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에게 ‘사연’이 필요할까? : 어떤 서사

가해자에게 ‘사연’이 필요할까? : 어떤 서사

Living in the Aftermath of Tragedy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97), 2023.9.6,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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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가해자, 서사, 범죄, 변명, 진실

1.머리말

2.‘천사’같았던 나의 ‘살인자’ 아들 :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3.악인의 ‘변명’ 대신 ‘진실’을 끌어내라 : <약속된 장소에서>

4.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최근 강력범죄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악인의 서사1)’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 vs 악인에게도 서사가 필요하다!”라는 주장이 맞부딪고 있는데요.

우선 전자는 주로 범죄자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게 될까봐 경계합니다. 예를 들면 지난해 신당역 살인 사건 당시 한 서울시의원이 “좋아하는데 (피해자가) 안 받아주니 그런 것” 등의 발언을 한 것처럼요.(링크) 혹은 가해자의 변명을 그대로 전달하는 경우에도(“반말해서” “헤어지자고 해서”...) 피해자에게 원인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죠.

한편 “악인의 서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은 우리가 범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들에 대해 깊이 알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악인에 대해 “그런 괴물에 대해선 아예 몰라도 돼!”라고 하면 우리는 범죄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최근 이런 이야기를 담은 장강명 작가의 칼럼이 SNS에서 이목을 모으기도 했고요.(링크)

<fig.1> 지난해 서울시의회 시정질의에서 이상훈 서울시의원이 신당역 살인사건 가해자에 대해 “나름대로 열심히 사회생활했었을 것”이라며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까 여러 가지 폭력적인 대응을 한 거 같다”고 말해 논란이 있었습니다.(왼쪽) 세상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고, 각자의 서사가 있습니다. 만약 어떤 중요한 사건에 대한 ‘모두의 서사’를 만든다면 다양한 측면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죠. KBS, Unsplash

다만 저는 엇갈리는 주장들을 보며 문득 생각했습니다.

과연 이 두 주장이 완전히 정반대의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악인에게도 서사가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 가해자의 뻔뻔한 변명까지 옹호할 사람은 없을 것이며, “악인에게 서사가 필요 없다”라고 하는 사람 중에서도 괴물로 태어난 이들을 쓰레기통에 콱 닫아 넣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 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면, 진짜 문제는 악인에게 서사를 ‘줄지 말지’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어떤’ 악인의 서사가 필요한가?” 쪽이 아닐까요?

오늘 레터에서는 실제 강력 범죄의 ‘가해자 서사’를 다룬 두 권의 책 -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수 클리볼드) <약속된 장소에서>(무라카미 하루키)를 지팡이 삼아 ‘어떤’ 가해자의 서사여야 할까?에 대해 해찰해보겠습니다.

주로 책 속 ‘가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초점을 맞추어 읽어보았습니다.

1)‘서사(narrative)’란 “모든 종류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서술(조너선 갓셜)을 일컫습니다. 어떤 일, 사건들의 자초지종을 ‘통일성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것이 ‘빚어낸 서사’이고 통상 우리는 이런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주목을 하곤 합니다. 인간은 의식, 무의식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서사를 만들어내는 존재입니다.(Homo Fictus) 이 때문에 범죄 등에서도 우리가 누구의 서사를 ‘어떤 관점’에서 볼지가 아주 중요해지는 것이죠.

예를 들면 과거 얼룩말 세로의 동물원 탈출도, 그냥 세로가 잠깐 동물원을 벗어난 '사건'만 뚝 놓고 보면 ‘서사’라고 할 수 없겠지만 - 세로가 그 전부터 부모말을 잃고 초조해지고, 절망한 나머지 탈출을 감행했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순간 얼룩말 탈출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서사가 되는 것이죠. ‘서사’와 관련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읽어보고 싶으시다면 지난 레터를 참조해주셔요.(✉️얼룩말 세로의 서사, 사람의 서사)

【2.‘천사’같았던, 나의 ‘살인자’ 아들】

1999년 4월 20일,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 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열두명과 교사 한명을 살해하고 스물네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딜런 클리볼드는 내 아들이다.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이하 동일)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책을 펼쳐 읽는 순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묵직한 문장입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이하 <가해자의 엄마>)는 1999년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범인의 엄마인 수 클리볼드가 사건으로부터 16년 뒤인 2015년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수많은 사상자를 낳은 끔찍한 참사에 대해 가해자의 엄마가 직접 쓴 책이라는 점 때문에, 당연하게도 발간 당시 큰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요.

어지간한 각오가 아니면 절대 쓸 수 없을 것 같은 이 책을 그가 쓰기로 결심한 중요한 계기는, 살해당한 아이 중 한 명의 아버지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클리볼드 씨 가족과 해리스 씨 가족이 콜럼바인에서 얻은 교훈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비극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저를 가장 괴롭히는 질문은 딜런이 무얼 부모에게 감추었냐는 겁니다[…]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요?!? 이런 교훈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물론 아주 힘든 일이겠죠…”

-아들 대니얼 마우저를 잃은 아버지(톰 마우저)의 편지. 2007.9.

실은 꼭 이 편지가 아니더라도, 수 클리볼드에게 있어서 어떻게든 - 이 사건의 매듭을 짓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들 행동의 이유를 파헤치는 것을 통해 사랑하는 아들, 그리고 희생자들을 제대로 추모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아가 이런 끔찍한 범죄가 두번 다시 없도록, 제때 개입하고 예방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fig.2> 수 클리볼드가 2016년 TED에 출연해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다정한 사람으로, 장애인 교육 분야에 종사하며 아이들을 헌신과 사랑으로 키운 이상적인 백인 중산층 부모라고 할만했습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녀는 아들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왼쪽·영상) 영문판 책 표지. 어린 딜런과 엄마가 함께 놀고 있는 사진이 실려있습니다. Ted, Crown

저자는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나의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아들은, 대체 어떻게 끔찍한 범죄자가 되었는가. 그리고 왜 나는 아들의 마음을 감쪽같이 몰랐는가?”

수 클리볼드는, 이 책에서 주로 자신의 아들과의 추억을 꼼꼼히 되짚으며 -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아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대체 어떻게 자신의 아들이 범죄를 계획하게 되었는지를 꼼꼼히 살펴보는데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해자를 옹호하는 서사’로 흐르기에 너무 쉬운 조건입니다.

‘엄마’라는 존재는 아마도 가해자의 서사를 세상에서 가장 편파적으로 쓰고 싶은 사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과의 추억을 되짚으면서도 결코 손쉬운 연민이나, 자기 변명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 단 하나의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희생자들 역시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이었음을 기억한다.”

저자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져 과거를 돌아보더라도, 반드시 - 이 ‘아들’이 다른 가정의 부모, 가족들에게 똑같은 슬픔을 안겨준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fig.3> 에릭 해리스(왼쪽)와 딜런 클리볼드가 총기를 들고 식당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왼쪽) 수 클리볼드가 콜럼바인 총격에서 아버지(데이비드 샌더스)를 잃은 코니 샌더스(오른쪽)와 기대어 희생자들의 십자가 앞에서 슬픔을 나누는 모습. 오랫동안 샌더스는 '아들을 살인자로 키운' 그녀를 증오해왔지만, 샌더스 역시 사춘기 자녀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고통에 공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저보다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수 클리볼드)일거예요..." Wikipedia, ColumbineInformation

하지만 역시 사람이라면,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팔을 안으로 접으려하기 마련이죠. 그는 가끔 충격과 사랑으로 인해 판단이 흐려지곤 합니다.

한 예로 그는 총격 직후 기자들과 성난 대중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인의 집으로 비밀리에 도망치는데요. 처음으로 TV를 켜 콜럼바인 총격 사건 보도를 본 그가 제일 먼저 한 생각은, ‘하필 제일 못 생기게 나온 사진이 뉴스에 나와 속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아들이 총기 난사를 벌인 마당에 이런 생각은 깜짝 놀랄만큼 황당하지만, 그는 이 책에서 계속 자신의 이런 혼란과 모순을 낱낱이 드러냅니다.

또한 추억과 자기 연민에 빠지려 할 때마다 그는 머리 위로 냉수를 끼얹듯, 계속 자신이 ‘가해자의 엄마’라는 점을 상기합니다. 이 책은 아들의 복잡한 모습을 복잡한 그대로 이해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입니다.

‘저 악마, 저게 딜런의 모습이구나’ (하지만) 치료사와 상담을 하면서 딜런을 악마로 바라보아서는 지속적인 위로를 받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지하실 테이프를 보고 난 뒤 나는 책상 서랍에서 소중한 물건들을 넣어두는 작은 상자를 꺼내 열었다. 그 안에는 조그만 종이접기 말이 있었다[…]내 뺨에 뽀뽀를 퍼부으며 깔깔거리던 반짝이는 금빛 머리의 천사와 화면 안의 그 남자, 살인자를 어떻게 합칠 수가 있겠는가? 빨리 (병이) 나으라고 페가수스를 접어준 아이가 그 테이프에서 본 사람과 어떻게 같은 사람일 수가 있나?

저자가 이처럼 힘든 균형잡기의 시도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냥 조용히 자기 아들을 ‘괴물’로 치부하고 인생의 오점처럼 밀어냈어도, 혹은 반대로 희생자들은 깡그리 무시하거나, 자기 아들은 ‘그럴 애가 아니다’라며 홀로 자기 연민에 빠진 채 살아갈 수도 있고, 그쪽이 훨씬 편할텐데요.

그 이유는 바로, 사랑하는 아들을 제대로 추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를 위해선 ‘천사’와 ‘악마’가 한 사람 안에 공존했고, 그 난감함과 파괴적인 결과가 명백한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딜런과 에릭이 죽기 전에 저지른 극악한 범죄를 인지하는 게 나한테는 중요했다. 이 책의 중심은 딜런에 대한 나의 사랑이기 때문에 딜런의 마지막 순간의 사악함까지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스스로 위안을 받기 위해 딜런이 한 행동을 축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딜런이 그날 죽거나 다친 무고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면 내 심정이 어땠을까를 절대로 잊지 않을 생각이다. 소중한 아이들과 선생님을 기리기 위한 책이니까.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추모를 넘어 - 비슷한 문제를 겪을 수 있는 수많은 부모와 자녀들에게 도움을 주고, 두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를 위해서는 ‘왜’보다는 ‘어떻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콜럼바인이나 버지니아테크, 샌디훅같은 참사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왜?’이다.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나는 ‘어떻게?’라고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하다보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해결책 없이 단순한 해답에 안주하고 만다[…]’왜’ 대신에 ‘어떻게’라고 물으면 자기 파괴적인 행동에 빠져드는 과정을 그 자체로 규명할 수 있다. 어떻게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해치는 길에 접어들게 되는가?[…]‘왜’만 물으면 무기력한 상태로 남는다. ‘어떻게’라고 물으면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다.

콜럼바인 총격 사건이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이유 중 하나는, 딜런의 가정이 통상 우리가 생각하는 ‘범죄자의 가족’ 이미지와는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범죄가 벌어지기 직전까지, 자신의 아들이 어떤 마음의 문제를 겪고 있는지 까맣게 몰랐습니다. 최고로 행복한 가정인줄로만 알았죠.

딜런의 가정은 그야말로 교외 중산층 백인의 행복한 가정을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곳이었습니다. 수 클리볼드는 사랑이 넘치고 이웃들과 잘 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며칠 전엔 함께 딜런이 합격한 대학교의 기숙사 탐방을 다녀왔고, 집에서 단란하게 가족끼리 스포츠경기를 보고 보글보글 끓는 칠리를 먹으며 ‘완벽한 하루’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건 이후, 알고보니 딜런은 오래 전부터 심한 우울증 및 괴롭힘을 겪어왔습니다.

엄마에겐 이런 고민들을 모두 숨긴 채 ‘바른 아들’을 연기하며 살았고, 우연히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지닌 친구와 어울리면서 큰 영향을 받았고, 함께 ‘절망의 탈출구’2)로서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죠. 수 클리볼드는 아들의 사망에 ‘자살-살인’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어떻게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남을 죽이려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자, 의외로 수많은 ‘행복해보이는 가정’들이 비슷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깜짝놀라기도 합니다. 전국 각지에서 비슷한 고민을 겪는 사람들의 수많은 편지를 받았고, 그를 만나서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수 클리볼드의 이야기는 수많은 ‘문제를 감추고 있는 가정’에서 어떻게 아이의 문제를 조기에 발견하고 개입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준 중요한 기회가 되었는데요.

이 모든 수 클리볼드의 노력은 ‘제2의 딜런’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3)

<fig.4> 대부분의 언론들은 참혹한 범죄에 대해 '왜Why?'를 물었지만, 수 클리볼드는 우리가 무력감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어떻게How?'를 물을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범죄가 행해졌는지를 직시해야 한다는 거죠. How의 작업은 '가해자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거부하는 걸로는 불가능합니다. (왼쪽) 총격 이후 클레멘트 공원에 세워진 사망자들에 대한 추모 십자가. 처음엔 딜런과 에릭의 십자가도 있었지만, 수많은 항의 끝에 결국 제거되었었다고 합니다. 딜런의 십자가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여성의 모습. Newsweek, DenverPost

저자는 쉽게 원인을 우울증, 괴롭힘, 친구 등으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한낮의 우울> 등을 쓴 작가 앤드루 솔로몬은 이런 저자의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 책이 훌륭한 점은 딜런의 행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 클리볼드는 이 일을 집단 괴롭힘이나 학교, 아들의 건강 상태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쉽게 설명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수 클리볼드의 최종적인 결심이 드러난다. 클리볼드는 ‘악’과 ‘병’ 사이의 확정할 수 없는 경계를 명료하게 밝히려고 애쓰지 않는다.

수 클리볼드는 일반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할 불행 앞에서도, 손쉽게 ‘가해자’의 서사를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피해자들 목숨의 무게를 느끼면서, 동시에 사랑했던 아들의 복잡한 삶을 애도합니다.

이 어려운 작업을 통해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건이 주는 진심어린 교훈을 나누어주고, 또 많은 ‘딜런이 될 뻔했던’ 아이들을 구원해내는 -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대단한 일을 해냅니다.

2)당연한 얘기지만 범죄는 ‘절망의 탈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딜런처럼 청소년기에 여러 이유로 우울에 빠지는 경우는 흔한 편인데, 일반인에 비해 조금 더 취약한 누군가는 어떤 맥락에서 어떤 영향을 받아 범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해자의 어려움이 누구나 겪을 수 있을만한 일이라고 하며 이를 가해자의 입장에서 분석하는 것은 결코 그의 범죄를 '가볍게'하려는 시도라거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선량한 보통 사람들'을 무시하려는 처사가 아니라, 프로세스를 이해함으로써 - '취약한 누군가'가 또 그런 길로 빠지게 되는 것을 막고, 사회적인 안전망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일본 사회학자 나카지마 다케시中島岳志는 <아키하바라 사건:가토 도모히로의 궤적秋葉原事件加藤智大の軌跡>(2013·링크)에서 2008년 사망자 7명에 부상자 10명이 발생한 '아키하바라 사건'의 가해자 가토 도모히로의 문제를 '가해자의 시점'에서 면밀히 다룹니다. 그는 가토가 인터넷 게시판에 썼던 글들까지 살펴보며 범죄에 이르게 된 '복잡한 심리'를 살펴보는데, 대부분은 놀라울만큼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법한 생각이었다고 합니다.('매일 꼭두각시처럼 살아도 될까?', '나는 왜 이렇게 고독한가?', 진심을 털어놓고 말을 나눌 사람이 없다...) 그리고 가토는 진술조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준비 상태나 속마음을 게시판에 쓰면서도 누군가가 말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책은 미번역이고 위에 인용한 부분은 일본웹 서평과 <천년의 독서>(미사고 요시아키,2023, p,86~89)에 소개된 대목을 참고했습니다)

3)수 클리볼드는 사건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편지를 받아왔는데요. <가해자의 엄마> 책에서 그는 가장 슬펐던 편지는, 자신이나 딜런을 증오하는 편지가 아니라 청소년들이 ‘딜런의 범죄를 찬양하는 편지’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일각에선 콜럼바인 총격이 '밈'화 되거나 '우상화'되기도 합니다.(영상)

【3.악인의 ‘변명’ 대신 ‘진실’을 끌어내라】

우리는 가해자의 서사를 듣고, 거기서 소중한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단, <가해자의 엄마>처럼 - 균형을 잡으려는 사려깊은 ‘노력’과 ‘각오’가 있다면 말입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1995년 ‘일본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사건’의 피해자들 십수명을 직접 인터뷰한 책 <언더그라운드>(1997)를 출간했었습니다.4)

‘사린 가스 살포 사건’은 일본의 옴 진리교가 주도해 출근 시간 도쿄 지하철 여러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치명적인 독성 가스를 살포한 사건으로, 이 테러로 인해 15명이 사망하고 5800여명의 피해자가 발생했습니다. 농도 등의 착오로, (불행 중 다행으로) 사망자 수가 더 많아지진 않았습니다만 - 만약 의도한 대로였다면 수천명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수 있는 극악한 테러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언더그라운드> 출간 1년 후, 무라카미 하루키는 ‘정반대로’ 사린 가스 살포 가해자 측인 옴 진리교도들의 이야기를 심층 인터뷰해 후속작을 내기도 했습니다.

오늘 레터에서 다룰 <약속된 장소에서:언더그라운드2>(1998)가 바로 그 책이죠.

<fig.5> 무라카미 하루키(왼쪽) 일본 옴 진리교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 사건으로부터 25년이 흐른, 지난 2020년 일본 공안조사청이 진행한 관련 행사("그 테러 사건을 잊지 말 것") 포스터. NYT, 公安調査庁

왜 무라카미 하루키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굳이 이어서 ‘가해자’ 측의 이야기까지 들었을까요?

우선 1995년 사건 발생 당시, 그는 옴진리교에 대한 원색적 보도에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에 <언더그라운드>를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펜을 통해 숫자로만 존재했던 ‘납작한 피해자들’의 모습이 제각기의 빛을 얻게 됐죠.

하지만 무라카미는 계속 의문이 남았습니다.

과연 옴진리교는 무엇이었을까? 대체 뭐길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매혹되고, 어떻게 하다가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을까? 그런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단지 수뇌부만 잡아 가둔다고 해서 ‘제2의 사린 가스 테러’를 완전히 막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을 더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해서 저자는 이어서 옴 진리교라는 ‘블랙박스’를 열어보기로 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소감을 말하자면, 나는 일년간에 걸쳐 <언더그라운드>를 취재한 사람으로서 지하철 사린사건을 일으킨 옴진리교 신자 당사자들에 대해 지금도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다. 그 사건으로 피해를 입어 지금도 여러가지 형태로 고통받는 분들을 실제로 만나 보았고, 사랑하는 이의 생명을 영원히 빼앗긴 분들의 끝없는 고뇌를 실제로 접했다. 나는 그것을 잊을 수 없으며, 어떤 동기이든 어떤 사정이든 그런 범행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총체적 집단으로서 옴진리교 교단이 이 사건에 현실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관여했느냐는 점에서는 의견이 갈릴 것이라 생각하며[…]그들을 새로운 시점에서 재평가하려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내가 여기에 제시하고 싶었던 것은, 명확한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명확한 다수의 관점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살아있는 생생한 재료다.

-무라카미 하루키, <약속된 장소에서:언더그라운드2>(이하 동일)

역시 이 책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 ‘딴지걸기의 화신’이라고 할만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세입니다.

9명의 옴진리교도들을 인터뷰하는 내내, 그는 단 한번도 잠자코 옴진리교도의 논리를 빗질하듯 따라가며 듣지 않습니다. 그는 계속 ‘뭔가 좀 이상한데...’ 싶은 부분에선 가차없이 “잠깐!”을 외치며 말을 끊고, 그들로부터 진실을 이끌어내기 위해 예리한 질문을 던지죠.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인상적이기 때문에, 질문을 위주로 인용을 해보겠습니다.

Q.(옴진리교의 교리 자체는 훌륭하다는 말에 대해) 그렇지만 옴진리교 교단에서 전개한 교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간 결과 그런 범죄가 발생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말았습니다. 그런 요소가 원래부터 교의 안에 내포되어 있었다는 뜻이죠.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Q.(자신은 ‘말단 신도’기 때문에 테러와 상관없다는 말에 대해) 그래서 관계가 없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만 말이죠, 혹시 당신의 직급이 쑥 올라가서 탄트라 바지라야나* 부분에 관여하게 되고, 그로인해 니르바나(열반)에 이르는 과정으로써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죽이겠습니까?

*탄트라 바지라야나=옴 진리교에서 말하는 무력투쟁

Q.(보통사람들에게 이익을 나눠준다는 교리에 대해) 그렇지만 지극히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보통사람들에게 그런 이익을 널리 나눠주기도 전에 그런 범죄가 발생했어요. 그로 인해 보통사람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내부에서 제대로 총괄하지 않고, ‘좋은 점도 있습니다’라고 이익을 호소해본들 누구도 납득하지 않겠죠.

대체로 인터뷰는 이런 느낌으로 ‘몰아치듯’ 이어지는데요.

그 과정에서 옴진리교도들은 처음엔 ‘어설프고 애매한 변명’을 맴돌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가장 밑바닥에 품고 있는 진심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가노 히로유키라는 신실한 옴 진리교도 남성과의 인터뷰는 아래와 같이 끝납니다.

가노가 처음에 “사린가스 테러는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옴진리교의 교리 자체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가르침이다”란 식으로 기만적인 변명만을 늘어놓았던 것과 비교하면 굉장한 ‘발전’이라고 할만하죠.

“지하철 사린사건은 아주 나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서는 안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안에서는 ‘굉장히 나쁜 일’과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굉장히 좋은 일’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범행을 저지른 사람들도 그전까지 줄곧 교주가 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행동했고, 그로 인해 큰 이익을 얻었죠. 그리고 그 때까지의 단계에서는 범죄의 요소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연장선 정도로 생각하고 나아가다가 빗나가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가노 히로유키)

저자가 ‘균형을 잡는 질문(시선)’을 통해, 가해자 측의 ‘변명’에서 ‘진짜 이야기’를 끌어낸 것입니다.

이어서 <약속된 장소에서>의 궁극적인 목적도, <가해자의 엄마>와 마찬가지로 - 비슷한 범죄가 또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적인 문제 자체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옴진리교 측’을 정면으로 다루려 마음먹은 이유는 ‘결국 그런 사건까지 벌어졌는데도 그것을 일으킨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게 아닌가’하는 위기감을 절실히 느껴왔기 때문이었다. 일본사회라는 메인시스템에서 벗어난 사람들(특히 젊은 층)을 받아들이기 위한 유효하고 정상적인 서브시스템=안전망이 일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은 그 사건 후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본질적이고도 중대한 결함이 우리 사회에 블랙홀처럼 존재하는 한, 설령 지금은 옴진리교라는 집단을 무너뜨렸다 해도 비슷한 유형의 흡인체-옴진리교적인 것-가 언젠가 또다시 등장할 것이며, 비슷한 사건이 또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 책에 실린 옴진리교 9명은 각자 처한 상황이나 나이, 성별 등이 모두 제각각입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 이들 중 누구도 옴진리교에 입교하기로 한 결정, 그리고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나름 옴진리교에서 자신들이 원했던 것을 얻었고, 그 ‘좋은 기억’만큼은 남아있었습니다.

이들은 전반적으로 현실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 자원, 관계 등이 부족한 ‘낙오자’ 혹은 현실을 거부하는 ‘아웃사이더’들이 많았습니다. 이상은 높은데 현실이 따라주지 못했던 것이죠.

* 행복하고 문제 없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아마 웬만해선 옴진리교에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이와쿠라 하루미)

* 말단 신자 중에는 정말로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가엾습니다. 결국 생각해보면, 세상의 시스템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사람, 어딘가 잘 안맞는 사람, 혹은 그로부터 배척당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옴진리교에 들어간 겁니다[...]그들과는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어요. (하무라 아키오)

이런 상황에서 옴진리교는 이들에게 꿈을 이루기 위한 ‘요술지팡이(건강, 진리, 사회적 인정, 관계, 깨달음...)’ 환상을 주었습니다. 마치 “내 눈을 바라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노래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그런 ‘요술지팡이’가 실재할리 없고, 옴진리교는 순수한 사람들의 취약함을 악용해 돈을 벌어들이고 또 범죄를 사주했습니다.

요술지팡이를 휘두르듯 ‘한 방’에 삶의 이치를 깨닫고,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 그런 ‘지름길’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한, 그리고 사회가 아웃사이더들을 품어안을 수 있는 지대를 만들지 않는 한 취약한 사람들이 제2의 옴진리교에 빠져들 가능성은 얼마든 있는 것입니다.

✏️

“이노우에 요시히로씨나 도요타 도오루씨가 일을 저질러버린 것을 보고, 어쩌면 내가 그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꿈을 꿉니다[…]재판받은 아사하라 쇼코의 일련의 언동을 보고 있으면 구역질이 나고, 실제로 토한적도 있습니다. 정말이지 너무도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볼 가치도 없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한심하고 꼴사나운 모습이라도 저는 그들에게서 눈을 돌릴수 없습니다[…]설령 나스스로 어느정도 정리가 된다 하더라도 내 안의 ‘옴진리교 사건’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다카하시 히데토시)

-무라카미 하루키, <약속된 장소에서>

4)<언더그라운드>의 내용을 다룬 지난 회차 레터(✉️참사 피해자들, 개별의 우주)입니다.

【4.맺음말】

오늘 살펴본 두 권의 책은 ‘가해자의 서사’를 다루었다는 공통점 외에도 핵심적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를 놓지 않았다는 점이죠.

만약 오늘 두 책에서, 수 클리볼드가 자기 아들만 중요하다고 외쳤다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옴 진리교도들의 궤변을 그대로 듣고서 ‘음 일리가 있군, ’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면 우리에게 이런 울림을 줄 수 있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저는 분명 이 책들을 열 쪽도 못 읽고 덮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오늘 레터를 쓰기 전까지는 가해자의 서사보다는 피해자의 서사 쪽에 훨씬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전엔 가해자의 서사 쪽에는 애초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죠.

물론 피해자의 서사가 중요하다는 생각 자체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레터를 쓰면서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가해자의 삶, 그 안에 있는 징후를 최대한 균형을 지켜가며 꼼꼼하게 읽어내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요. 이는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긍정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 그들이라는 ‘상처’를 만들어낸 우리 사회를 더 잘 ‘진단’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무라카미 하루키와 수 클리볼드가 훌륭하게 보여주었듯, 범죄를 미워하면서도 그 행동은 따져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가해자들을 단순히 ‘괴물’로 치부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제가 오늘 책들을 읽으면서, 별로 중요한 대목도 아니었지만 유독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던 구절 일부를 인용하며 오늘 레터를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

“그런데 신기하게도 경찰과 여러번 접촉하는 사이 왠지 모르게 친해졌습니다[…]<꼬마 유령 캐스퍼>에 나오는 못된 유령을 아시나요? 맨 처음엔 무서운 놈인데 몇번씩 접하면서 사이가 좋아지죠[…]‘아 경찰 중에도 순수한 사람, 진실한 사람이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자네 경찰 스파이 한번 해볼 생각 없나?”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저는 사실 기분파입니다. 고독하고 친구도 없습니다. 회사에 가도 늘 말단이고 매일 야단만 맞았습니다. 저를 진지하게 상대해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경찰이 “어떻게 잘해서 정보 좀 빼내줘”라고 성실하게 부탁해오니 너무나 기뻤습니다. 설령 상대가 경찰이라도 그런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게 고마웠습니다. 우리 회사 사람들하고는 얘기가 거의 안 통했고, 물론 친구가 생길 리도 없었습니다.”(하무라 아키오, 신자였다가 경찰 스파이가 된 인물)

...컬트 종교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딱히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나나 여러분 주변에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다...마음에 조금은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주위 사람들과 원만하게 소통할 수 없어서 약간은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일 수도 있고, 당신일 수도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위험성을 내포한 컬트 종교 사이에 가로놓인 한 장의 벽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얇을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 <약속된 장소에서>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수 클리볼드, 홍한별 옮김,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반비, 2016.

-처음 이 책을 읽고 독서일기를 쓸 때, 왠지 도저히 '저자'라는 표현을 쓸 수 없어서 저자를 지칭하는 자리에 죄다 '이 사람'이라고 적었었습니다. 이 책은 '창작물' '작품'이라기보다는, 그냥 이 사람의 삶과 육체에서 나온 절망과 희망의 덩어리 그 자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긴 설명 대신 그냥 읽는 게 좋습니다. 참고로 이 충격적인 한글판 제목에 대해선 처음엔 원저자 측이 깜짝 놀랐지만, 이 책이 품은 메시지를 더 널리 전달하기 위한 취지라는 진심어린 설득 끝에 이렇게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희진, <사회과학책 만드는 법>) 실제로 저도 전혀 사전 지식 없이 도서관에서 이리저리 해찰하다가 제목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으니 이런 시도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콜럼바인 관련 자료 - 당시 인터뷰, 사진, 사건 경과,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 그 이후의 진행 과정 등에 대한 정보를 모아놓은 아카이브 사이트가 있습니다.(링크)

[다큐] 마이클 무어, <볼링 포 콜럼바인>, 120min, 2002.

[영화] 구스 반 산트, <엘리펀트>, 81min, 2003.(영화평)

-오늘 바라본 <가해자의 엄마>와는 또 다른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콜럼바인 총격사건을 다룬 대표적인 두 편의 ‘서사’입니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엘리펀트>는 기본적인 소재와 틀거리만 가져왔을 뿐, 이를 바탕으로 재창조한 픽션이고,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은 콜럼바인 총격 사건이 일어난 이유를 추적하되, 사건의 현장 - 범인 개개인에 집중하기보다는 이런 총격을 가능하게 한 시스템(미국의 총기 산업)에 명쾌하게 집중하고 있는 논픽션입니다.(엘리펀트는 2003년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 감독상을 동시 수상한 영화이고 - 대중적으론 호불호가 갈리지만 많은 감독, 평론가들이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있기도 한데요. 확실히 <볼링 포 콜럼바인>, <가해자의 엄마>에 비해선 훨씬 더 '이해 불가능한 것(불가해한 것)'을 있는 그대로 다루는 작품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영미 옮김, 『약속된 장소에서 : 언더그라운드2』, 문학동네, 2010.

-남은 책장이 줄어드는 걸 아쉬워하면서 읽었던 책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언더그라운드>보다도 이 책 쪽이 흥미로웠는데, 그건 아마도 <언더그라운드>에서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듣기가 빙의(?)같은 느낌의 경청이었다면, 이 책에서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듣기는 정중하지만 가차없는 격투기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두 권의 시리즈는 인터뷰의 두 가지 갈래를 잘 보여준다고도 생각하는데요. 싸우는 인터뷰, 경청하는 인터뷰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엔 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와의 대담이 실려있는데, 인터뷰 본문만큼이나 즐겁게 읽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옴진리교인들과 저의 비슷한 점을 여럿 짚었기 때문에(엉뚱한 질문을 궁리하기, 명상을 좋아하는 것, 뭔가에 꽂히면 몰두하는 성격 등)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컬티시>(링크)에 따르면 '컬트' 소재에 끌리는 건 훌륭한 학자들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다만 그걸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균형있게 다룰지가 관건이라는 거죠. 마찬가지의 논리를 '악의 서사(fiction)'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악의 서사는 당연히 매혹적일 수 있지만, 감상자가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가 중요합니다. 다만 '취약한 사람들'의 경우는 고려해야겠죠.

얼핏 이 책은 '옴진리교'라는 '사이비종교'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최근의 소위 '묻지마 범죄'와는 차이가 있어보이기도 합니다만, 실제로 범죄와 관련된 서사들을 읽어봤을 때, 오늘 딜런의 사례도 마찬가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죄를 하나의 '해결책(절망의 탈출)'으로 여기는 자기만의 기만적인 닫힌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예를 들면, 나를 부당하게 대하는 외부세계, 거기에 분노한 나, 그에 대한 해결/간편한 초월의 수단으로서의 범죄...)에서 개인의 돌출적 범죄를 분석하는데도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듀나 외, 『악인의 서사』, 돌고래, 2023.

-이 책의 부제는 '수많은 창작물 속 악, 악행, 빌런에 관한 아홉 가지 쟁점'입니다. 부제처럼 주로 현실의 범죄보다도, 영화나 드라마 등 창작물 속 '악당'의 서사에 대해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조커>같은 영화를 보고 범죄를 저지른다고 했을 때, 실제 영화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런 픽션을 '유해하다'는 이유로 금지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읽을 수 있습니다. (<볼링 포 콜럼바인>라는 제목 자체도, 총격 이후 <퀘이크>같은 게임이나 범죄 영화, 마릴린 맨슨 음악 등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당시 세태를 풍자하기 위한 것이었죠 - 범죄자들이 범죄 전 볼링을 쳤기 때문에, 그런 논리라면 '볼링'도 폭력성을 부추긴다는 의미에서요)

제 경우는 일단 현실의 범죄에 대한 직접적인 논픽션(기사 등)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오늘 레터에선 현실의 범죄를 직접 다룬 서사 쪽에 집중을 해보았습니다.

케빈 플린 엮음, 민청기 옮김, 『뉴욕타임스 크라임』, 열린세상, 2020.

-166년간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굵직한 사건기사들을 유형별(강도, 연쇄 살인, 암살 등)로 모아둔 책입니다. 실제 오늘 다룬 콜럼바인 총격 사건이라든지,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 당시의 보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교적 짧은 기사지만, 분명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에 서술된 내용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 흥미로웠습니다.

뉴욕타임스의 별명은 'Gray Lady'이기도 한데요. 짐짓 흐리멍텅하게 점잔을 떤다는 이유에섭니다. 대중의 흥미와 공익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온 (가끔은 거꾸러진) 수많은 기록을 바라보다보면, 범죄를 눈길을 끌면서도 균형있게 보도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생각하게 됩니다.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범죄라는 ‘점’ 뒤에 숨은 커다란 ‘사회’

독서시간: 약 8분 / 글자수: 약 5100자

🖍글 속 한 문장

“사회적 고립과 경제적 불안정성에 더해 ‘정상성 좌절’도 불특정 다수를 향한 반사회적 범죄의 주요 동기로 지목된다...김학준 독립연구가는 “조선의 ‘열심히 살았다’는 말은 헤테로(이성애자) 남성이면서 취업을 해 가정을 꾸리고 가부장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욕망, 더 나아가 서울에 사는 중산층의 삶에 도달하려는 정상성의 욕망을 드러낸다”며 “좌절된 욕망을 또래 남성을 향한 공격으로 회복하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근래 ‘묻지마 범죄’라고 통용되는 범죄들에 대한 입체적인 분석을 시도한 경향신문 기사입니다. 단순히 범죄자를 '이해할 수 없는 괴물'로 보기보다는 '사회의 징후'로 읽어내야 한다는 차원에섭니다.

기사 속 전문가들은 정상성의 좌절, 불안정한 일자리, 비틀린 남성성, 고립 등을 요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가해자 ‘변명’ 대신 피해자 삶과 시스템

독서시간: 약 4분 / 글자수: 약 2000자

🖍글 속 한 문장

“수많은 범죄스릴러에서 범인이 얼마나 잔혹한 악마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처럼 묘사되어왔던 피해자들은 이 작품에서 고통 가운데서도 삶의 의지를 이어가고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용기를 내는 강인한 생존자로 그려진다...(또한)<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철저하게 피해자의 시각을 통해 폭력의 순간을 짧게 재현하고, 범죄 이전에 이를 가능하게 한 근본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범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피해자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고, 가해자의 삶을 영웅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범죄의 서사’의 재료를 만들어내고 엮어내는 최전선에 있는 언론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입니다.

가해자의 변명 그대로 실어주는 언론

독서시간: 약 9분 / 글자수: 약 5300자

🖍글 속 한 문장

“<“처제 예뻐서 그랬다, 난 무죄”···화성 용의자의 두 얼굴>...처제가 예뻐서 성폭행했다는 가해자의 주장을 그대로 내보내는 것은 아무런 공익적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식의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세상에 그대로 전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이중삼중의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언론이 ‘피해자가 예뻤다’, ‘옷차림이 어땠다’, ‘술을 마셨다’, ‘늦은 시간이었다’와 같은 식의 성폭력 가해자들이 하는 변명을 한마디도 받아써주지 말기를 바랍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화성 연쇄살인 사건 보도를 살펴본 민언련의 기획입니다.

실은 처음엔 '가해자의 서사'와 관련해 이번 회차 테마를 ‘범죄 저널리즘’으로 잡을까도 생각했었습니다. 트위터 등에서 지난 수년간 ‘범죄자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외침이 일었던 것의 주된 원인 제공자로서 -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아 온 언론의 이야기를 안하고 넘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대표적으로 범죄 기사 제목에 가해자 변명 쓰기·링크)

물론 모든 '언론'을 하나로 뭉뚱그려서 얘기할 순 없겠지만, 범죄의 서사와 관련해 공통의 약속을 만들어갈 필요는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무작정 ‘가해자의 서사도 중요하다’고 하면 공감을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가해자의 서사를 어떻게 다룰지 고민한 기자의 칼럼도 첨부합니다(링크)

<볼링 포 콜럼바인>과 <엘리펀트>

독서시간: 약 7분 / 글자수: 약 3700자

🖍글 속 한 문장

“결과에 대해 원인을 찾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벌어진 사건을 두고 가타부타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원인을 설명하다보면 폭력을 설명하게 된다. 설명하는 순간 이 영화는 가짜가 된다. 설명하는 순간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다. 폭력은 설명하면 안 된다. 그저 거부해야만 할 뿐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씨네21에서 2004년 정성일 평론가와 전찬일 평론가가 '콜럼바인 총격 사건'을 영화화한 <엘리펀트>를 놓고 진행한 대담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볼링 포 콜럼바인>이 비교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요. 두 작품을 모두 본 분이라면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읽으면서 해찰을 해볼 수 있습니다.

👥지난 회차의 반응

지난 회차(‘왜 좋은 댓글을 찾아보기 힘든가?[8월의김스피]’)에 대한 연구자님들께서, 주로 내용에 대한 것보다는 '2주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 이에 별도로 노션에 반응을 갈무리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감사합니다.

*한 연구자님께서 문의주신 '메일 잘림 오류' 관련해선 스티비 측에 문의를 한 상황인데, 발송자 측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ㅠ) 내용이 잘려보일 경우 상단의 '웹에서 보기'를 눌러서 읽어주세요.

👥옛날 회차에도 의견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간 2022년 6월 이후, 인스피아 레터에 대한 피드백들을 모은 페이지를 새로 오픈했습니다.

[✉️피드백 모음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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