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행동은 학습과 기억의 축적에 따라 형성된다. 내가 이 글을 쓸 때 굳이 자판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 사람의 행동은 학습과 기억의 축적에 따라 형성된다. 내가 이 글을 쓸 때 굳이 자판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오랜 기간 반복적으로 같은 자리에 있는 키의 위치를 자연스럽게 익혀왔기 때문이다. 내 신경과 손끝에 축적된 그 경험 그대로 타이핑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축적된 경험과 학습으로 형성된 것이 멘탈 모델Mental Model이다. 가령 우리가 운전하면서 차로의 차선을 바꿀 때 내가 이정도 지점에서 차로를 바꾸면 뒷차와의 안전상 문제가 없이 차로를 바꿀 수 있도록 짧은 순간 안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이다.
멘탈 모델은 1943년 심리학자 케네스 크레이크Kenneth Craik가 제안하였는데, 그는 사람들이 세상의 사건을 예측하고, 추론하며, 설명하는 데 마음 속에 작은 규모의 모델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후 다양한 연구에 의해 멘탈 모델의 정의와 역할이 발전되어 왔다. 이 글이 논문은 아니므로 모든 내용을 담지는 않겠지만, 핵심은 멘탈 모델이 '반복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되며, 이를 통해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예측'해나가고 나름대로 논리적 결정을 하는데 '토대'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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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 모델은 심리적 안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는 익숙한 방식을 따라 행동할 때 안정감을 느낀다. 밥을 먹는 방식, 사람을 대하는 태도, 결제하는 방법까지 이 모든 것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형성된 멘탈 모델의 일부다. 하지만 내가 살아왔던 환경과 다른 상황에 직면하면 불안감이 생긴다. 익숙함은 안정감을 주지만 낯선 환경은 멘탈 모델과 충돌하며 심리적 불안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최근 인터뷰를 진행했던 한 80세 어르신은 배달 주문 시 비대면 결제보다 대면 결제를 더 선호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때는 카드도 아니고 그냥 현금으로 주고받았잖아.”라는 것이다. 비대면 결제가 우리에게 익숙하게 자리 잡은 것도 최근이니 70년 넘게 대면 방식으로 살아오신 분들에게 비대면 결제는 어색하고 불안감을 유발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앱에서 카드 결제를 하면 뭔가 불안하다는 것이다. 이 불안감의 내면에는 그분들이 살아오며 쌓아 온 '신뢰' 형성에 대한 경험이 깔려 있다. 사람도 만나봐야 알 수 있고, 돈을 주고받을 때도 직접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다. 특히 근검 절약이 몸에 벤 베이비 부머와 그 윗세대에게 자산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보지 않고 결제한다는 것은 불안 요소다. 이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르신들에게 익숙하고 편리한 방식의 선택권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배달 앱에서도 ‘만나서 직접 결제하기’라는 옵션이 의미 있는 이유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응을 요구하기 보다는 기존의 경험과 자연스러운 연결지점을 찾아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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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에게 축적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접근성의 기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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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 4 6 8 10 12 14 16 18 20 22 24…
B: 7 8 1 2 3 0 8 2 0 1 2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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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배열의 그룹 차이를 맞춰보자. A는 간단하다. 2씩 커지는 수의 배열이다. 반면 B는? 한 자리 수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9 다음에 어떤 수가 나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A는 추론이 가능하지만 B는 그럴 수 없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나는 시각장애인 사용자들이 보이스오버를 통해 앱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 특히 시각장애인 중에서도 앱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용자가 아닌 경우, 즉 중도 시각장애를 가진 분들이나 고연령층 시각장애인이 처음으로 앱을 접했을 때의 경험은 B와 비슷하다.
출시된 거의 모든 어플리케이션은 시각적인 정보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주요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사용자들이 공통점을 발견하거나 정보를 추론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 디자인 작업도 마찬가지다. 사용자가 결제를 완료하거나 특정 결과를 얻는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정보를 중심으로 UX를 설계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최근 금융 앱들만 봐도 하단에 공통적으로 바bar가 배치되어 있고, 메뉴 아이콘과 간단한 글씨를 통해 대략 어떤 메뉴인지 짐작할 수 있다. 버튼, 색상, 글씨, 그리고 시각적 레이아웃이 총체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사용자들은 이런 공통적인 요소 덕분에 앱을 사용할 때도 어느 정도 일관된 경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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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각각의 어플리케이션을 보이스오버로 사용해 보면 어떨까? 금융 앱, 배달 앱, 쇼핑 앱 등 여러 종류의 앱을 비교하며 보이스오버로 정보를 들어볼 때, 시각적 요소가 사라진 상태에서도 동일한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일관성이 거의 없다. 분명 시각적으로는 비슷하게 보인다. 하지만 보이스오버를 활용해보면 각 앱마다 음성으로 읽어주는 부분이 제각각이다. A 다음에 B, 그리고 C가 나와야 하는데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방향을 예측하기가 어렵다.
시각적으로 정보를 얻는 사람들은 수십 가지 앱을 사용하면서 공통된 패턴과 느낌을 축적한다. 대부분의 앱들도 정말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공통적인 레이아웃과 사용성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비슷해 보이는 앱들도 보이스오버로 읽을 때는 전혀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보이스오버가 가장 먼저 읽어주는 내용은 경우에 따라 광고일 수도 있고, 상단 메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금융 앱은 '송금, 대출, 쓴 돈' 순서로 정보를 전달하지만, 다른 앱은 '금융거래정보제공 동의, 기한 만료 정보' 등 그 정보가 사용자가 지금 선택하고 싶어하는지 아닌지와 관계 없이 상단에 배치된 순서대로 읽는다. 시각으로 앱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정보를 단번에 확인하고 원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런데 보이스오버를 사용하는 사용자들은 전체 구조를 한 번에 알아차릴 수가 없다. 처음부터 화면 끝까지 음성을 듣거나 내가 원하는 정보가 나올 때까지 들어야 한다.
이렇다보니 전맹 시각장애인은 앱을 사용할 때 공통되거나 축적된 사용자 경험을 가지기가 상당히 어렵다. 축적된 경험은 접근성의 좋고 나쁨과도 연결된다. 축적된 경험은 곧 익숙함이고 익숙함은 쉬운 사용성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A라는 제품이 사용자에게 익숙하다면 그 사용자에게 이 제품은 좋은 접근성을 갖춘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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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ple Developer 저렇게 - + 버튼으로 숫자를 조절하는 것이 스테퍼Stepper 인데, iOS에서 보이스오버 사용자들은 한 손가락을 위로 쓸어넘기는(스와이프Swipe) 동작을 하면 값이 증가하고, 한 손가락을 아래로 쓸어내리는 동작을 하면 값이 감소한다. 그래서 직접 버튼을 누르지 않고 쓸어넘기고 쓸어내리는 동작만으로도 값을 조절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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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축적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단 말인가? 최근 만난 카카오 DAO 김혜일 님은 'OS의 기본을 지켜야 한다'고 조언했는데, 그의 말처럼 애플 앱은 iOS 앱의 기본을, 안드로이드는 안드로이드 앱의 기본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iOS라는 오랜 기간 쌓여져 있는 사용 방식을 그대로 앱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야 축적된 경험이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숫자를 조절하는 방식이 있다. iOS에서 보이스오버 사용자들은 날짜나 시간의 숫자를 조절할때 수직으로 쓸어넘겨 조절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앱에서 수량을 조절하거나 할 때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넘기는 방식을 채택하면 일관된 경험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새롭게 설계된 앱에서 보이스 오버 사용자가 숫자 조절 시 +와 - 버튼을 찾아 눌러야 한다면? (심지어 +, - 버튼이 이미지로 처리되어, '이미지'로 읽혀버린다면?) 바로 이런 차이가 사용자 경험의 일관성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iOS의 기본 설정에서 ‘숫자 조절’이라는 작업을 손가락 쓸어넘기기로 처리했다면, 앱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기본 기기의 OS에서 앱으로 이어지는 사용자 경험이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결국, 사용자에게 일관되고 예측 가능한 경험을 지속적으로 쌓아주는 것이 접근성을 향상시키는 중요한 요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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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ple 보이스오버 사용자들이 자주 쓰는 로터Rotor 기능을 활성화하려면 화면에서 두 손가락을 돌리는 동작을 사용해야 한다. 이게 어느날 아무런 예고 없이 두 번 탭으로 바뀌었다면 어떨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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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업데이트시에는 어떤 부분이 변경되는 지 반드시 알려주어야 하고 가능하다면 핵심적인 사용성은 오랜기간 유지하는 것이 좋다. 어떤 OS는 업데이트가 될 때 치명적인 변화가 발생하는 데, 정보제공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보이스오버 전환하기 위해 세 손가락으로 탭Tap을 해오던 것이 갑자기 업데이트 이후 탭이 아닌 세 손가락 쓸어넘기기로 바뀐다던가 하는 것이다. 마치 네비게이션을 따라 길을 갔는데, 도로가 사라져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경험이라 할수 있겠다.
사용자에게 익숙한 방식이 예고 없이 바뀌면, 특히 접근성 기능을 활용하는 사용자들에게는 상당한 혼란이다. 그렇기 때문에 업데이트 된 정보는 사용자에게 반드시 명확하게 제공하고 충분히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 매 번의 업데이트가 사용자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축적된 경험을 사용자에게 쌓게 하는 과정임을 기억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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