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함께 달콤한 12월의 시간이 되길
슈톨렌
Bree ㅣ2022.12.22

"주소 알려주시겠어요?"

 

갑작스레 주소를 묻는 메시지가 왔다. 시집 필사 모임을 하고 있는 제주 책방의 서점지기님이었다. '좋은 마음'을 보내주려 한다는 메시지였다. 우리는 매일 한 편의 시를 필사하고 감상을 카카오톡으로 나눈다. '매일' 하루 한 편의 시를 나누는 모임인데, 바쁘다는 이유로 며칠을 건너뛰어 겨우겨우 한 편을 올리는 날들이 잦아졌다.

 

주소를 묻는 메시지가 너무나도 다정하게 느껴져 되려 나는 송구해졌다. 매일 함께 시를 나누자 해놓고 그러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필사 모임을 잠시 멈추었다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처럼 나도 잠시 멈추어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지는 못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 봐. 이 모임이 아니라 매일 밤 책상에 앉아 시를 적어내려보는 시간으로.

 

저녁을 챙겨 먹고 샤워를 하고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 읽고 있는 시집에서 그날 마음이 가는 시를 골라 필사를 한다. 노트의 오른쪽에는 잘 써지는 펜으로 시를 옮겨 적고, 왼쪽에는 연필로 감상을 적는다. 거나한 평론 같은 게 아니다. 시를 읽고 난 뒤의 감정, 마음, 되살아났던 기억들을 끄적인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에 분주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잦아들고 어느새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내가 나를 잘 모른 다는 거, 그건 내가 잘 안다. 제 감정조차 잘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서 스스로가 섬짓하게 느껴졌던 적도 있다. 시를 읽고 난 뒤, 감상을 적어내려가며 천천히 생각과 감정들을 되짚어보는 시간이 그래서 소중했다. 그렇게 쓰다 보면 모르고 지나쳤던 감정들이 손 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처럼 겹겹의 낱장들로 만져지는 듯했다. 며칠을 건너뛰어서라도 다시 그 시간을 만나고 싶었다.

 

며칠 뒤 집으로 작은 소포 꾸러미가 도착했다. 손글씨로 적힌 주소가 정답게 느껴졌다. 포장을 뜯으니 고소한 향내가 났다. 동백오일이었다. 작고 둥근 동백 잎도 하나 엽서와 함께 상자에 담겨 있었다. 가을 동안 숲을 산책하며 주운 동백 씨앗으로 짠 것이라 했다. 숲길을 걸으며 길가에 떨어진 동백 씨앗을 발견하고선 주머니에 한가득 담아 왔을 두 책방지기님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따뜻하고 촉촉한 겨울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동백오일 한 병에 그득히 담겨있었다.

 

또 다른 엽서에는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황인숙 시인의 「송년회」라는 시였다.

칠순 여인네가 환갑내기 여인네한테 말했다지

"환갑이면 뭘 입어도 예쁠 때야!"

그 얘기를 들려주며 들으며

오십대 우리들 깔깔 웃었다


황인숙, 「송년회」 부분

삼십대인 나는 왜 항상 늙은 기분으로 살았을까. 한 백 년은 산 사람처럼. 오십대 언니들이 나를 바라보며 예쁘다고 깔깔 웃음 짓는 모습이 그려졌다. 한 살 더 나이를 먹는다는 부담감에 반갑지만은 않았던 연말이 시 한 편에 겨울의 축제로 바뀌었다. 가장 젊은 날. 내년에도 나는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한 편의 시로 함께 하는 송년회가 이렇게 근사하게 열렸다.  

 

다정한 마음을 나도 제주로 부치고 싶었다. 무엇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다 안희연 시인의 「슈톨렌」이 떠올랐다. 슈톨렌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매주 한 조각씩 잘라먹는 빵이다. 벽돌같이 투박하게 생겨서는 그 안에 럼에 숙성한 살구와 자두, 무화과, 그리고 고소한 헤이즐넛과 호두, 아몬드를 품고 있다. 빵 위로 하얗게 덮인 슈가파우더는 밤새 내려 소복이 쌓인 함박눈 같다. 얇게 자른 슈톨렌을 한 입 베어 물면 입가엔 하얗게 가루가 묻어난다. 

너의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 있다

아닌 척 시치미를 떼도 내게는 눈물 자국이 보인다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

 

안희연, 「슈톨렌」 부분  

시에서 화자의 친구는 연신 맛있다는 말과 함께 슈톨렌을 먹는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화자는 그런 친구의 얼굴에서 눈물 자국을 발견한다. 먼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마주 앉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며 시선은 눈물 자국에 머무르는 화자의 모습에서 다정한 마음이 느껴졌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는 말은 따뜻한 위로로 다가왔다.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에 들러 슈톨렌을 사, 손으로 눌러쓴 시와 함께 제주로 부쳤다. 시로 대신 전하는 다정한 마음을 담아. 며칠 뒤 잘 받았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따뜻한 커피와 함께 달콤한 12월의 시간이 되시길.

 

우리가 보낸 한 해의 시간들이 마냥 기뻤던 순간들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어 보인 얼굴 뒤로 힘겨운 순간들도 지나갔을 테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 순간들이 달콤한 잼으로 기억될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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