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메일을 열어주세요

독자님께,

6월의 첫 날이고, 휴일입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오늘은 제가 사랑하는 영희 씨에 대한 이야기로 편지를 꽉 채워 보았습니다.

편집에 공을 들여 만든 영상은 처음이에요.
편집은 즐겁고, 섬세한 일이었어요.
메일을 받아주시는 독자님 덕에 새로운 콘텐츠 제작에 도전도 하게 되니 기쁩니다.

요 몇 달 저는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할 때, 길을 걸을 때 자주 멍을 때리게 되었고, 몸이 힘들지 않아도 급격히 피로해지곤 했어요. 
몸 상태가 예사롭지 않아서 건강검진도 받고, 갑상선 검진을 추가로 받았는데 신체에 이상은 없었어요. 
영상을 편집하는 요 며칠은 멍때리는 날이 없었네요. 마음에 뭔가 비밀스러운 것을 품은 사람처럼 소심하게 기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답니다. 풍족하고, 충만한 한 주였네요.

언제 또 이런 여유가 제게 찾아와 영상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드는 내내 기뻤던 마음을 님과 공유하고 싶었어요.

오늘도 메일을 열어주어서 감사합니다.

님의 답장은 언제나 저에게 큰 힘과 응원입니다.

평안한 한 주 되세요!

2022.6.1 살살 드림

희를 처음 만난 건 그 여름 실외 주차장에서였다. 그녀는 그야말로 내 앞에 갑자기 툭 튀어나왔는데 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그녀를 보고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나와 너무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20년쯤 흐르면 내가 바로 저렇게 생겼겠구나, 예감하게 했다.

그 무렵의 나는 반복되는 최종 면접 탈락으로 대전에 내려가겠다 다짐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취준 2년이면 할 만큼 다한 것이라고 나를 독려했다.

희는 주차장에서 가장 커다란 차를 골라잡아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탈 건가요?”

처음 보는 희를 쫓아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는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탔다.


희는 차를 운전해 영종도로 향했다. 영종도에는 그녀가 소유한 커다란 별장이 있었다. 희는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물고 올 계획이라고 말했다.

희의 별장은 생각보다 더 커다랬다. 별장 바로 앞에는 바다가 흐르고 있었다. 통창 너머로 파도치는 바다가 보였다. 나는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워 바다를 보며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1층에서 희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1층으로 걸어 내려갔다.

커다란 식탁에는 그녀가 직접 만든 음식들이 고급스러운 접시에 담겨 놓여 있었다. 제대로 된 집밥을 먹지 못한 지 벌써 석 달이 되었다. 족히 며칠은 굶은 듯한 공복감을 느꼈다. 나는 수저를 들고, 밥 한 숟갈을 크게 떠 입에 넣고, 갈비찜과 김치를 욱여넣었다.

희는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른 나는 그제야 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다. 긴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뒤로 넘긴 모습이나 깔끔한 눈화장, 무언가를 응시하는 깊은 눈빛, 그녀는 나보다 고급스러운 인상이었지만 나의 이목구비를 빼다 박은 인상이었다. 순간 식탁 너머에 걸려 있는 작은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나는 식탁에 수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는 내 앞에 앉은 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희를 보며 물었다.

내가 원래 이런 얼굴이었나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거울을 올려 봤을 때 나는 이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희와는 그 별장에서 육 일을 함께 보냈다.

정확히 칠 일째 되는 날 새벽 목이 말라 1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는 휘갈겨 쓴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너는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될 거란다

 

희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옷과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주일이나 더 그녀를 기다렸다. 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희가 타고 온 커다란 차를 운전해 서울로 돌아갔다.

 

그때부터였다. 매년 초여름이면 이곳, 영종도 별장에 오게 된 것은.

나는 희가 내게 준 쪽지의 내용을 품고 산다.

 

  -너는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될 거란다

 

희의 방은 작고 작았다.
6평 방, 그중 삼 평이 그녀의 서재였다.
희는 그 방에서 85년을 살았다.

일곱 살이었던 그녀의 몸에는 커다란 화상 흔적이 났다.

모기장에 누워 보았던 풍경을 기억한다.
희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은 불이 붙은 모기장에 부채질을 했다.
날아 왔다.
펄 펄.

희의 방은 너무 작아졌다.
그리고 희가 기억하는 순간은 일곱 살 무렵 모기장 화재 사건뿐이었다.
그녀는 평생 부끄러워했던 화상 흔적을 사람들에게 내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자신의 삶을 망쳤다고 증명받기 시작했다.

우리 할머니 영희는

살면서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나와 닮았다.

나는 그녀의 60년 전 모습을 보고 기함했다.

사진 속 그녀는 지금의 나였기 때문이다.

영희는 책상에 앉아 시를 쓰고 있었다.

 

영희에게는 건물 한 채가 있다.

나는 살면서 힘들 때마다 영희의 건물을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영희가 쓰러진 이후로 그 건물은 처음부터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영희의 건물이 아니라 영희를 떠올리며 안도하게 됐다는 것을.


영희는 내가 지나갈 모습이었고, 지나간 모습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영희가 될 것이었고,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하루는 영희가 휴대폰 번호가 적힌 노트를 뒤적여 내 번호를 찾아냈다. 그무렵 영희는 기억이 깜빡깜빡해 평소 외우고 있던 내 번호를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수화기 너머로 밤새 잠을 설친 영희의 목소리를 들었다.


"요즘은 가만 누워 있으면 네 걱정 뿐이야. 밤새 왜 네 걱정을 했는지 모르겠다.

너는 벼락 같은 놈을 만나서는 안 된다.

글이란 기필코 적당히 써야 하는 법이란다.

끊자 그래, 그만 끊자.

이런 이야기는 오래 해서 좋은 법이 없지 않니."


영희는 내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란다. 

영희는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영희가 오래오래 살아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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