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96회 (2023.03.22)
  

안녕하세요, 만화 그리는 난다입니다. 만화를 그리다가 문자 그대로 '아무 생각도 안 나는' 상태일 때 종종 시집을 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자극이 필요할 때 산책이나 샤워보다 효과가 좋은 것이 시집인 적이 많았습니다.

성미정 시인의 시는 특히 '두뇌 재회전'용으로 성공률이 높아서 아껴 읽고 있습니다. 시인의 시집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에서 제 용도에 가장 적합한 시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난다 작가가 사랑하는 첫번째 시💘


오늘 밤 나는 고무머리 퐁타로* 같습니까? (성미정,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

 

퐁 하고 나는 밥상에 부딪혀 날아갑니다

퐁 하고 나는 책장에 부딪혀 날아갑니다

퐁 하고 나는 천장에 부딪혀 날아갑니다

 

우리 집구석은 서른하고도 여섯 평이니까요

 

퐁타로는 산꼭대기에 부딪혀 날아갑니다

퐁타로는 커다란 도깨비의 뿔에 부딪혀 날아갑니다

 

퐁 하고 가느다란 남자에게 부딪힌 나는

푸욱 하고 김이 새서 뿔이 납니다

 

퐁타로는 퐁 하고 분홍색 하늘을 지나

퐁 하고 푸른 밀림으로 날아갑니다

퐁타로는 퐁 하고 시원스레 바다 위를 날아갑니다.

 

퐁 하고 나는 김치통에 부딪힙니다

퐁 하고 나는 변기에 부딪힙니다

퐁 하고 나는 탁상 달력에 부딪힙니다

 

퐁타로는 고무나무에 도착하여

새근새근 잠든 시간에

 

창문 닫힌 집에서 하루 종일 날아다니다

타박상만 잔뜩 입은 나는 저녁이 오면

여기저기 쑤시지 않은 곳이 없어서

끙끙거리며 케이블TV를 봅니다

 

오늘 밤 나는 고무머리의 퐁타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집엔

라텍스 매트리스가 없으니까요

새근새근 잠들기는 글러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머리를 만져보니

말랑말랑 고무머리가 아닙니다

좁은 집구석을 날아다니다 여기저기

부딪혀서 혹만 잔뜩 솟아 있네요

 

오늘 밤 퐁 하고 나는 어쩌면

 

커다란 혹, 머리의 아줌마 같습니다

 

오늘 밤도 역시 시큰시큰 잠들 것 같습니다



* 일본의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초신타의 동화 퐁타로의 모험의 주인공으로 머리가 말랑말랑한 고무공 같아서 어디에 부딪히든 상처 받지 않고 자유롭게 날아다님.

이 시를 읽을 때 저는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이상한 물건들만 올려진 선반을 떠올립니다. 이상하고 웃기지만 거기에 있어야만 하는 단어들을 시인은 아주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서 올려두었습니다. 커다란 도깨비의 뿔, 분홍색 하늘, 김치통, 탁상 달력. 다 아는 단어들이지만 한 번도 서로 이어진 적 없는 단어들이 머릿속을 퐁타로처럼 뛰어다니며 새로운 생각들을 쏟아내게 만듭니다. 그럴 때 정말로 저는 고무머리 퐁타로처럼 머리가 말랑말랑해져서 다시 태어나는 기분입니다.


🤎막간 우시사 소식🤎
이덕규 시집 『오직 사람 아닌 것』 출간 💫
📬 이번주는 무슨 시집을 읽을까 고민하는
구독자님께 신간 소식 전해드려요!
  

인간 시선의 구석과 그 구석 속 존재들을 밝히고, 그들에게 시의 자리를 내어주었던 이덕규 시인이 네번째 시집 『오직 사람이 아닌 것』을 펴냈어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연 속에서 누구보다 묵묵히 생명답게 살아가는 존재들의 시적 정경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농부이기에 가능한 자연의 세밀화, 그 아름다운 시 세계로 구독자님을 초대할게요. 


"대부분 금세 지워지고 날아가버리지만
끝끝내 남아 있는 생각이 깊은 밤까지 발효되면 마침내 시로 익습니다."
💘난다 작가가 사랑하는 두번째 시💘

재경이 코딱지 엄마 코딱지 (성미정,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

 

코딱지가 너무 맛있어

딸기맛이 난다는 재경이에게

그럼 엄마 것도 먹을래 했더니

내 것만 먹을래 한다

 

분별이 생겼구나

다섯 살 사람 배재경

엄마 코딱지 제 코딱지

가리기 시작했구나

 

하긴 딸기맛이 난다는 너의 코딱지

엄마도 차마 먹을 수 없으니

2002년 5월 21일 엄마로부터 나왔으나

 

너의 코딱지는 너의 코딱지

엄마 코딱지는 엄마 코딱지

 

그 코딱지만한 거리를 확인한

오늘이 대견하고 왠지 쓸쓸하구나

아이를 기르고 있다보니 자식 얘기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식 웃긴 얘기에 눈물이 나고 자식 슬픈 얘기에는 더더 눈물이 나곤 합니다. 자신의 코딱지는 딸기맛이 나지만 엄마 코딱지는 먹지 않겠다는, 자신의 코딱지와 엄마의 코딱지가 뭐가 다른지 나와 타인을 알게 된 아이를 보며 시인은 분별력이 생겼음을 축하하면서도 쓸쓸해합니다.

얼마 전 저의 아이가 저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습니다. 열두 살이 되도록 아이가 저에게 아무리 상처를 줘도 상처를 받은 일이 없었던 건 아이가 항상 내 품안에 내 눈안에 있다고 생각해서였다는 걸 그날 알았습니다. 우리도 이제 각자의 코딱지를 수습하며 살아가야 하는 타인이구나 싶어 새삼 쓸쓸했지만 이 시가 웃겨줘서 고마웠습니다.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시믈리에는 양안다 시인입니다. 모든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한 꿈과 영원의 이야기, 다섯번째 시집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로 독자분들과 만나고 있지요. 양안다 시인은 어떤 시를 골랐을까요? 다음주에 만나요!


💌지난호 <우시사>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

💬 운명처럼 다가오는 문장이 있잖아요. 구독해놓은 지는 오랜데, 오늘부터 매일 읽을 거 같아요.
💬 김언희 시인의 작품은 시도해보려 하다가도 다소 가학적인 표현과 난해한 어휘들로 인해 포기하기 일쑤였는데, 이번 편을 통해 도전해볼 수 있게 되어 좋았습니다.

💚의견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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