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 개념(aesthetic concept) 😀
발행일자: 2022-03-11
Vol. no 5
미적 개념(Aesthetic concept)


by 박명인(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


미는 어떤 물질과 사태의 가치가 단적인 형에서 직감적·직관적으로 쾌(快)나 감탄으로 파악되었을 경우의 완전성을 말한다. 이것은 세 개의 계기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 첫째는 미의 소재에 관한 규정, 둘째는 존재의 완전성이라는 본질 규정, 셋째는 직감성·직관성이라는 조건이다.

예를 들면, 예술작품과 같은 특정한 대상뿐 아니라 모든 것이 미일 수 있고, 물질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미가 존재한다(예를 들면, 행위의 미). 다음에 직감성·직관성이라는 조건은 대상의 완전성을 논증적으로 나타내고 납득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동시에 지각되는 것을 가리키고 있으며 국어학적으로도 시각적인 대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와 같은 정신적 현상에 대해서도 그 전체를 하나의 통일적인 상으로 직접 파악할 때 미로서의 포착 가능성이 열린다. 또한 시간적으로 전개하는 대상의 전체를 미로 포착했을 때에도 그 구성의 지각을 근거로 완결의식에서 체험의 기억이 하나로 응축되어 미라는 형용을 만들고 있다.

미의 본질은 단적인 완전성이며 완전성의 직감적인 지각은 그 훌륭함에 대한 감탄 혹은 쾌감정에 의해 나타난다. 미의 판단이 논증적 혹은 이성적인 인식이 아니고 직감적(asthetisch, 독일어의 미학)이라는 칸트에 있어서의 사태 판단을 문장형으로 생각했을 경우, 마치 쾌가 개념을 대신해서 술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개념 없는 만족’이라는 규정을 끌어냈다. 여기에서 판단과 체험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미에 관한 판단의 직접 근거가 개념이 아니면서 그것이 옳다고 하는 것은 미의 체험에 있어서 개념적인 사유가 일체 배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태(實態)에 완전히 어울리지 않는다. 미의 완전성은 저절로 감탄을 일으킨다. 그때 개념적인 사유도 생생해진다. 그리고 이 개념이나 언어의 활동을 제거해버리면 미의 체험은 지극히 빈약해지지 않을 수 없다.

 

칸트는 미의 만족이 ‘개념이 없는’것으로부터 미를 완전성과 결부시키는 것을 부정했다. 완전성은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예를 들면, 주택의 완전성은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라고 하는 것(집의 본질)에 의해 규정되고 있어서 그 개념을 만족하게 하는 정도에 의해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주택의 개념을 채우고 있는 것만으로 주택을 미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완전성 개념은 대단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전술의 정의에서 다룬 것은 ‘단적인 완전성’즉, ‘그것만의 개념’에 한정되지 않는 완전성이다. 이것은 경험상으로 지극히 근접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 점에 관한 지식을 도외시하면서도 어떤 것이 훌륭하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확실히 있다. 바꿔 말하면, 어떠한 가치일지라도 개의치 않는다. 어쨌든 그 가치와 직감적으로 지각할 때 미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미에 있어서 언어나 개념은 훨씬 적극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미가 주는 쾌는 정신을 활성화한다. 그 상태에서 개념적인 사유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개된다. 예를 들면, 회화에 그려진 어떤 대상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오히려 그것을 해명하려고 한다. 이러한 미에 대한 해명은 언어적인 도발이다. 또한 묘사대상을 동정(同定)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말에 의해 미에 도전하려고 한다. 동정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변이를 오인하기 쉽다. 색채 변이나 약간의 형태의 변이를 중대시하고 별종이라고 판단하고 버리거나 비슷한 별종을 동일시해서 버리거나 한다. 다시 말해, 미는 그것을 말에 의해 포착하려고 시도하고 싶어지는 매력이며 동시에 어떤 말로도 그것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미인 것이다. 말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라이프니츠를 필두로 근세 철학자들이 미에 부여한 대표적인 규정이지만 이러한 적극적인 의미에 있어서 이해해야 한다.

 

키테라섬의 순례, 장 앙트완 와토(Jean-Antoine Watteau)

미는 대상의 성질로 지각된다. 장 앙트완 와토(Jean-Antoine Watteau)의 《키테라섬의 순례》의 저녁놀이 아름답다고 하면서 ‘A씨는 미인이다’라는 것과 같다. 따라서 미를 객관적이며 일반적인 특질이나 구조에 의해 정의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시도이다. 고전적인 대표적 정의는 비례에 의한 것과, 빛의 은유에 의한 것이다. 전자(前者)는 피타고라스파에 의한 음률의 이론과 그리스어로‘카논(canon, 척도)’이라는 인체비나 황금비의 이론 등에서 볼 수 있다. 또한 후자는 플라톤파가 영원한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플라톤 자신에게도 윤회하는 혼의 천상에 있어서의 생에 대해 언급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미는 그때 그것을 본 우리들의 눈에 찬연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 양자는 소박한 이론이라고 할 수있다. 그러나 각각 어떤 흥미 있는 특질을 인정할 수 있다.

우선 비례설이지만 주로 음악과 건축에서 형성되어 온 이론형성의 배후에는 경험의 집적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음악의 경우에서 말하면 관악기 관의 길이(바꿔 말하면 구멍의 위치)나 현악기의 현(弦)의 길이(현을 억제하는 손가락의 위치)를 익히는 가운데에 서서히 찾을 수 있었던 법칙이며 수비(數比)에 의해 표현되고 있는 점에서 지극히 객관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특히 음악의 경우 협화(協和)의 관계에 관해서 거의 일의적인 귀(耳의) 판단을 포착하고 있어서 객관적 규정을 대표적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협화음에 대해서 절대적인 확실성을 쟁취했다고 해도 악곡 전체의 미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한계는 모든 객관적 규정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이다. 다만 그것은 실천 지식이 실제로 작가에 있어서 유익한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규정에 결정하지 않는 여러 가지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비례가 그것들을 활용하는 지침이나 단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 빛의 은유는 미의 가장 현저한 특질을 강조하고 있는 것만으로 미는 미라는 동어(同語) 반복이 있지만, 상술의 객관적 규정의 한계를 인식한 뒤에서의 정색이라고도 보인다. 적어도 그것이 매력이 없는 것은 아무리 객관적으로 정리된 형태를 하고 있어도 미가 아니라고 하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는 점에서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같은 대상의 특질로부터 미를 규정하려고 해도 비례설과는 다르며, 보는 사람에게 대한 효과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 점에서 미의 살아 있는 측면을 포착할 수 있다.

 

근세의 미학은 시점을 역전시켜 미를 주관적인 측면에서 규정하는 길을 선택했다. 다시 말해, 미의 대상의 특징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는 마음의 특질에 의해 미를 정의하려는 공략법이다. 대표적으로 칸트의 이론으로써 그의‘취미판단’에서 제1계기(질)’로 본 ‘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취미와는 일체의 무관심한 어떤 대상이나 표상방법을 만족·불만족에 의해 판정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만족 대상을 가리켜서 미라고 한다’.

이것은 미를 대할 때 특정한 태도에 의해 규정하는 것이다. 근대철학의 관념론적 경향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것을 참된 현실로 인정하려고 하는 동향에서 생긴 입장이다. 확실히 의의가 있는 실제로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는 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따져 볼 때, ‘우리들의 태도를 제어하면 대상의 여하에 관계없이 일체의 물질이 모두 미로 지각된다’는 생각을 알 수 있다. 확실히 정관적인 태도는 그것이 만족을 주는 것이며 완만한 의미라면 무엇을 보아도 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후의 예술의 제도화의 동향에서 뒤바뀐 사태가 뿌리내린 면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감탄을 강요하는 거대한 미를 잊은 결과이며 사실은 미가 우리에게 정관적인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다.

 

이상 두 가지 입장의 중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객관적인 규정이면서 주관적인 경험으로 포착할 수 있었던 특질을 대상에 투영시킨 것으로서 상당히 유력한 관점이다. 상술(上述)의 빛의 은유에서도 이미 그 성격이 나타났다. 가장 단순한 것으로서는‘다양에 있어서의 통일’이다. 다양도 통일도 지각의 함수로 밖에 인지할 수 없는 객관적 특징이다. 보다 의미있는 정의로서는‘이념의 감각적 현현(顯現)’이나‘현상(現象)에 있어서의 자유’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념도 자유도 정신에 의해 포착할 수는 없다. 이것들의 정의는 감각적 소여에서 또는 정신적 의미나 자유정신이 파악된다고 하는 예술작품의 체험이나 사람의 행위에 언급하는 경험을 모델로 세워진 것으로써 이 대립적인 측면을 대상의 특질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유의미라고 생각하는 체험으로 출발하고 있는 만큼 무의미한 규정에 빠지는 것을 모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순수하게 주관적인 규정의 일면성도 모면하고 있으며, 미의 체험 특유의 긴장을 포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복잡한 뉘앙스를 가진 예술작품을 체험하면서 그 작품이 미인가? 라는 문제가 제기됐을 때는 그 작품이 걸작인 것에는 이의가 없을 수 있겠지만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에는 저항을 느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의 개념에는 가치에 대한 계기뿐만 아니라 어떤 독특한 질감(물질의 성분을 정하는 차이)이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미와 같이 직관적으로 지각되는 가치로서는 우아, 숭고를 필두로 비극적, 희극적인, 그리고 더욱 부정적인 가치가 있다. 이 정성차이의 레퍼토리(Repertory)는 미적 범주, 또는 미적 개념으로 불린다. 즉, 미를 확장한 것은 ‘미적인 것’으로 총칭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개념 사이의 종차(種差)가 상술의 정성차이이기 때문에 미적인 것에는 정성차이가, 미에는 가치가 특히 우세한 성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미적 범주론이 형성되어 온 18세기에 있어서는 주의(注意)가 미라는 일원적(一元的)인 가치로부터 이 정성차이로 이행되어가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것은 예술사의 조류가 미라는 보편적인 가치로부터 작자의 개성표현으로 움직여 간 것과 조응(照應)하고 있다. 이 점을 눈여겨보면 미는 과거의 개념이다. 그러나 현재에도 정성차이를 일시적으로 괄호에 넣고 ‘넓은 의미로’미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많다. 그리고 이러한 용어법은 예술에 있어서 소재나 수법 등의 일체의 개별성을 사상(捨象)하고, 그 창조성에 주목하는 표명이며, 또한 미의 힘을 강조하는데 뿌리 내리고 있다.

 

미를 정의하거나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하는데 복잡하게 휘감기기 쉬운 것은 그것이 원래 형용사인 것에서 유래한다. 명사는 대체로 일정한 물체를 가리키고 있어서 일의적인 명료성을 가지고 있지만, 형용사는 각양각색으로 대상에 분산되어서 비로소 인정을 받는 속성이 있다.

특히 ‘아름다운’과 같은 형용사는 주관적인 판단을 계기를 포함하고 있어서 제1성질이나 제2성질이라는 객관적 성질과는 다르다. 또한 이 판단은 대상의 제1성질이나 제2성질을 근거로 행해진다. 거기에서 정확히 제2성질이 제1성질에 근본으로 하는 미의 성질은 제1성질과 제2성질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제3성질’이라고 불리는 것도 있다. 그러나 미적인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대상의 객관적 성질만이 아니다. 회화를 예로 하면, 형이나 색에 의해 표현되어 시사되고 있는 대상의 개념, 이야기, 문화권이나 개성과 같은 여러 가지 정감적·정신적인 코노테이션Connotation) 등을 이해해서 처음으로 그 미를 포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종교화는 그 종교성에 있어서 두드러질 때 아름다운 것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 미는 일체의 가치를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감성적인 표식이다. 미의 본연의 자세를 말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야스퍼스의 용어인 ‘包越者(das Umgreifende)’가 가장 적절하다. 감각적·정감적인 제성질이나 제가치를 전제로 미는 초월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모두 생생하게 포착하지 않으면 미는 나타나지 않는다. 상술한 정의에서 다룬 ‘단적인 완전성’과는 이러한 종합적인 가치적 성질이 있다.

이 포월성 개념은 소위 미의 보편성 논의에 대하여 하나의 해답을 초래한다. 확실히 미의 정의에 변함이 없는 것도 어떠한 것을 미라고 볼 것인가에 있어서 문화적·시대적·개인적인 편차가 있을 수 있고 문화혁명의 시기에는 미관(美觀)이 격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상(現象)의 다양성을 근거로 미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은 경솔하다. 문화의 국경을 넘을 수 없는 예술미가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다양성은 여러 가지의 미술민속학이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특수성은 미를 구성하는 제성질·제가치에 있어서이며 포월자로서의 미에는 그것에 한해서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족에 의해, 개인에 의해, 미라고 인정하는 것은 각양각색이여서 직관되는 훌륭함이 있다고 하는 점은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이다.

 

미는 일체의 가치를 포월(包越)한다. 따라서 소위 미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은 만약 그것이‘미는 가치와 무관계’라고 하는 의미라면 미의 실태를 왜곡하거나 혹은 그 개념 내포를 너무나 편협한 동시에 빈곤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진(眞)이나 선(善)과의 관계에 대해서 논급해 두고 싶다. 우선 진과의 관계에서 미와 진을 분리하는 주장의 중핵(中核)에 있는 것은 미와 결부시킬 수 있었던 ‘진실다움’과‘가상(假想)’의 개념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이 경우에 ‘진’의 개념 바로 그것이 단순한 사실이라고 하는 지극히 평판(平板)한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사실과의 일치를 진이라고 보는 것은‘조응설’이라고 하는 ‘진’의 고전적인 개념이지만, 이 사고방식에서의 ‘진’은 명제 검증에 지나지 않은 것이고 ‘진’을 경험하는 본연의 생각은 아니다. 예술에 있어서 진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검증의 필요성이 아니다. 사실 이상으로 완전한 것, 적극적으로‘진짜’라고 생각되는 질이며, 그러한‘진’은 대부분 미와 불가분한 것이다. 실재에 대한 가상의 개념은 진실다움에 상당(相當)하는 그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독일어의 미(Schön)가 가상(Schein)과 같은 근원어(根源語)라는 사실을 지적해 두고 싶다. 이 Schein은‘보다=가상’과 동시에‘빛’을 의미하며 상술에서 말한 빛의 은유에 속한다. 이 개념의 연관에서 보면 미는 가상임과 동시에 빛이며 그 빛이 우리에게 대한 설득력이 된다.

미와 선의 중합(重合)은 보다 용이하게 이해된다. 도덕미의 사실에 주목하면 거기에 도덕적인 선이 직관상(直觀像)에 주어졌을 때, 미로서 빛나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미와 선을 관련되게 만드는 것은 사상적으로도 진귀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18세기의, 특히 영국의 예술사상은 미학을 도덕론에서 포착할 수 있다. 특히 인간의 행동을 표출하는 예술(문학, 연극, 영화, 무용, 음악이나 회화)이 선을 사상(捨象)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그리고 그 대부분 미는 선과 별개로(예를 들면, 선은 내용, 미는 형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선의 완전성이 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하학 모양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도덕적 감성없이 미적 판단이 행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화려한 미를 좋아할 것인가, 수수한 고담(枯淡)한 미를 좋아할지의 취미는 분명히 도덕적인 태도와 같은 동근(同根)인 것이다. 미를 인정하는 체험에 존재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관계이며 자세다. 다른 제가치의 관계에 있어서의 미의 포월성을 포착한 사상으로서는 기능주의 미학이 있다.

예를 들면 바우하우스의 조형과 같이 의자를 일체의 장식을 배제하고 그것의 기능만을 추구했을 때 아름다운 형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인공품에 있어서는 기능이 그대로의 개념 즉, 본질 규정이기 때문에 기능주의 미학은 완전성에서 미를 인정하는 입장이라고 말해도 좋다. 기능주의는 통례적으로 장식을 부정한 현대적인 디자인의 이론만 여겨지고 있지만 미학적으로는 정통적인 사상의 하나라고 볼 수 있고, 반대로 그 입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는 미의 포월성 이외에는 없다.

바우하우스 조형 1
바우하우스 조형 2

플라톤 이래 미는 자주 사랑과 결부시켜 생각되어 왔다. ‘연애에 대해서라는 부제로 플라톤의 대화 편 향연(饗宴)의 주제는연애의 신을 찬양하는 연설을 서로 경쟁하고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무당 데이오티마의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육체적·정신적으로 어떤 연령에 이르면 출산을 열망한다. 그러나 출산하기 위해서는 미적 개념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을 언급했을 때 출산이라는 열망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이렇게 하여 정신적으로 임신 중인 자는 아름다운 것을 언급하고 철학적인 지식, 기술적인 발명품 등을 만들어 낸다.’

미는 창조가 필수적인 매체지만 미를 주제로 해서 사랑을 조목조목 쓰고 그것에 의해 창조 활동을 매개하게 된다. 이 사상을 전개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예술작품이며, 그것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면 다음 창조를 자극하고 거기에서 미의 연쇄가 시작된다. 이러한 미의 창조성은 예술창조의 일면을 밝히고 있다. 확실히 예술가들이 창작의욕에 의해 구상을 이해해 온 것은 아름다운 여성이거나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에 있어서의 라우라(Laura), 베를리오즈(Louis Hector Berlioz)에 있어서의 스미손, 아름다운 자연이거나 또한 예술작품이거나 했다(들라크루와에 있어서의 섹스피어, 보들레르에 있어서의 들라크루르와). 미의 창조성은 또한 창조과정과 작품을 연결하지 않고 작품과 해석을 연결하여 창조성의 연환(連環)을 만들어 낸다. 예술작품의 해석은 창조성을 취지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잠깐, 어려우신가요! 글에 사용된 용어 설명드려요!!!


인물, 외래어 색인

  • 고담(枯淡) : 서화, 문장, 인품 등이 저속하지 않고 아취가 있음.
  • 뉘앙스(nuance) : 색조·명암·형태·정취 등에 대한 표현상의 서로 다른 미세한 특색. 일반적으로 뉘앙스라고 할 경우, 소리·의미·감정·언어 등의 미세한 차이를 말한다. 미술상의 미세한 차이를 언어개념으로 표현하기란 매우 까다롭다. 예를들어 색조의 미세한 차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복잡미묘한 빛깔의 변화를 들 수 있다. 빨강이라도 연한 핑크색에서 진홍색까지 많은 중간색의 이름이 있지만, 색상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채도·명도까지 아울러 고려하면 빛깔에 따라 붙여진 색 이름은 무의미하다. 이와같이 미세한 색채의 변화·차이를 색의 뉘앙스라고 한다. 더 나아가 색의 여러 뉘앙스를 포함한 색의 미세한 단계적인 배치를 감(gamme)이라고 한다.
  • 들라크루아(Delacroix, Ferdinand Victor Eugène, 1798-1863) 프랑스의 화가.
  • 라우라(Laura) : 프랑스에서 개발한 장미로 빨간 빛이 도는 밝은 주황색의 꽃이 피는 직립성 낙엽 관목 품종이다.
  • 라이프니츠(G0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1716) 독일의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신학자. 신학적ㆍ목적론적 세계관과 자연과학적ㆍ기계적인 세계관과의 조정을 기도.
  • 로버트 로젠블룸(Robert Rosenblum, 1927-2006)뉴욕에서 태어나 퀸즈 칼리지와 예일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1956년에는 뉴욕대학교 미술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큐비즘과 20세기미술(1960년), 18세기 후반 미술의 변형(1967년), 현대회화와 낭만적 전통:프리드리히에서 로스커(1973년), 19세기미술(H·W·Janson, 1984년 공동저술)을 출판했고, 비정식 작품을 포함하고 표준연대순 주문거부와 같은 큐레이터 관행의 혁신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 바우하우스(Bauhaus) 1919년 건축가 그로피우스를 중심으로 독일 바이마르에 설립된 국립 조형 학교. 공업 기술과 예술의 통합을 목표로 하여 현대 건축ㆍ디자인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1933년 나치스의 탄압으로 폐쇄되었다.
  •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 샤를은 리옹 왕립기숙학교를 거쳐 루이 루그랑 학교에 입학했으나, 사창가를 드나드는 등 방종한 품행으로 인해 퇴학당했다. 『악의 꽃』을 출간하기 전, 미술비평『1845년의 살롱』을 통해 비평가로 먼저 데뷔했다. 1857년 『악의 꽃』 초판을 출간하였으나 외설성을 이유로 수록된 시 101편 중에 6편이 삭제되고 벌금형을 받았다. 1861년 40여 편을 추가하여 2판을 냈다.
  • 베를리오즈(Louis Hector Berlioz, 1803-1869) 1803년 12월 11일 상 탕들레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플루트와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작곡도 시작했다. 1828년에 시험을 치러 2등상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가곡 「클레오파트라」를 작곡, 이로써 1830년에 로마대상인 1등상을 획득하여 이탈리아에 유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베를리오즈의 걸작 「환상 교향곡」은 1830년에 작곡되었다.
  • 사상(捨象) : 많은대상등에서현상의특성, 공통성이외의요소를버림
  • 섹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서양문학의 비조로 여겨지는 호메로스와 비슷한 점이 많다. 역사상 최고의 작가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생애가 온통 의문투성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수많은 셰익스피어 전기‘5퍼센트의 사실과 95퍼센트의 억측으로 이루어진 것도 그런 연유다.
  • 소크라테스(B.C.470?~B.C.399)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문답을 통하여 상대의 무지(無知)를 깨닫게 하고, 시민의 도덕의식을 개혁하는 일에 힘썼다. 신(神)을 모독하고 청년을 타락시켰 다는 혐의로 독배(毒杯)를 받고 죽었다.
  • 야스퍼스(Jaspers, Karl, 1883-1969) 현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와 함께 독일 실존주의의 대표자로 불린다. 처음 정신병리학의 연구자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연구 내용은 그의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정신병리적 현상 속에서, 인간의 개성에 대한 강한 탐구가 나타난다고 생각하여 철학적 사고의 원천을 거기에서 찾았다. 합리적인 과학 연구란 참된 존재의 암호를 취급하는 것이고, 이 암호를 해독하여, 합리적인 지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세계를 지배하는 비합리성을 명확히 하는 것에 최고의 지(知)가 있다고 한다. 철학은 즉 ‘암호 읽기를 내용으로 하여 최고의 지를 나타내는 것을 과제로 하고 있다.
  • 연환(連環) : 고리를 여러 개 잇대어 꿴 사슬.
  • 와토(Jean-Antoine Watteau, 1721경) 와토는 루벤스와 반다이크 같은 플랑드르 미술 전통의 영향 아래 성장했다. 1705년경, 와토는 클로드 질로(Claude Gillot)의 작업장에서 연극 무대를 장식하고 명작을 모사하며 자신의 양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1712년 왕립 미술아카데미의 회원이 된 와토는 1717년 <키테라 섬의 순례>를 아카데미의 입회작으로 제출했다. 와토의 이 그림은 기존의 어떤 장르에도 적합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카데미는 숲이나 정원을 배경으로 춤추거나 산책을 하는 세련된 옷차림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러한 그림을 지칭하기 위해 ‘페트 갈랑트(fête galantes)’라는 새로운 용어를 고안했다. 와토는 18세기 중반 이래 프랑스 평단에서 다른 로코코 화가들과 함께 경박하고 인위적이고 퇴폐적인 화가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현재는 프랑스 혁명 이전, 18세기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 칸트(kant Immanuel, 1724-1804) 독일의 철학자. 사고를 위한 이마는 침착한 유쾌함과 기쁨의 자리였다. 말에는 풍부한 사상이 넘쳐흘렀고 농담과 재치가 장기였다. 알만한 가치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어떠한 음모나 편견 그리고 명성에 대한 욕망도, 진리를 빛나게 하는 것에서 그가 조금이라도 벗어나도록 유혹하지 못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도록 부드럽게 강요했다.
  • 코노테이션(connotation synthesizer) : 의미가 명확하거나 함축적인 형태, 문구, 음절을 조합하여 그 가운데서 이름을 짓는.
  •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 이탈리아의 시인ㆍ학자(1304~1374). 초기 인문주의자의 한 사람으로, 작품에 <칸초니에레(Canzoniere)>, 서사시 <아프리카>가 있고, 저서에 ≪고독한 생활에 대하여≫ 따위가 있다.
  • 포월성(包越性=包括) : 미의 본연의 자세를 말로 표현하기 위해서 야스퍼스의 용어인 ‘包越者(das Umgreifende)’를 전문적으로 사용한 언어. 이성적인 것은 비이성적이라는 타자(他者)가 없으면 사유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도 이 타자가 없으면 이성적인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성과 실존 진리를 위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무한한 탐구 정신인 근대 과학의 정신,이성을 야스퍼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주관으로서의 ‘우리들인 포괄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일체가 ‘하여야 할’ 포괄자이다. 그러나 세계를 단지 의식의 대상으로 아는 것에 만족할 수 있는가? 단적으로 만족할 수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두 말할 것 없이 거기에 완결은 없다. 악(惡)이 무한한 세계인 것이다. 극히 확실하게 보이는 세계는 그 근거에서 그 방향에서 지반(地盤)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인 포괄자’즉, 이성인(호모 사피엔스)의 외부에 있는 내재자에 대하여 초월자인 포괄자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김희보)
  • 플라톤(Platon, 428-347/48 B.C.) 그리스 철학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사상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대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인 아카데미를 개설하여 생애를 교육에 바쳤다. 대화편(對話篇)을 다수 쓰고, 초월적인 이데아가 실재(實在)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전개하였다.
  • 피타고라스(Pythagoras, (B.C.580?~B.C.500?))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ㆍ수학자ㆍ종교가. 수(數)를 만물의 근원으로 생각하였으며,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발견하여 과학적 사고를 구축하는 데에 큰 구실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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