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없는 아름다움을 마주할 때, 나는 불안하다. 특히나 시각을 자극하는 아름다움은 더욱이 그러하다. 아름다움이 발하는 빛은 이면에 어둠을 등지고 있을 텐데, 그 그늘의 흔적이 보이지 않을 때면 오직 끝없이 뻗으려는 빛이 향하는 게 허공 어디는 아닐까 전전긍긍한다. 어둠은 꼭 부정적인 의미만을 뜻하진 않는다. 그 가벼운 빛이 날아가 소멸하지 않도록, 지상에 찬찬히 안착하도록 돕기도 한다. 
윤라희 작가 작업의 첫인상이 그랬다. 여기서 어떻게 더 아름다울까 싶은 작품들에서 내 눈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보다 자꾸 미끄러졌다. 하지만 작가와 함께하는 시간과 대화가 쌓이면서 배운 것이 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수많은 이의 노력과 고민이 있었기에 그만큼의 아름다움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는 것. “제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아크릴이라는 재료보다, 그 재료를 다루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이와 같은 작가의 담담한 소회에는 미완의 무거운 블록들이 캐리어에 가득한 채 전시장과 작업장을 오가며 만들어진 전시장 이면의 장면이 늘 함께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 이경희
실제로 본 작가님 작업의 첫인상은 ‘흐윽, 너무 아름답다’였습니다. 작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는 무관하게 작가님의 작업에서 ‘예쁨’만을 기대하는 관객은 반가운가요, 혹은 그 반대인가요?
매우 적극적으로 ‘예쁘다’ ‘아름답다’고 반응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속으로만 생각하는 데 그치기도 하죠. 그런데 어느 것이든 그 반응을 저는 느낄 수 있어요. 그래서 어느 결이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시는 분들 모두가 저로서는 반가워요. 
그런데 제가 작업할 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내가 이 작업을 시작할 때 설레는가 아닌가’예요. 설레다 보면 떨림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 설레고 기대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제 작업을 보는 분들에게 기대하기도 해요. 그런데 그런 떨림 혹은 울림이 저와 관객 사이에서 이어진다면, 제게는 그것이 훨씬 큰 의미를 가질 것 같아요.

<Block(White)>, 2022 사진. 장수인

<Silver side Silver>
그 설렘을 유지한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걱정과 의구심도 동반할 테고요. 매우 다양한 분과 여러 차례의 공정을 컨트롤하시니, 각 단계가 흡사 수행자의 길과 같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통이 수반되긴 해요. (웃음)
작가님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관심 가진 다른 작가나 작품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Soft is Hard: Silver Edition>에 특별히 영향받거나 참조한 작가 혹은 작업이 있을까요?
저는 각 분야에 호기심이 정말 많아요. 건축, 패션, 사진 등... ‘나라는 사람은 하나에 집중해서 작업하는 데 무리가 있겠다’ 싶은 정도로요. 그런데 그런 저의 성향이 제가 사용하는 재료나 작업에 드러나는 것도 같아요. 
이번 전시에 국한해서 영향받은 작가를 소개하자면, 독일 출신의 사진작가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가 있어요. 그가 1992년부터 현재까지 <실버 웍스(Silver Works)>라는 작업을 시리즈로 하고 있거든요. 간단히 설명 드리면, 사진 작업에서 카메라를 버리고, 암실 속에서 인화지와 인화할 때 사용하는 은염과 빛을 재료로 삼아요. 그렇게 생긴 예측할 수 없는 얼룩과 솔리드 컬러로 추상적 이미지를 만들어요. 통상 작업과정에서 사고라고 여기는 오염을 작업으로 묘사한 결과물도, 실험적 출발로 오랜 시간 시리즈를 이어온 태도도 멋지더라고요.

Wolfgang Tillmans, <Silver 152> (2013) from Concrete
Column and Moon in Earthlight, Inkjet print on paper
 ©Wolfgang Tillmans, Courtesy Regen Projects

이번 전시를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팩토리의 <타임온테이블> 역시 작가에게 그런 계기가 되길 바라고요. 기존의 작업방식이나 태도에서 어떤 점을 뛰어넘고 싶으셨나요? 
먼저, 하나의 작업에 은색의 여러 재료가 총출동해서 모여 있는 밀도를 주고 싶었어요. 그게 제가 하던 작업과 SAA의 스크린 작업이 더해져 더욱 가능해진 것 같고요. 다음으로는, 제 작업이 다가가기 좀 더 쉬워 보이면 좋겠다는 것이었어요. 그 쉽다는 것이, 전시 내용이나 맥락이 아니라, 작업이 사용되는 지점에서 ‘예를 들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Silver side Silver>(왼쪽), <Silver corner Silver>(가운데), <Silver, Silver on Silver>(오른쪽), 사진. 정해민
작가님의 작업은 감상을 전제로 하잖아요? 사용이라고 하면 어떤 걸까요?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시도한, 기존 작업에서 살짝 뛰어넘은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프레임 혹은 벽에 거치할 수 있는 것을 함께 고민했다는 거예요. 전에도 생각은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만들어 선보인 것은 처음이에요. 제 작업이 어느 곳에 놓이건 상관없지만, 이번에는 프레임이나 거치대가 작품과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게끔 하고 싶었어요.
구체적인 장치를 보완하신 거군요. 작가님의 웹사이트에는 그간의 작업이 매우 아름답게 아카이빙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거든요. 그게 내 공간에 왔을 때 어떤 뉘앙스일지 감을 잡기 어려워요.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에서는 전시 공간 밖에서의 모습까지 미리 그려보고 시도하신 거네요.
아직도 실험하는 중간 단계이기도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사진으로만 보이는 것 말고 더 구체적인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Silver, Silver half Silver>(왼쪽), <Silver, Silver on Silver>(오른쪽), 사진. 정해민
전시 타이틀 <Soft is Hard: Silver Edition>에서 ‘실버’는 ‘은(銀)’이라는 소재의 고유 속성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은유도 담은 것 같아요. 부드럽고 잔잔해 보이지만 때로는 눈이 부시도록 날카롭고, 단단한 금속이지만 잘 굽어지기도 해서 어디에든 잘 활용할 수 있는. 이번 전시의 배경이 되는 마키시 나미를 비롯해 공동작업으로 동료가 된 SAA에서 마치 ‘은’과 같은 서로 다른 면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았다고도 하셨죠. 작가님이 닮고 싶은 태도의 밀도를 보여준달까요.
맞아요. 마키시 나미와 SAA와 같이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면, ‘이중성’이 떠오르더라고요. 말씀처럼, 부드럽고 잔잔해 보이지만 강인한, 강인하지만 또 유연한 태도요. 하나의 그릇 안에 같이 있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이미 두 가지가 같이 들어 있고, 심지어 자기 것으로 만들어 체화한 사람들. 
제가 다른 인터뷰에서 ‘침묵하는 진동’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그 진동이라는 게 우주에서, 우리 일상에서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리 현상이라고 해요. 가장 잔잔하지만 사실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들을 제가 닮고 싶었던 것 같아요.
윤라희 작가님과 SAA의 초기 아이디어 회의 때부터 ‘실버’를 향한 공통의 호감이 있었죠. 돌아보니 그간 SAA와의 작업은 어땠나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은색’은 빨강이나 노랑과 달리 물질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했고, 각자가 상상하고 마음에 품은 ‘은색’이란 것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해서 흥미롭기도 했어요. 
저는 은색을 염료(dyestuff)로 표현했는데, SAA는 안료(pigment)로 표현한 거죠.* 서로 다른 접근임에도 ‘실버’라는 것으로 조합이 되고, 하나의 작업 안에 혼종한다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그리고 SAA의 소통 방식과 아웃풋은 간결했어요. 무엇보다 깊은 고민 후의 단순함을 곧 아름다움으로 끌어낼 수 있는 분들이었기에, 협업과정은 꽤 즐거웠고요.
* 염료와 안료는 모두 색소에 속하나, 염료는 용매에 용해된 채로 사용하는 것, 안료는 용매에 분산시켜 입자 상태로 사용하는 것. 

인쇄 테스트를 위해 윤라희 작가와 SAA가 주고받은 이미지.
사진. SAA

그렇다면, 전시명에서 ‘silver edition’이라고 부제로 언급하신 것을 토대로 보면, 앞으로 다른 색의 시도도 기대해볼 수 있는 것일까요?
그동안 제가 했던 작업 안에서는 색이란 색은 다 다뤄본 것 같아요. 지금 전시 중인 작업이 무채색이고 유광도 아니니 비슷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수많은 색을 다뤄본 저로서는 하나의 작업 안에서도 여러 충돌이 느껴지거든요. 실제로 SAA에서 실크스크린 작업으로 마무리한 질감들도 느껴지고요. 그렇다면 다음 단계에서는 서로 이질적인 것이 합해졌을 때 강한 쾌감을 일으키는 색의 조합을 발견하고 싶어요. 자연에 빗대어 설명하면, 어둠이 깔린 밤의 숲을 걸을 때 갑자기 눈에 띄는 형광의 빛이랄까요.
작가님의 작업에는 다양한 기술자의 흔적도 함께 해요. 여러 공정을 오가는 이 작업의 배경을 상상하면 매우 다이나믹해요. 아크릴이라는 재료가 가진 잠재성을 끌어내고 가능성을 확대하기 위해 매번 새로운 실험을 하는 데서 여러 기술자의 생각과 언어를 배우고, 또 설득하는 일도 담겨 있을 테니까요. 늘 함께하는 분들과의 연대감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많은 경우에는 여덟 단계의 공정도 있지만, 제가 밀접하게 일하는 분은 약 다섯 분 정도 돼요. 각각의 성격이 다 다르신데, 염색 공장 사장님들은 제가 가면 ‘혈압약 먹어야겠다’고 하시기도 해요. (웃음) 제가 색상을 말씀드릴 때 ‘그 색 아시죠?’ 이런 식으로 던질 때도 있거든요. 
가장 오래 일한 분으로는 색을 봐주시는 분이 함께한 지 7년 정도 됐고, 아크릴 판을 생산하는 지방의 한 회사는 전 세계에 네 곳 정도밖에 안 되는 기술력을 가진 곳인데, 그곳 대표님은 단순히 기술이나 비용을 넘어 큰 조력자 역할도 해주세요. 그리고 제작 과정 중에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단계가 있는데 처음에 그 작업을 해주시던 분은 건강상의 이유로 더는 못 하시게 되었고, 이후 간절히 찾게 된 분은 매 단계를 연구하듯 임하세요. 새로운 기술을 위해 계속해서 실험하시거든요. 이런 분들을 보면 제가 매우 큰 행운을 얻었다고 생각하죠.
끝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더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저와 SAA가 실험적인 것을 추구했다는 게 느껴지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실험 대비 준비 기간이 많지 않아서 아쉬운 부분은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합을 맞추며 새로운 시도를 해봤다는 데 분명 의의가 있어요. 그리고 그런 기회를 주시고, 많은 대화를 나누도록 함께 시간을 보내준 팩토리에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시명  Soft is Hard: Silver Edition (Time on Table by FACTORY) 
작가  윤라희 w/SAA 
기간  2022.4.16(토) - 4.28(목), 화 - 일요일, 11 - 19시 (월요일 휴관) 
장소 팩토리2 (자하문로 10길 15)
중립적 태도를 지니며 유연하게 시각적 창작물을 표현하는 과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해 보는 것과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잘 표현해 내는 것, 그 가운데서 지녀야 하는 중심과 확장은 부드러우면서 동시에 강한 자립을 요구한다. 
색을 (직업적) 재료로 사용하며 색의 다양한 경험과 표현을 집중적으로 쌓아온 창작자는 이번 <Soft is Hard: Silver Edition>을 통해 색상을 구성하는 빛의 스펙트럼에 존재하지 않는, 색이라기보다는 밝고 어두움을 나타내는 음영의 은색(회색)을 표현해 보고자 했다. 은빛의 시각적 작업을 염료(침투)와 안료(표면 접착 및 발색)라는 서로 다른 방식을 취해 하나의 작업에서 만난 두 창작자는 색에 대한 정적인 저항을 보여준다. 
글. 윤라희 작업노트 중에서
은색은 색조, 명도, 채도로 이루어진 색의 구조와 다르게, 미세한 빛 입자의 반사(광도)로 표현된다. 인쇄와 같이 색을 옮겨 담는 과정에서 은색은 입자의 굵기, 잉크의 성질(유, 수성), 판법에 따라 여러 특징을 나타낸다.
<Soft is Hard: Silver Edition>은 공판 인쇄 기법인 스크린 프린트를 인쇄 매체로 하여 은색을 표현한다. 인쇄판 망사의 밀도, 잉크의 속성, 피 인쇄물의 관계를 조율하며 매끈하거나 거칠게, 얇거나 두텁게 잉크를 얹는다. 윤라희 작가의 작업이 갖는 투명함과 입체감은 은색 잉크가 얹히는 위치에 따라 더욱 다채롭고 깊은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아크릴이 갖는 약간의 불투명함은 뒷면에 인쇄된 은색의 질감을 흐릿하게 만들어 스틸 소재의 질감이 연상되기도 하며, 입체물의 상하좌우면 활용은 공간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은색으로 덮인 오브제는 각도에 따라 빛을 달리하며 잔잔하고 차가운 감정을 나타낸다. 아크릴 속에 부드럽게 번져가는 염료는 전면과 후면의 레이어와 만나 보다 거칠게, 혹은 밝고 어둡게 이면적 성질을 가지며 다양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은색의 오브제를 통해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시각적 표현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글. SAA 작업노트 중에서

윤라희
윤라희는 재료를 통해 시각적 창작물을 다루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다. 금속, 섬유, 도자, 목공을 아우르는 넓은 영역의 공예를 전공한 뒤 스튜디오를 열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작가는 특유의 섬세함으로 작품에 고유한 성격을 부여한다. 재료의 특성에 기반한 날것 그대로의 본질에 우연적 효과를 불어 넣어 불규칙하면서도 솔직한 방식으로 결과를 드러낸다. 다양한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은 작가의 손으로부터 한국의 소규모 공방 및 서울 도심의 특별한 엔지니어들과 긴밀한 협업을 거친 실험의 결과이기도 하다.

SAA
SAA(Screen Art Agency)는 스크린 프린트 기반의 프린팅 프로덕션 스튜디오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아티스트 및 갤러리 등 다양한 창작자와 함께 일하며 그래픽 포스터, 작품 인쇄, 전시 기획, 시각예술 전공자를 위한 프린팅 프로덕션 강의를 진행한다.

<타임온테이블>은 미세하고 사소하더라도 이전과 다른 태도나 시도를 고민하는 작가를 초대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작업실이 아닌 조금은 낯선 공간인 팩토리2에서 ‘지금 이곳에서 하고 싶은 것,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함께 탐험하며 작가에게 필요한 새로운 혹은 기존의 작업언어와 방식에서 확장한 작가와 작품의 이야기를 쌓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다양한 협업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 윤라희  2022.4.16(토) - 4.28(목) 
   <Soft is Hard: Silver Edition>
+ 이소영  2022.4.30(토) - 5.15(일) 
   <신종>(New Species) 
+ 차승언  2022.5.19(목) - 6.10(금) 
   <Your Majesty. Circles, triangles and squares are yours too.>(아버지. 동그라미, 세모, 네모도 당신 것입니다.)

기획 팩토리2 
에디터 뫄리아
진행 김보경, 이지연
디자인 김유나 (유나킴씨) 
디렉터 홍보라 
팩토리2 드림
팩토리2
factory2.seoul@gmail.com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10길 15 02-733-48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