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잊지 못할 최고의 여행지에 대하여
2024.3.31. 열다섯번째 이야기
70대 아버지, 30대 두 딸이 함께 같은 주제로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
땡비에서 나눠볼 오늘의 이야기는 🐝최고의 여행지입니다. 여러분에게 최고의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언제든 머리 속에서 한 번씩 꺼내어 보는 여행지로 달려가 글을 써내려 보았습니다. 오늘 땡비와 함께 여러분 마음 속 최고의 여행지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했으면 좋겠습니다. 💌
구름 옆에 서서 (by. 못골)

 

아침에 예약해 둔 밴을 타고 그로스 글로크너 하이 알파인 로드산(3,500m)의 정상을 넘었다. 한국에서 어느 산이든지 차를 타고 오른 적이 있는가? 차를 타고 등반할 생각을 아예 해 본 적이 없다. 외국여행이라는 특수한 경우라 하지만 차를 타고 산을 오르니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옆에는 오토바이와 자전거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오토바이로 이 산을 오르는 것을 살아가는 목표 중에 하나로 잡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생존이 급급한 우리들의 생활목표와 취미에 삶의 의미를 두는 이곳 사람들과는 인생에 걸어보는 가치에 많은 차이가 있다.      


넓고 아름다운, 그리고 자원이 풍부한 나라를 모국으로 하여 태어난 아이들과 온갖 고통을 견디며 아웅다웅 살고 있는 좁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환경이 너무 다르다. 그 속에서 살아가며 갖추어지는 인성도 다르리라. 자신이 선택해서 태어나지 못하니 어찌하겠는가? 그 또한 운명인 걸 아차차! 가벼운 여행에 너무 무거운 생각을 하나보다.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떨치고 차창 너머로 깊은 계곡을 보고 눈을 들어 하늘로 시선을 옮긴다. 멀리 봉우리마다 덮여있는 빙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정말 알프스에 왔구나! 우리나라에도 보은 말티재처럼 지그재그로 능선에 길을 만들어 산을 넘는 특이한 곳이 있긴 하지만 이곳과는 그 크기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내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보니 젊은 청춘 남녀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남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맞춤을 하고 있다.


청춘은 참 좋은 시절이다. 젊음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멋지다. 젊은 그때는 힘들고 괴로운 일도 지나고 보면 아련한 추억으로 각색된다. 그래서 우리는 젊은 시절의 어려운 시기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남자에게 매달리듯 여성이 남성을 안고 있는 그 모습이 애처롭다. 순간이라도 그 느낌이 전해온다. 아름다운 청춘을 찰깍하고 담았다.


정상에 오르기 전 차를 멈춰 여러 번의 촬영 기회를 안내 기사가 제공해 주었다. 배경, 배경처리가 중요하다. 염두에 두고 광각의 효과를 최대한 살리기 위한 위치 잡기에 집중한다. 넓고 광활한 배경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인물의 크기가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거나 잘리거나 하면 안 된다. 땅에 발을 딛고 선 전신이 작게 나오는 연출이 가장 효과적이다. 정상에 오르니 여기저기 꽃이 있다. 14-24 렌즈가 필요한데 없다. 없어서가 아니라 힘에 부쳐 장비를 휴대하지 못하니 좋은 시절은 정말 가버렸다.


우리나라의 용담 비슷한 꽃들이 여기저기 있다. 산이 높아서 머리 위에 구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눈높이 방향으로 있다. 하늘에 솟아있는 인물처럼 배경에 구름이 있다. 구름 밑으로 흰 빙하가 놓여 있고 그 빙하가 녹아서 계곡을 이루며 아래로 녹색의 빙하수가 흐른다. 그 흐른 빙하수가 모여 정상에 호수를 이루고 호수 물이 다시 아래로 흘러 내를 이루고 거대한 빙하호를 형성한다. 빙하에 깎이고 깎여 정상의 봉우리들이 칼날처럼 예리하다. 산 정상 한참 아래까지 있었던 빙하가 온난화로 녹아서 정상 부분에만 남아있다. 어느 해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10m 이상 적설이 되어 3개월 동안 눈을 치우는 작업을 했단다. 여기는 눈을 치우기 위한 제설 중장비가 산굽이 중간중간에 준비되어 여름에도 그대로 놓여 있다. 강원도 양구에서 34 OP 군대 생활할 때 제설작업으로 겨울 내내 하루를 보내던 시절이 생각났다. 관광객을 위한 망루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풍경을 배경으로 인생 사진을 담아냈을까? 내가 앉아 사진이 되고, 화석이 된 이 자리에 나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앉았다 갈 것이다. 이 벤치도 밤, 낮으로 바람과 눈, 비에 침식되며 세월이 흐르겠지! 다시는 못 올 이곳에 한 번 앉았다가 가는 이 보잘것없는 행위로 이 자리에 이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참 인연이란 묘한 것이다.


여행은 사고하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이 중요하다. 주변의 풍광보다 오히려 내면으로 향하는 삶에 대한 질문이 더 많이 만들어진다. 각자에게 각자의 여행패턴이란 말이 그런 의미인가 보다. 반나절을 그로스글로크너하이 알파인 로드를 관람했다. 내려오며 보니 그 높은 봉우리까지 나이도 내 또래의 노인이 자전거로 3500m 산 정상을 향해 헉헉거리며 열심히 페달을 밟는 모습이 대단하다. 30분 여유시간을 미리 사용해 버렸는데도 밴 운전기사는 몇 번의 촬영 기회를 더 제공해 주는 친절을 보였다.


속물은 할 수 없나보다. 승용차를 제공받는데 비용을 얼마나 많이 주었을까? 억수로 비쌀 것 같은데....! 우려와 함께 궁금증이 발동하지만 물어볼 수 없다. 딸에게 물으면 또 불필요한 걱정을 한다며 타박이 돌아올 게 뻔하다. 입 닥치고 9월에 눈과 얼음으로 덮인 산을 가까이서 만져보고 옆으로 뜬 구름을 바라본 것만으로도 이곳에 온 가치는 충분하다.

그날의 푸른 제주도(by. 흔희)


24살. 다른 사람보다 입학이 늦었던 나는 당시 대학교 3학년이었다. 그때의 나는 학생회 활동으로 학과 생활에 열을 올리며 각종 행사에 활발하게 참여하던 중이었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동시에 낯선 자극이 주는 충만함과 헛헛함에 내 안의 무언가가 고갈되어 가던 시기를 보내고 있기도 했다. 분명 학교 생활이 재미있는데 또 재미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2학기를 시작한 9월의 초입. 아직 늦여름이 가을에게 자리를 넘겨주지 않고자 안간힘을 쓰던 날이었다. 17살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주도에 가자고. 그들은 "내가 일주일에 4일을 등교하니 목요일에 수업을 마치고 바로 떠나자"고 제안을 했다. 그렇게 연락 온 날이 화요일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비행기를 한 번도 타 보지 않았다. 과외를 하고 있었지만 그 돈은 취직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잠깐, 망설였지만 그냥. 깊게 생각하지 않고 무언가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서로를 잘 아는 우리 셋이 떠나는 여행이라면 그게 어디라도 함께하고 싶었다. 떠나자고 했다. 수요일에 친구 2명은 바쁜 나를 배려하여 여행 계획을 세웠고 "여행 경비만 계좌로 보내라"고 하였다. 정말 돈만 보냈다. 제주도에 간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냥 비행기에 올랐다.


대개 친구들과 여행을 가면 예쁜 사진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옷도, 화장도 한 껏 꾸미고 나간다. 하지만 그날의 여행은 달랐다. 그냥 다 내려놓고 만나자는 생각이 들었다. 앞머리를 핀으로 씩 꽂고 렌즈 대신 안경을 끼고, 가장 편한 복장으로 공항으로 갔다. 보아하니 친구들도 나와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서로 구구절절하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때의 우리는 다들 각자의 전투를 치르고 지쳐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먹을 무언가를 찾듯이 우리는 허기진 마음을 끌어안고 서로를 찾아 한 자리에 모여들었다. 거지꼴을 한 여대생 세명은 제주도에 떨어지자마자 갈치조림을 맛있게 한다는 기사식당에 가서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그때는 올레길이 막 유명해지기 직전의 시점이었다. 여대생들이 흔하게 묵는 곳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하루에 3만 원짜리인, 올레꾼들이 모인다는 모텔을 숙소로 잡았다. 코스가 세세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중섭 미술관을 갔었고 '게 짬뽕'을 흡입하며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바다를 배경으로 걷고 또 걸었다. 숲길로 들어서자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왔다. 기분이 좋았다. 내가 먼저 노래를 흥얼거렸다. 앞서 걷고 있던 친구가 그 노래에 맞춰 춤을 추다가 넘어져서 한 바퀴를 굴렀다. 그 모습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었다가 말이 없어졌다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우리는 서로의 등을 바라보고 묵묵하게 길을 걸었다. 앞서 걸어가는 네 등이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게 보였다. 가쁘게 차오르는 숨소리에서 무언가를 무던히도 견디며 앞을 나아가는 네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아마도 입술을 꽉 다물고 다부진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겠지.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게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함께.


드디어 코스의 최종 목표점을 목전에 뒀을 때, 나와 친구 한 명의 장에서 신호가 왔다. 점심때 먹었던 '게 짬뽕'이 문제였다. 사실 그전부터 올레길을 걸으며 화장실을 기웃거려 봤지만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한계치에 임박한 내가 말했다. “나, 더 못가.” 그 말을 듣고 뒤돌아보던 친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택시 잡아라.” 그 누구를 향한 탓함 없이 그렇게 우리는 완주를 눈앞에 두고 택시를 탔다. 이 장면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회자되는, 인생의 한 축이 되었다. 무뚝뚝함 속에서 묻어나는 진심이 드러난 날이 그날이었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몇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한 시절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망을 보유하는 것이다. 살면 살수록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시간이 바빠 예전만큼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점차 내가 알던 모습에서 조금씩 변해가는 너지만. 그래도 어떤 한 시절을 공유하고 함께했었다는 기억만으로도 나의 관계망은 인생의 한 부분을 소복하게 채워준다. 함께하는 세월이 더해가면서 서로의 늙음에 경애를 보낸다. 아무 계획 없이 훌쩍 떠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날이면 빙긋 웃음이 난다. 그 기억 속에서의 너희가 좋다. 그리고 그때보다 주름도 늘어났고 살도 쪘고 노화를 걱정하는 우리지만. 이제는 뭘 좀 챙겨 먹고 놀아야 한다며 만나는 자리에서 영양제를 한껏 꺼내 내 입에 털어 넣어주는 네가 있어 참 좋다. 


그렇게 나는 피천득이 말했던 것처럼 너희와 함께 점잖게 늙어가고 싶다.

출장과 여행 그 어느 경계에서(by. 아난)


직장에서 맺는 인간관계에는 늘 경계심을 바짝 세운다. 말이 돌고 돌아 비수가 되기도 하고 이해관계에 따라 급변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회사 동료가 “나 믿지 마. 술 취해서 나도 모르게 말이 새어나가서 너 발등 찍히면 어떡해."라고 말할 때 이해도 되고 씁쓸하기도 했다. 회사에서는 필요할 때만 육지와 연결되는 하나의 섬처럼 살아간다. 업무에 집중하고 회사에서 시간이 어서 끝나기를 바란다. 그런 내게 직장 동료와 생전 처음 가보는 미국에서 오후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4일을 봉사해야 한다면? 온몸을 에워싸는 불편함에 망한 여행지로서 기억에 남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지금 내게 어느 여행보다 강렬하게 긴 여운으로 남아있다.


회사에서 팀을 구성하여 출장 계획서를 내면 적절한 팀을 선정하여 1주일 동안 해외 연수를 보내주는 제도가 있다. 회사에서 근무연수도, 결도 비슷한 사람들과 한 팀을 만들었다. 선정 가능성보다는 가더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들과 가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가고자 마음먹은 행사는 미국 텍사스 주의 오스틴에서 열리는 ‘사우스 바이 사우스 웨스트(SXSW)’라는 행사였다. 우연히 친구를 통해 접한 뒤, 마음 한 켠에 언젠가 가보고 싶은 행사로 넣어두었는데 행사는 점점 성장하여 세계 최대의 콘텐츠 축제가 되었다. 작은 시골 마을의 음악 축제로 시작해 이제는 각종 영화와 TV 시리즈가 전 세계에 최초로 공개되는 장이다. 최첨단 미래 기술을 전시하고 연사들이 강연하며 다양한 산업 전체를 아우르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행사로 성장했다. 전시회인지 콘퍼런스인지 축제인지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행사다.


가겠다는 마음과는 별개로 문제는 행사 입장료였다. 모든 행사장에 입장 가능한 플래티넘 입장권은 무려 280만 원이었다. 1인당 300만 원 정도인 회사의 지원금이 대부분 사라질 판이었다.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행사 홈페이지에서 봉사자들에게는 입장권이 제공된다는 설명을 보았다. 무작정 행사 사무국에 '한국에서 가도 봉사에 참여 가능한지'를 메일로 물어보았다.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거늘 너무나 친절하게 답장과 함께 화상회의가 잡혔다. 그렇게 우리는 음악 축제에서 오후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4일 동안 봉사를 진행하고 플래티넘 배지를 받기로 확답받았다.


새벽 2시까지 꽉 찬 젊은이들의 패기로운 일정과 심사위원들이 '안 됐으면 어쩌려고 미국 사무국 측과 이렇게까지 해놨냐'라고 할 정도로 준비를 단단히 해놓아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우리 팀이 선정되었다!


우리는 가자마자 행사 규모에 압도되었다. 활자로 읽은 '도시 전체가 축제'라는 것과 그 축제의 현장에 들어가 있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발 닿는 곳마다 사람들이 행사 배지를 목에 걸고 돌아다녔다. 어느 곳에서든 음악이 흘러나오고 도시 전체가 행사 참가자들을 반겼다. 공식·비공식 장소를 구분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시내 식당, 호텔, 카페, 영화관, 바 도시 전체에서 축제가 열렸다. 굳이 통계와 수치를 내지 않아도 눈 돌리는 곳 어디에나 행사 참가자들이 있고 번성하는 도시의 활력이 곳곳에서 뿜어져 나왔다.


처음 가본 미국은 ‘네트워킹에 미친 사람들’로 가득했다. 음식 주문을 마치면 이름을 받아 적고는 어설픈 발음으로 우리의 이름을 불러대며 말을 걸어왔다. 행사 참가자들은 끝없이 명함을 주고받고 몇 시간을 서서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잠시 만난 사람과 대화를 끝내고 보면 어느새 그가 소개한 앱이 내 폰에 설치되어 있었다. 어느 상점에서든 점원들은 “오케이?”하며 괜찮냐고 물어왔다. 모두가 친절하고 호의적이었다.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토종 한국인인 나는 어설픈 영어로 답하려니 기가 쏙쏙 빠져나갔다. 내가 영어를 좀 더 잘했다면 더 깊은 대화가 오갈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쉬웠다.


행사의 슬로건이 ‘KEEP AUSTIN WEIRD’ 일 정도로 다양성에 열려있다. 슬로건의 의미처럼 ‘이상하고 괴짜스럽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이 도시를 받아들이고 존중하자’는 의미가 행사 전반에 뿌리내려있다. 수많은 백발의 노인들이 곳곳에서 같이 “락앤롤!”을 외치며 자원봉사를 했다. 백발에 인자한 미소를 띤 어르신과 무지개색 머리에 무지개색 옷을 입은 사람을 연사 대기실의 담당자라며 소개받을 때는 머리를 망치로 댕-하고 맞는 느낌이었다. 행사에는 모름지기 칼정장과 개막식 의전이 강조되는 경직된 행사 문화에 젖어 있다가, 어떤 모습이든 타인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즐거운 에너지로 일하는 열린 마인드가 정말 보기 좋았다.


‘어떻게 이렇게 세계적인 행사로 클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갖고 찾아갔는데 정답은 결국 사람이었다. 이 행사를 사람으로 치면 자기가 뭘 잘하는지 알고 그걸 자칭이든 타칭이든 강조하면서 계속 키워나가 성공한 느낌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인정하든 말든 자신들이 ‘전 세계 음악의 수도’라 외치며 도시만의 색깔을 강화해 나갔다. 어딜 가나 노래 부르는 바와 펍이 즐비하고 공항에서까지 라이브 공연이 이어질 정도로 도시 전체가 음악에 흠뻑 취해 있었다. 같이 일했던 자원봉사자들 중에는 개인 휴가를 내서 10년 넘게 행사에 참여를 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질문에 ‘재밌잖아!’라고 답하는 사람들이 정말 즐거워 보였다. 행사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우리가 짧은 시간 동안 행사를 제대로 보고 가지 못할까 봐 저마다 폰을 꺼내 자신들이 저장해 놓은 행사 정보를 알려주려 애썼다. 행사를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행사에 응축되어 처음 참가하는 사람들에게도 전달되고 그 사람들이 다시 이 행사의 팬이 되어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에너지를 양분 삼아 자연스럽게 행사도 도시도 성장해 온 시간들이 휘리릭 눈앞을 지나갔다.


새벽 2시에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때면 다들 말이 없었다. 귀에서 피가 날 지경으로 방방거리는 음악소리와 목이 매캐할 정도로 담배 냄새에 찌들어 돌아왔다. 음악이 넘쳐나는 골목을 지나기만 해도 다들 기운이 빠져 말없이 털래털래 걸었다. 그러다 숙소에서 귀하디 귀한 컵라면과 맥주 한 캔과 아이스크림을 펼쳐놓고 하루를 복기하다 보면 행복 가득한 기억이 저절로 살아났다. 계획서 PPT 마지막 장에 사진으로만 봤던 영화 행사장에 직접 갔을 때는 모두 벅차올랐다. 기대되는 내일과 이 기억을 추억할 먼 미래가 함께 존재했다.


무엇보다도 같이 이 시간을 공유하면서 꺼내 볼 사람들이 있다는 게 큰 힘이 되었다. 소문과 정치가 난무하는 회사 생활 속에서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코트를 벗고 편하게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회사란 자고로 할 줄 안다고 말하면 안 되고 전화받는 순간 담당자가 되어 내 이름을 불리면 안 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번 출장에서는 누구 하나에게 일이 몰리지 않게 서로 자발적으로 일을 나눠 가져가고 함께 모든 과정을 만들어 나갔다. 오스틴에서 자극받는 하나하나에 모두 같이 감탄하며 돌아가 무엇을 적용하면 좋을지부터 지금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내내 대화했다. 회사 생활에 회의감으로 가득 차 있던 시기였는데 역설적이게도 회사가 만들어준 멍석에 회사 사람들로부터 치유를 받고 희망을 보았다.


미국 오스틴에서 불살랐던 1주일은 출장과 여행 그 어느 경계에 걸쳐진 신기한 경험이었다. 업무적인 부분에서도 많이 배우고 새로운 문화권에서 충격과 자극을 얻었다. 회사 동료들과 함께 온 출장인데도 마치 친구들과 여행 온 것처럼 신나게 웃고 즐기고 행복한 추억을 많이 쌓았다. 내 인생 최고의 여행지에 직장 동료와의 조합은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는데 이번 출장을 계기로 관계에 대한 시각이 많이 확장되었다.


직장 동료든 친구든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한 망한 여행이란 없다. 

💌 지난 호 구독자 후기 (#14. 나의 해우소)
골때림님 : 읽는 것만으로도 같이 근심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어요. 저에게는 해우소가 있나 떠올려 보기도 했구요. 후련하기도 하고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하고 다양한 색깔의 글들을 읽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 땡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소개
 - 못골👨🏻‍🎨 : 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진을 찍어왔다. 한계를 넘어 뭐든 끝까지 가는 남다른 의지력을 지녔다.
 - 흔희👩🏻‍🎤 : 눈치를 보지않아 '인간 사이다'로 불리나 K장녀로 은은히 돌아있다. 직업 때문에 생계형 낱말수집을 한다.
 - 아난👩🏻‍🍳 : 목구멍 보이게 웃는 큰 리액션과 미친 에너지 때문에 '어린 짐승'으로 불렸다. 빵을 굽는 방구석 빵수니. 
오늘의 땡비 어땠나요?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읽으면서 머리를 스친 어떤 의견이든 편하게 남겨주세요!
땡비 이거 뭐야? 하며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다면 아래 구독 링크를 함께 나눠요!  
땡비
@ddbeeletter
수신거부 Unsubscribe
stibee

좋은 뉴스레터를 만들고 전하는 일,
스티비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