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의 명단에 2022, 2023년 두 해 연속 이름을 올린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은 독일 정치인으로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과 제휴 관계인 범유럽 정당 유럽국민당(EPP) 소속입니다.
폰 데어 라이엔은 1958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13세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독일어·불어 이중 언어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부친이 식품회사인 발센의 최고경영자(CEO)로 선임된 뒤 독일 하노버 지역으로 이사했죠. 부친은 1976~1990년 독일 니더작센주의 장관(주 총리)을 역임했습니다. 부친 에른스트 알브레히트는 1980년 당시 CDU 의장이던 헬무트 콜의 지지를 받아 CDU 총리 후보로 출마했지만 경쟁자에게 패배했습니다. 부친은 1990년 선거에 다시 한 번 도전했지만 이번엔 나중에 독일 총리에 오른 게르히르트 슈뢰더에게 밀려 고배를 마십니다.
여담으로 알브레히트 가문은 하노버 왕국의 유력 가문으로, 알브레히트 가의 조상들은 17세기부터 의사, 법학자, 공무원들을 다수 배출했다고 합니다.
정계에 입문한 부친을 따라 벨기에에서 독일로 이주한 폰 데어 라이엔은 괴팅겐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당시 서독에선 공산주의자들의 테러 위협이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1978년 서독의 극좌파 무장단체인 적군파가 그를 납치할 것이란 소식을 접한 폰 데어 라이엔은 영국 런던으로 몸을 피했고, 가명을 사용하며 지냈습니다. 1979년 다시 독일로 돌아왔지만 귀국 후에도 몇년 간 경찰의 경호를 받아야했죠.
독일로 다시 돌아온 그는 하노버 의대에서 공부를 했고, 의사로 활동하게 됩니다. 1986년 실크 상인으로 큰 부를 축적한 폰 데어 라이엔 가문의 일원인 의사 하이코 폰 데어 라이엔과 결혼한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은 쌍둥이를 출산한 뒤엔 2002년까지 하노버 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죠.
폰 데어 라이엔은 1990년 CDU에 가입하며 정계에 입문합니다. 2003~2005년 니더작센주정부 장관을 역임한 그를 눈여겨 본 앙겔라 메르켈은 폰 데어 라이엔을 전격 발탁하죠. 2005년 폰 데어 라이엔은 메르켈 내각에서 가족청소년부 장관에 임명됩니다. 그의 화려한 경력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메르켈 정부의 핵심 인사 유럽 연합을 이끌다
폰 데어 라이엔은 2009년 노동사회부 장관에 다시 임명됩니다. 그는 보육원 확충, 상장사 이사회 여성 할당제 도입, 최저임금 인상 등 여러 사회적 이슈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보수 색채가 강한 CDU를 중도 노선으로 탈바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보수 성향인)당내에선 반발이 터져나욌고, 좌파로부터는 지지를 받게 되죠. 노동사회부 장관에 이어 2013년 폰 데어 라이엔은 국방장관에 임명됩니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폰 데어 라이엔을 차기 독일 대통령 후보로까지 고려했지만 당내 보수파의 반대로 인해 그는 결국 후보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폰 데어 라이엔은 동맹국들로부터도 그 실력을 인정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독일 언론 디 벨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모든 국방장관이 폰 데어 라이엔의 말을 경청한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한 때 나토 사무총장 후보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던 폰 데어 라이엔은 2019년 EU 집행위원장에 당선되며 최초의 ‘여성 집행위원장’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