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가들이 오지 않는, 그래서 작가들이 방해할 수 없는, 순수한 독서 축제를 상상했다. 이 행사장에서 모든 기획과 이벤트는 텍스트와 독자의 만남에 초점을 둬야 한다. 작가와 출판사 직원도 입장할 수는 있지만, 자신들이 업계 관계자임을 티 내선 안 되며, 어떤 특별 대우도 받지 못한다.
예산이 1,000억 원이나 된다면 주최 측에서 참가비를 오히려 나눠주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도 되겠지. 게다가 사람들은 종종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을 더 편안해한다. 내 상상 속 책 축제는 한겨울에 일주일 동안 펼쳐진다. 참가자들은 첫 날 행사장에 들어와서 마지막 날까지 외부로 나가지 못한다. 급한 사정이 있어서 밖으로 나간 참가자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며, 그해 축제는 포기해야 한다.
일주일 동안 모든 참가자들에게는 소박하지만 멋진 숙소가 제공된다. 시설은 다 똑같다. 노약자와 가족을 위한 방이 조금 다를 뿐이다. 방을 배정할 때에는 지인들은 이웃하지 않게 두는 게 원칙이다. 방의 옷장에는 입을 옷가지들도 다 갖춰져 있는데, 이용자의 옷 사이즈를 주최 측에서 미리 파악해 크기가 다 잘 맞는다. 다만 무작위라서 운이 없으면 일주일간 괴악한 옷차림으로 다녀야 한다.
행사장은 작은 마을 규모인데 중심부에 책 축제 참가자들을 위한 호텔과 진행 요원을 위한 숙박시설, 사무국, 식당, 체육관 그리고 거대한 도서관이 있다. 모든 시설은 무료이며, 식당에서는 24시간 뷔페식을 먹을 수 있고, 뷔페가 싫은 사람을 위해 끼니마다 두 종류 메뉴로 배식도 한다. 해가 지면 맥주도 제공한다. 맥주도 두 종류다. 페일에일과 바이젠. 지역 양조장에서 만든 수제 맥주다.
어디에서나 늘 좋은 음악이 흐르며, 진행 요원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밴드의 공연도 곳곳에서 열린다. 그러나 마을 전체에 TV는 한 대도 없고, 영화관도 없다. 도서관도 장서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지만 영상 자료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자책과 오디오북은 모자람 없이 갖추고 있다.
참가자들은 축제 첫날 행사장에 들어갈 때 입구에서 돈과 휴대전화와 컴퓨터 기기를 모두 진행요원에게 맡겨야 한다. 그리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제비뽑기를 한다. 제비에는 책의 제목과 등장인물의 이름이 적혀 있다. 참가자들은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을 찾아 읽고, 등장인물을 자기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 해당 등장인물의 모습으로 분장해 그 인물의 관점으로 책의 내용을 해석해 모든 사람들 앞에서 발표한다. 분장 재료는 참가자가 알아서 조달해야 한다. 자기가 받은 옷과 다른 참가자가 받은 옷을 교환할 수도 있다. 책에 대한 해석 역시 자기가 직접 해야 한다. 다만 참가자들이 작은 그룹을 만들고 독서 토론을 열어 구성원의 책을 다 같이 읽은 뒤 서로에게 조언을 해줄 수는 있다. 그러면서 마음이 맞는 사람과 썸을 타고 연애를 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다. 다만 깊은 독서와 해석, 발표 준비에 일주일은 그리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수상을 하는 것은 큰 영예이기 때문에 경쟁도 엄청나게 치열하다.
축제 마지막 날에는 참가자와 진행 요원이 모두 심사를 한다.체점 기준은 딱히 없다. 어떤 이는 꼼꼼하고 충실한 분장에, 어떤 이는 전복적인 해석에 높은 점수를 준다. 모두가 다 아는 유명 소설의 유명 캐릭터를 뽑은 사람은 돋보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만큼 부담도 크다. 소설이 아니라 비문학 도서에 나오는 인물을 맡게 된 이도 고민이 많다.
심사 결과를 현장에서 바로 발표하지는 않는다. 투표 결과로만 입상자를 선정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 열한 달 동안 도서관 대출 기록과 서점 판매량을 파악해서 축제로 인해 독자가 많아진 책을 가려내고, 그 책을 소개했던 이에게 가점을 부여한다. 그렇게 해서 수상자를 뽑아 메달을 수여하는데, 순위는 없다. 메달을 받은 사람들은 다음 축제에서 진행요원으로 활동한다. 책 축제에서 진행 요원으로 일한 경험은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된다.
이거 1,000억 원으로 되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