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경아,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불안이 높고 자기 영역이 확실했어. 기질 검사를 하면 위험회피는 97%고, 정서적 개방성이 극단으로 낮으며 거리 두기는 또 극단으로 높게 나와. 그 유명한 MBTI 검사에서는 내향형이 85%이지. 기질이나 성격 검사 같은 걸 하면 중간인 항목이 별로 없듯, 나는 이런 검사 없이도 나를 파악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어. 나는 매우 내향적이고 불안이 높아. 내면은 문이 아주 작고 창문도 없는 이글루처럼 생겼지. 나를 아는 일은 어렵지 않았는데,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았어. 세상은 자주, 외향적이고 적극적이며 개방적인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곤 했으니까. 나는 부단히도 애를 쓰며 자랐어.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살아야 세상에서 살아남는다고 배웠어. 학교에서는 목소리를 더 크게 해야 한다고 들었고,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지. 엄마는 싫다고 말해야 한다고 했어. 그런데 나는 매번 목구멍에 돌처럼 걸린 그 말을 꺼내지 못했어. 엄마는 대응하지 못할 거면 최소한 걔들 앞에서 울지는 말라고 했지. 울면 지는 거라고 말이야. 울음을 참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였어. 성인이 되어서는 남을 속이는 능력이 조금 더 탁월해졌어. 외향인인 척할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는 키울 수 있었고 무섭지 않은 척도 이따금 가능했지. 불안해 보이지 않으려고 미리 많은 준비를 했어. 나는 늘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꼈어. 무난한 성격 덕분에 어디서든 집단에 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난 왠지 물에 섞이지 못하는 기름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어. 그런 나를 바꿔보려고 애를 썼고, 그럴수록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었던 것 같아.

 

     배우 짐 캐리가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더 이상 네가 만든 캐릭터로 살기가 힘들다며 몸이 보내는 신호가 우울증’이라고 말했어. 그런 이유로 내가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는 건 아닐지 짐작해 보았지.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살려고 노력하다가, 내가 가진 틀을 사랑하지 못하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하고 말이야.

 

     그렇다면 나는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가야 할까? 그래도 여럿이 사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사회가 요구하는 면모를 갖추려고 조금은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닐까? 아이들이 커가면서 다시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려는데, 일을 선택하는 부분에서 이런 고민을 많이 해. 사실 난 조직에 들어가 하는 일에는 용기가 안 나. 나는 늘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는 일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공황장애 때문에 더 겁이 나거든. 그렇다고 이렇게 집에만 숨어 있을 수는 없다고 어서 틀을 깨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나를 들들 볶는 일이 반복되고 있지.

     그런데 키오스크의 올가를 보고 뭔가 실마리를 얻은 느낌이었어. 출판사 책 소개에서는 ‘현실이라는 키오스크가 우리를 옥죄더라도’라는 표현이 있지만 실제 그림책 속 올가는 키오스크에서 불행해 보이지 않았어. 오히려 자신이 잘 아는 세계에서 편안해 보였지. 손님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것, 관광객들에게 척척 길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키오스크라는 세상에서 올가는 유능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존재라는 뜻이니까 말이야. 물론 이따금 답답하다 느낄 때도 있지만 올가는 키오스크에서 나가지 않아. 책을 통해 여행하고 그 휴식 시간을 행복하게 즐기지. 그러다가 ‘갑자기 올가의 세상이 뒤집혀!’ (p.16~17) 어찌 보면 불운하다고 할 수 있는 사고가 일어나지. 그런데 올가는 그 불운(?)을 기회 삼아 자신은 사실 어디든 갈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돼. 내가 이 그림책이 좋았다고 느낀 이유는, 키오스크에서 벗어나지 않고 산책하는 올가 덕분이었어. 지긋한 일상, 변화, 나아감을 생각한다면 많은 사람은 키오스크에서 벗어나는 것을 떠올렸을 거야. 하지만 내게 거기서 걸어 나와 산책하러 가는 올가는 현실적이지도 않고 식상해. 키오스크의 올가는 우리가 자신의 틀을 완전히 바꾸지 않고도,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틀을 유지하면서도 바깥세상, 동경하지만 감히 가보려고 시도해 보지 못한 세상을 볼 수도 있다고 말해줘. 내향인으로서, 특히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내향인으로서 내면에 갇혀 생활 반경과 경험의 범위가 작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굳이 나를 바꾸지 않고서도 어떤 세계로 가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어.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우연,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그 사고가 불운한 것이라고 해도, 어떤 전환점으로 만드는 힘인 것 같아. 사실 물건을 훔치는 아이들은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불운처럼 느껴지기도 하잖아. 그런데 올가는 그 사건이 아니라 자신이 움직일 수 있다는 깨달음에 집중하지. 평소의 나였다면 너무 화가 나고 무섭다며 그 자리에 다시 서서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아이들을 경계했을지도 몰라. 불운에 매몰돼 내가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올가는 달랐어. 올가는 컵에 물이 반이나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니까.

 

     삶은 두려운 것이지만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상처가 될 수 없다는 생각, 그것은 상처가 아니라 전환점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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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채현 님 께서 반려견에 대한 동화책을 추천해 주셨어요. 반려동물에 대한 경험이 없어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난다는 건 어떤 마음일지 잘 모르겠지만, 이 동화책은 식상하지 않은 전개와 절절한 감정선에 눈물 흘리며 읽으셨다고 해요.

'무뎌진 마음을 깨우는 기분 좋은 설레임'이라는 부제를 갖고, 겨울에 태어난 잡지 웩미업 vol.1에서는 12명 작가들이 글과 그림으로 전하는 겨울과 크리스마스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어요. 민영과 다경은 '겨울이면 그곳이 생각나'라는 제목으로 서로에게 편지를 썼답니다.😊

점점 깊어가는 겨울, 웩미업과 함께 더 따뜻하고 설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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