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양은 인생의 요행을 바란다
[단독] 중2 때 쓴 글 발견
  정확히 10년 전, 여름방학 때 구 단위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다른 학교에서 논술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멀지 않은 거리를, 내가 다니던 학교와 방향은 다르지만 거리 상으로는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거리를 번거롭게 지하철로 이동한 것이 기억난다. 그 때는 그게 유일한 가는 방법인 줄 알았지만 버스를 타도 되었고, 충분히 걸어다닐 수도 있었다 (어쨌든간에 지하철 역과 가까운 학교였다). 하지만 그 때는 그 주변의 길을 잘 몰랐고, 무엇보다도 스마트폰이 없었다. 지금도 논술 프로그램을 듣기 위해 같은 동네에 살던 애들과 함께 걸어가던 그 길이 기억난다. 골목길 한 쪽엔 식물이 무성한 담장이 있었고, 다른 한 쪽엔 작지만 어마무시한 냄새를 풍기는 생닭을 가공하는 곳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을 취급하는 가게가 있었다. 치느님의 원재료가 그런 수난을 겪어서 우리 집에 도착한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책장을 정리하면서 구석에 박아놓은 박스 안에서 그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 쓴 글들을 엮은 책을 발견했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이었기에 투명한 예산 사용과 시간과 노력의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만든 그런 류의 얇고 허접한 책이다. 책자와 글의 퀄리티와 별개로 10년 전에 내가 쓴 글이 이렇게 남아있다는 것이 징그럽고 신기했다. 초등학교 때의 일기는 귀엽기라도 한데 그건 다 어디가고 얘가 남아있는지. 신기함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내가 그들을 만나기 전에 쓴 글들도 있었다. 왠지 모르게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가 떠올랐다. 생활 반경이 겹치는 사람들이긴하지만 지인, 친구 또는 웬수가 되기 전에 우연히 그 사람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누비고 다닌 적이 있다니. 만약 이들 중 누군가가 성인이 된 이후에 이 책을 보고, 나의 글을 발견했다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교수님은 문제가 될만한 발언은 일기장에 쓰라고 하셨지]
  만나기 전에 스친 사람들은 대충 이러하다. 같이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학우 한 명과 나를 재수 없어 했을 것이 분명한 선배 한 병, 다른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같은 학원을 다니면서 친해졌고 아직까지도 꽤 친하게 지내는, 고3 수험생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 한 명. 다른 고등학교를 다녔는데도 이상하게 눈이 맞아서 사귀었던 개쓰레기 한 명. 이름이 같은데 둘 다 공부를 꽤 잘 한다는 그 당신엔 꽤 짜증났던 이유로 자주 비교당했던 학우 한 명. 심지어 그 친구는 명석함과 총명함이 느껴지는 글을 2~3편이나 실었다. 다른 아이들이 1편의 글을 실을 때 여러 편의 글을 써오는 야심참이란. 누군가가 그의 글을 봐주었는지, 그랬다면 얼마나 봐주었는지는 내가 알 길이 없지만 어찌되었든 여러 편의 글을 쓴 것에서 그 나이 또래의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이 가지고 있는 욕심이 느껴졌다. 

  내가 쓴 글은 잘 쓰진 못했지만 지금과 어투가 상당히 유사하고 생각이 재미있었다. 쉼표를 과하게 많이 찍은 것을 통해 지도 교사의 최소한의 첨삭도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제목은 얼마나 성의 없고 구린지 모르겠다. 지금도 제목 짓는 것을 어려워하고, 좋은 제목을 뽑아내진 못하지만 세상에... 참 나 제목 짓는 법이라도 알려줬다면 좀 좋았을까. 대충 글들을 보니까 교육청 필독서를 읽고, 독서토론과 토론을 한 것 같은데 말이지. 프로그램의 일환이자 결과물로 책을 만들기 위한 글을 써오라고 시켰으면 최소한의 첨삭과 제목 짓는 건 좀 도와줬어야 되는 거 아닌가?
[아까 말한 또다른 혜지]
  여러 편의 글을 실었다는 나와 이름이 같은 그 친구. 그 친구가 쓴 글과 글의 수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예상 밖의 경로로 공동지인이 있었고, 이름도 똑같은 데다가 둘 다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어서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제3자에 의해 자주 같이 묶여서 발화의 주어가 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범생이로써 학생의 역할에 충실한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그 당시에 대학을 잘 가야된다는 압박감과 승부욕이 있었다. 그 친구에게 어떤 좋은 감정도, 어떤 나쁜 감정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관심도 없었지만 비교를 당하게 된 순간, 나는 그 친구에게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 친구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던가, 그 친구를 아니꼬와했던 것은 아니다. 그냥 남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오징어 땅콩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 친구와 나는 다른 고등학교를 갔다. 그 뒤로 거의 소식이 끊기다시피했는데 인터넷 연결망의 발전으로 소셜 미디어에서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어떻게 살든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20대 초반의 입시제도에서 갓 벗어난 나는 그 친구가 어느 대학을 갔는지가 궁금했다. 속물적이지고 유치하지만 시험만 봤다 하면 ‘누구누구는 잘 봤대?’ ‘누구누구는 몇 점이래’ 라는말을하던 6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때였다. 게다가 공부를 잘 했던 친구라 그 친구의 입시결과에 대한 기대감이있었다. 나도 엄청난 학벌의 소유자는 아니기 때문에 남의 학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상당히 조심스럽고, 타인의 노력에 대해 감히 평가하고 싶지도 않으며 대학의 이름이 인생의 전부도 아니고, 입시에는 운빨의 작용도 큰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친구가 어느 대학을 갔는지가 궁금했다. 

  이런저런 글과 사진을 종합했을 때 소위 말하는 좋은 학교에 가진 못 한 것 같았다. 오지랖이 넓어서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새삼스레 입술이 바삭거리는 것을 느꼈다. 습관적으로 미관을 찌푸리면서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넣었다. 아쉬웠다. 남의 인생 내 알 바 아니고 그렇다고 내 친구도 아니지만 그래도 허구언날 비교 대상이 되었던 사람 입장에서 좀 그랬다. 학벌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친구는 훨씬 더 좋은 곳, 그러니까 최소한 ‘어디 다녀요’라고 말하면 ‘아 어디있는 학교?’라는 동네 이름이나 주변의 지하철역 이름 정도는 나올 그런 학교에 갈 줄 알았다. 그렇다고 그가 총명하지 않다는 뜻도 아니고, 그의 미래가 어두컴컴하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내가 보기엔 뭔가 씁쓸했다. 그 씁쓸함에는 나 자신에 대한 씁쓸함도 있었다. 나의 학교 성적과 성실함, 그러니까 내가 쌓아온 시간이 여러가지 이유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 할 수 있다는 씁쓸함이었다. 어느 순간 내가 걸어온 아스팔트 길이 뾰족한 돌들이 올라온 흙바닥이 될 수도 있다는, 어디 높은 곳에서 추락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자기 자비? 자애? 그거 다 기만이야!
  앞에서 중학교 2학년 때 쓴 글에 대해 잠깐 이야기했는데 요즘엔 10년의 시간을 역행하여 다시 그 때의 내가 된 기분을 자주 느낀다. 이런 기분이 정말 아쉬운 건 10년 전의 내가 더 똑똑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중2병에 걸린 멍청이가 된 기분이라니. 이 모든건 자괴감에서 시작했다. 어떤 일에 대한 보완점과 솔루션을 찾았다면 일단은 그 솔루션을 믿고 따르면서 더 알맞은 방법으로 수정하면 된다. 완벽한 솔루션을 찾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일단은 그냥 하는 것이 알맞은 상황인데 아 그럼 그냥 하면 되지 ‘왜 나는 이런 것도 못할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자괴감과 불안감과 우울함을 느끼며(<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라는 책이 있던데 말이다… 조만간 읽어봐야지…) 유튜브에 완벽주의를 검색해봤다. 흠 뭔가 부족했다. 그래서 ‘비교’를 검색해봤다. 대부분의 영상이 열등감을 다루고 있었다. 신기했다. 내게 비교와 열등감은 항상 별개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열등감은 대상이 명확하다. ‘난 누구누구에게 열등감을 느껴’ 라고 말할 수 있는 영역이다. 하지만 나는 대상을 정해놓고 내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다. 아주 사고회로가 스크류바와 회오리감자가 자식을 낳으면 이렇게 베베 꼬였을까 싶을 정도로 꼬여있어서 타인의 장점은 어떤 부분에 있어서 내가 당연히 갖추어야 되는 기준이 된다. 남의 단점엔 인성에 하자가 있거나 인상과 느낌이 쎄-하지 않은 이상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어쨌든 단점보다는 장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장점을 인지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자신에게 ㄱ부터 ㅎ까지, 온갖 잣대를 들이내민다. 

  예를 들어서 어려운 책을 많이 읽는 친구를 보면 나도 저런 책을 더 읽어야 될 것 같다. 마른 친구를 보면 ‘아 저렇게 날씬한 애들도 있는데 내가 이걸 먹어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작년 초에 비해서 4킬로그램이나 살을 뺀 상태인데도 말이다(그치만 살을 빼려고 뺀 것이 아니라 집에만 있으면서 운동하고, 깨끗한 식습관을 유지하며 외식을 안 했더니 살이 빠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을 알지만 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러니까 사람들을 만나고, 커리어를 쌓고, 돈을 벌려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될 것 같다. 나의 친구들이 이런 것과 상관 없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가슴 깊숙히 느끼는 데에도 말이다. 내가 가진 장점은 장점이라기보단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이 응당 갖추어야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장점은 그냥 당연한 것, 조금 더 발전시켜야되는 것,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열심히! 발전! 시켜야 되는 것! 이라고 생각하니 머리가 터질 수밖에. 
[아이고 숨 찬다]
  일 잘 하고 지적인 것은 당연하고, 매일 시사매거진이나 영자 신문, 책을 꼼꼼히 읽고 이런 쟁점들에 대한 의견을 가져야 되고, 예쁘고, 날씬하고, 영어는 기본에 제 2 외국어까지 능숙하게 해야되며, 옷도 잘 입고, 센스 있고, 좋은 취향을 가져야 된다. 한 마디로 19세기 사실주의 소설에 나오는 살롱의 주인인 귀부인을 꼬시는 똑똑하고, 능력있고, 야심차고 얼굴 반반한 사교계의 뉴페이스 같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만 같다. <적과 흑>이나 <마담 보바리>나 <고리오 영감>에 나오는 그런 인물들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저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저 모든 것을 다 하는 능력자들은 세상에 아주 많다. 얄미울 정도로 많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한 번에 저 모든 것들을 다 해낼 수는 없다. 적당한 시간 분배도 해야될 뿐더러 하나 어느 정도 완성하고 다른 거 하나 완성하는 거다. 아마 다들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약한 어린 양에게 너무 많은 짐이 지어진 것이 아닐까 싶지만 많은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어린 양의 숙명이다. 

  어떤 심리학 교수님께서 원래 사람은 장단점을 적어보라고 하면 장점보다 단점을 많이 적는다며, 장점과 단점을 2:1의 비율로 써보라고 히셨는데 이미 너무 비비(크림) 꼬여버려서 ‘그건 기만이야!’를 외쳐버렸다. 자신의 성과와 노력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너무 대단하다. 어디선가 ‘바쁜거 티 내는 사람은 참 별로야, 안 바쁜 사람이 어디있어’ 같은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인 뒤로 무대에선 우아하지만 보이지 않는 엄청난 노력이 일상인 발레리나 같은 인간상을 추구하게 되어서 이런 자랑이 조금 더 힘든 것 같기도 하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그래도 최근에 친한 지인이 ‘혜지씨는 여유와 알참을 둘 다 가진 사람이예요’ 라는 엄청난 칭찬을 해주셨으니 뭐, 이래저래 반은 성공한 것 같다. 또 다른 지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나보고 욕심쟁이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욕심을 버리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아서 그걸 놓을 수가 없다. 일단 마음을 가라앉혀보고자 1년리 멤버쉽을 결재해놓은 명상 어플 마보에 ‘욕심’ 이라는 키워드를 찾아봤다. 말도 안 돼, 아무 콘텐츠도 나오지 않았다. 인간의 욕심이 하늘을 찌른다는 것은 명상 어플도 인정하는 세상의 진리인 것인가? 
미루기의 미학
  구독자 여러분들이 다들 아시다시피 2주 전 일요일은 나의 생일이었다. 과분할 정도로 생일 선물을 받았는데 이 선물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또 너무 신기했다. 왜냐하면 내가 구매를 미루고 있던 물건들을 꽤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스템리스 와인잔 구매를 미루고 있었는데 스템리스 와인잔 세트를 받았고, 여름 잠옷 구매를 미루고 있었는데 여름 잠옷을 받았다. 심지어 인스타그램에서 무라노 유리잔을 보고 '오 예쁘네! 다음에 다시 봐야지!' 해놓고 잊고 지내던 물건을 선물로 받았다! 와인잔을 제외하고는 어떤 물건에 대한 언질도 없었는데 말이다. 

  우리 집 옥상에는 매년 이맘 때마다 채송화가 가득하다. 며칠 전에는 꺾인 채송화 한 송이를 주워다가 책상 위에 올려놨는데 피었던 꽃봉우리가 닫혔다가, 봉우리 옆에 달린 씨주머니가 터져 책상에 씨를 흩뿌렸다. 이 꽃은 이제 운명을 다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도 버리는 것을 미루고 있었는데 세상에 꽃이 다시 폈다. 물에 꽃아준 것도 아니고, 그냥 주워온 그 상태로 방치해두었는데 말이다. 

   미루기라는 수동적이고 비생산적이며 쓸모없는 행위만이 가져다주는 우연의 아름다움과 감격스러움이 있다. 누구 노래처럼 달에도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듯이. 

[기린의 탈이라도 써보고 싶다]
  가장 최근에 나온 '영혼의 노숙자' 에피소드를 통해 팟캐스트 '밀림의 왕' 을 알게 되었다. 밀림의 왕은 사자이다. 또한 일을 끝까지 미루는 진행자와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학원 졸업 논문 쓰는 것을 미루고 있기 때문에, 논문 완성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인데 6주 동안 열심히 녹음만 하고 계신다. 

  이 팟캐스트 덕분에 동아사이언스에 기재된 '박진영의 사회심리학 : 우리는 왜 '미루기의 달인'이 되어가는가' 를 일었다. 사람들이 일을 미루는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에너지와 체력의 고갈'과 '자기자비'였다. 전자는 다들 대충 이해할 것 같다. 후자에 관한 내용은 자기 자비심이 높은 사람일수록 이래저래해서 일을 덜 미룬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 자비를 검색해서 설명도 읽어보고, 테스트도 해봤는데 세상에 '자기 친절' 점수가 25점 만점에 9점이 나왔다(...) 여기를 누르면 설명글과 함께 테스트지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당장 내일부터 루틴을 다시 짜보려고 한다. 자기 친절점수 9점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게 너무 팍팍한 루틴을 짰던 것 같다. 그러니까 당연히 쉽지 않았고! 이번에는 선택지를 주는 쪽으로,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하루가 아닌 나의 신체리듬에 잘 맞는 쪽으로 루틴을 짜보려고 한다. 일주일동안 최대한 열심히 해보고 다음주에 꼭! 경과를 보고하겠다. 혹시 만들고 싶은 루틴이나 습관이 있는 구독자분들은 괜찮으시다면 이 링크를 타고 들어가서 본인의 계획이나 결심을 공유해달라. 일단은 계획만 접수하고, 추후에 결과에 대한 폼을 다시 보낼 예정이다. 
PRIDE MONTH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퀴어 콘텐츠 소개를 까먹었더라... 프라이드 먼스를 기념하는 마지막 퀴어 콘텐츠는 우리에게 티모시 샬라메와 놀던 이태리 써머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가 제작한 HBO 시리즈 <위 아 후 위 아>다. 루카 감독 특유의 햇빛 가득한 색감은 아니지만 있지도 않은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아름다운 하늘색과 회색을 느꼈다. 시리즈에 사용된 블러드 오렌지의 음악은 또 얼마나 세련됐는지! 

  제목에 걸맞는, 그러니까 어떤 타이틀이 붙든지간에 사랑은 사랑이라는 메세지를 전하는 귀엽고 따뜻한 성장드라마다. 예민하고, 항상 투덜거리지만 섬세하고 귀여운 인물과 강하고 차분하면서 사랑스러운 인물이 주가 된다. 아 참! 발행인이 좋아하는 클로에 세비니도 나온다! 왓챠에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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