으면 먼저 묻게 했습니다. 방향을 정하는 자리는 언제나 내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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