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겨울.

1년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나라 계절이 언제부턴가 초여름, 여름, 초겨울, 겨울로 되었다지.

시골에 친가나 외가가 있는 사람들은 여름방학에 놀러갈 수 있어서 좋았겠지만, 도시민인 나는 기나긴 여름이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던 것 같아. 대신 겨울방학이 오면 난 신이 났어. 집 근처의 공터가 겨울 내내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하거든. 한달치 이용료 내고 아침부터 밤까지, 엄마가 잡으러 올 때까지 얼음판에서 스케이트 타며 살았다. 술래잡기, 다방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하며 동네 친구들, 오빠들과 신나게 지냈단다. 국민학교 고학년 내내 그리 살았으니 그 추억 때문에 마냥 겨울이 좋았어.

겨울에는 먹거리도 많아서, 내 생일이 들어있는 크리스마스와 새해에는 생일 핑계로 만들어주신 가래떡, 찹쌀떡, 팥죽을 만들어 저장해두고, 난로가에 모여 앉아 주전자에는 귤 껍질을 넣어 귤차 만들어 난로 위에 올려두고, 굳어버린 찹쌀떡, 가래떡을 구워먹던 시절을 생각하니 괜히 즐겁다.

성인이 된 후에는 산이 좋아서 겨울은 그저 쉬는 계절이었지만, 가끔은 겨울 산행도 꿈꾸긴 했어. 지금은 실내 스케이트장이 있어서 굳이 계절따라 가지 않아도 되지만 낭만이 좀 부족한 것 같네.

겨울만 기다리느라 봄꽃 구경 가을 단풍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나이 드니 꽃도 단풍도 이쁘더구나. 그러나 혼자 하는 구경보다는 주변이 아름답지 않아도 함께 하는 구경이 더 즐겁네.

얼마 전 겨울 한라산 등반 때 눈도 거의 없고 하루종일 비 맞아가며 정상에 올랐지만, 함께 하니까 힘들어도 기뻤던 것 같아. 이 추억 때문에 겨울이 더 좋아질 것 같아. 한라산 정상에서 잠깐 구름이 걷혔을 때 3초간 보였던 백록담은 정말 멋있었어!!!

내 꿈을 이뤄줘서 정말 고맙다.

엄마의 겨울 추억 회상 글에 무한도전의 명수는 열두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코가 빨개져서 해맑게 웃으며 오빠들을 쫓아다녔을 엄마를 생각하니 왠지 귀여워.

편지 내내 누군가와의 기억을 떠올리는 엄마를 보면, 엄마의 소중한 추억은 사건이 아니라 사람으로 꽉 채워진 것 같아. 홀로 따뜻한 여름보다는, 함께 추운 겨울을 더 좋아한 엄마니까. 그런 엄마가 10년에 달하는 기나긴 중국 생활 동안 얼마나 외로웠을지 이제는 조금 짐작이 가. 아무리 겨울을 좋아하는 엄마여도, 10년 간의 추위는 견디지 못했을 테지.

예전에는 사실 머리로는 알아도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했었어. 왜냐면 엄마도 알다시피 난 사람들 속에 있는 것보다 혼자 나만의 무언가를 하는 걸 더 좋아했으니까, 엄마도 나처럼 혼자여도 괜찮을 줄 알았어. 생각해보면 엄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못 본 것도 아닌데, 내가 원했던 엄마의 모습 속에 진실을 가둔 채 애써 외면하려 했나봐. 엄마를 존재 자체로 바라보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어.

어제 내가 좋아하는 영화음악감독의 곡을 연주하는 실내악 콘서트에 다녀왔어. 어릴 때는 독주회를 좋아했는데, 점점 실내악이 좋아지더라고. 연주자들이 서로 주고 받는 눈빛 속에 담긴 믿음, 연주 시작과 끝에 전해지는 미묘한 긴장감, 서로 다른 악기가 만들어내는 화음이 참 감동적이었어. 특히 홀로 뽐내지 않고 연주 내내 안정적인 음을 깔아주는 첼로의 소리가 참 좋더라고. 나도 이제 누군가와 함께하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아가는 것 같아. 혼자 잘난 것보다는 함께 어우러지며 같은 감정을 나누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해.

엄마랑 같이 한라산을 등반했을 때도 그랬어. 비록 종이인형같은 엄마의 몸짓이 걱정스럽기도 하고 엄마의 짐까지 드느라 몸은 힘들었지만, 엄마의 끈기에 대한 존경심과, 눈 속에 파묻혀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던 엄마의 모습과, 잠시 보인 백록담에 행복해하는 엄마의 표정이 기억 속에 깊게 박혀서 그저 감사한 마음만 들었어. 끝까지 힘을 내준 엄마와, 잠깐에 광경을 더 감동적으로 만들어줬던 뿌연 안개와,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어준 소복한 눈과, 이 모든 걸 느낄 수 있게 해준 내 몸에 감사해.

이 세상엔 감사한 게 참 많은 것 같아. 늘 당연하다고 여겼던 두 팔과 두 다리도, 수도꼭지만 틀면 콸콸 나오는 물도, 시간에 따라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주는 계절의 변화도 전부 다 소중하고 감사한 것들이야. 지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내가 잊어왔던 감사함들을 떠올리면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겨. 그리고 그 감사함은 결국 관계 속에서 발견되더라고. 나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더 나아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감사한 마음이 솟아나 나를 지탱해주는 것 같아.

엄마, 고맙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계속 엄마의 겨울을 즐거운 기억으로 채워주고 싶어. 겨울이 좋은 이유를 과거에서 찾지 않고 현재에서, 또 미래에서 찾을 수 있도록, 더 예쁜 눈꽃을 보여줄게. ❄️

아침과 봄의 기운을 얼마나 느끼는가로 건강을 가늠해볼 수 있다.

자연이 깨어나는 소리에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다면,

이른 아침 산책에 대한 기대로 잠이 깨지 않는다면,

첫 파랑새의 노랫소리에 더 이상 흥분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의 아침과 봄날은 지나가버린 것이다.

그런 변화는 맥박에서도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