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시.사 레터 29회 (2021.11.10.) 안녕하세요. 패션매거진 『마리끌레르』에서 일하고 있는 유선애라고 합니다. 매달 누군가를 만나 질문을 하고 경청하는 인터뷰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인터뷰는 내 쪽에서 부지런히 쓸어모으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요. 내 쪽에서 퍼낼 것이 없을 때, 마주앉은 이가 꺼내 보이는 것에 비해 내가 지닌 것이 없을 때 대화가 빈약해진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그 부끄러운 앎이 새삼 크게 다가오는 날에 내 몸 가까이에 있는 시집을 무작위로 집어 펼칩니다. 슬픔과 기쁨 사이, 복잡한 표정으로 멈추어 선 행간에서 그 무엇도 손쉽게 지레짐작하지 말 것을 배우고요. 시가 품은 여백 넓은 사유 덕분에 하루치의 안위만을 헤아리는 시야가 잠시 넓어지는 듯한 경험도 합니다. 오늘 소개할 시 역시 며칠 전 제 책상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여 있던 시집에 실린 작품입니다. 유선애 에디터가 사랑한 첫번째 시💌 오늘의 시(김현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무엇보다 우리 삶이 늘 시적일 필요는 없다 책상에 볕이 들고 어둠이 스밀 때까지 두 사람이 궁리하는 것이 둥근 나무의 일몰이라면 긍지라는 건 경언아 송창식을 들으며 홀로 맹물에 밥을 말아먹고 눈물 앞에 허수아비처럼 서 있게 되더라도 이해하지 말자 둘이라는 건 상필아 출근 때문에 리버풀 경기를 포기하지 말고 꽃이 활짝 피면 꽃 사진을 찍는 아저씨가 될지언정 헤아리지 말자 기쁨이라는 건 빛을 수집하여 글자로 채울 수 없는 여백에 두고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을 때 집 생각이 간절해진다 완성이라는 건 빵 옆에서 세상 진지한 시인이랑 친구 먹으니 시집도 선물받는다 얏호 외치는 그해 여름 미소가 예쁜 갱 짝눈으로 세상의 평화를 기원하는 유뽕 사람이라는 건 졸릴 때 자고 배고플 때 먹고 일할 땐 일하고 놀 땐 놀게 하소서 아픔 없이 데려가소서 믿음이라는 건 의자에게 빚진 생각만큼 의자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오래 말하지 않아도 무섭지 않고 친구들과 작은 운동장에 모여 일광욕하고 어제오늘 부쩍 산다는 건 뭘까, 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이라는 건 좋은 날씨는 천사와 함께 온다 꿈에서는 알아서 자라는 사랑을 꿈꾸고 잠들기 전까진 알 수 없는 사랑을 가꾸길 슬픔이라는 건 비록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여전히 암흑일지라도 걱정 말고 불을 밝히고 탁자 위에 놓아두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건 오늘의 집에 두 사람이 들고 온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들고 오지 않은 것 덕분에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다가간다 그것이 두 사람이 함께 쓰는 시다 이제 행복을 셈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습관적으로 행복의 여부를 자문하던 일도 그만두었습니다. 행복을 확인하는 일이 중요치 않게 된 것은 스스로 느끼는 행복의 실체를 조금 알게 된 덕분인데요. 제게 행복의 상태는 무음입니다. 마음의 안팎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순간에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고요의 순간을 효율적으로, 치밀하게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 시를 만났습니다. 이 시는 제게 행복의 순간을 몇 개 더 가르쳐주었습니다. “의자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오래 말하지 않아도 무섭지 않고” “친구들과 작은 운동장에 모여 일광욕을 하”는 순간들이 많아지길, “알아서 자라는 사랑을 꿈꾸고/ 잠들기 전까진 알 수 없는 사랑을 가꾸”길, “비록/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여전히 암흑일지라도/ 걱정 말고/ 불을 밝히고 탁자 위에 놓아”둘 수 있는 마음이 자주 이어지길 바라봅니다. ‘긍지’ ‘이해’ ‘기쁨’ ‘믿음’처럼 결코 만져지지 않을, 내 것 같지 않은 거대한 말 앞에서 작아질 때, 시인이 그러했듯 작고 섬세한 정황들을 만들며 살고 싶어집니다. 💘 막간 우.시.사 소식: 첫 시집을 낸 두 시인의 인터뷰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가 있고』를 출간한 이동욱 시인,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를 출간한 박세랑 시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두 시인 모두 얼마 전에 첫 시집을 냈다는 것! 첫 시집이란 두 분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출간을 기념하여 5문5답 인터뷰를 준비해봤습니다. 유선애 에디터가 사랑한 두번째 시💌 ☆생일─기쁨의 두부고로케 (김현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밤에는 안개 속에 서서 생각했어요 요즘은 생각을 많이 해요 이곳에서도 머리카락은 자라고 옷은 작아지니까요 아침에는 엄마 나는 두부 생각해요 왜 있잖아요 그날 엄마랑 나랑 해먹었잖아요 두부를 으깨서 채소를 넣고 동그랗게 빚어서 튀겨먹었잖아요 막 웃음 나는 두부고로케 그곳에서는 한 번도 두부에 관해 궁리해볼 시간이 없었는데 씻을 때는 랩을 해야 했으니까 과학적인 교복을 입어야 했으니까 운동장을 누벼야 했으니까 두 발은 저절로 달려야 했으니까 형한테 맛있는 걸 만들어줘야 했으니까 엄마 옆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비밀이어야 했으니까 파란색을 보면 마음이 펼쳐져서 다리가 길어졌으니까 그냥 웃기에도 바쁜 나이였으니까 그런데 엄마 나도 나이를 먹긴 먹나봐요 (이런 말 엄마 앞에서 해서 미안) 안개를 앞세우고 달려나가는 것도 좋지만 두 손을 모으고 서서 안개 속의 풍경을 보는 일도 가슴에 들어와요 생각은 펼칠수록 펼쳐지니까요 엄마가 매일 새벽기도를 나가서 형 대신에 나를 위해 기도하면 어떡하지 엄마는 야근하고 와서도 슬픔의 걸레질을 멈추지 않고 국자마다 눈물을 떨어트릴 텐데 거기에 밥을 말아놓고 식어버릴 텐데 잘 먹었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아들의 말이 적힌 종이가 식탁 위에 없을 때 엄마는 어떻게 엄마답지 않은 표정을 지을까 야야 투레를 보고도 야야 투레를 못 보는 엄마에게 저 선수가 야야 투레야, 라고 말해줄 사람은? (형, 형이 나 대신 엄마에게 잘 말해줘. 형은 언어천재니까!) 형은 내가 좋아하던 옷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이곳으로 모두 보내준 걸까 그 작은 옷을 그 큰 옷을 그 웃는 옷을 그 소란스러운 옷들을 형은 지금도 기숙사에서 공부하는 사람일까 조용한 형은 약한 사람들의 역사를 알려주는 진실한 사람이 되겠지 형에게도 어린 형이던 시절이 있고 형은 동생이랑 보드게임도 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아빠는 지금도 나한테 잘해준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할까 내가 아빠 마음 먹고 날다람쥐처럼 산을 잘 탔던 것도 모르고 (아빠, 엄마 옆에서는 매일 잘해준 게 많은 아빠로 있어 줘) 아빠 나는 아빠 등이 나랑 가까워서 넓은 힘이 났는데 내 등도 아빠에게 가까웠을까 엄마, 봐봐 나 이렇게나 생각이 많아요 어른 되나봐 엄마, 두부 좋지요? 두부를 가만히 본 적 있지요? 내 생각 하면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희고 물렁물렁하고 약하고 따뜻하고 살아 있는 거 나 같고 엄마 같고 아빠 같고 형 같고 친구들 같은 거 한입 먹으면 슬픔이 사라지고 한 모를 다 먹으면 새사람이 되어버리는 거 엄마, 두부를 먹으면 새사람이 된다는 게…… 생각해보면 엄마, 아빠, 형, 친구들아 두부를 먹을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는 아무래도 미래를 가진 종족들인가봐 나? 나는 나에게도 미래가 오지요 엄마, 나도 이제는 사람이에요 이런 말을 하면 엄마는 너는 어쩌면 이렇게 예쁘냐고 하겠죠 봐요, 나 미래 알아요 그러니까 엄마 두부를 먹을 때는 내 생각 우리 아들 같다 너는 멀리 간 게 아니다 나는 엄마 두 손에 엄마의 두부에 엄마의 된장찌개에 엄마의 시금치무침에 엄마의 불고기에 엄마 곁에 아빠 곁에 형들 곁에 친구들 곁에 미래처럼 두부고로케처럼 엄마, 나 지금 걸어가요 그곳으로 다 모인다고 했으니까 혼자는 아니에요 내 옆에 작고 파란 강아지 이름은 한슬 엄마가 예쁘다고 했잖아요, 그 이름 그곳에서 버려진 강아지라는데 병들어서 이곳에 온 강아지라는데 나는 좋아 나도 처음에는 약한 아이였으니까 한슬이가 다 크면 나도 엄마랑 아빠랑 같은 크기의 마음을 갖게 되면 좋겠어요 그게 내 첫번째 생일 소원 그리고 엄마 언제 와용? 더는 못해줘서 미안해 아빠 같이 수암봉 못 가게 돼서 미안해 형 라면에 계란 넣고 끓여주지 못해 미안 친구들아 이 형이 랩 못 들려줘서 미안 나 앞으로는 미안하다는 말 안 들려줄래 마지막으로 모두 미안 자, 그럼 이제 아무도 미안해하지 않기 미안한 눈빛은 속눈썹 뒤로 숨기기 내 두번째 소원 엄마, 엄마라고 부르면 왠지 두부라고 대답할 것 같은 엄마 여기서 거기까지 안개가 길어요 생일 초에 불을 붙여주면 내가 그 빛 보고 갈까요 가서 얼른 후 불어 끌게요 가면서 노래할래요 나는 기쁨의 생각이니까 나는 기쁨의 진실이니까 나는 기쁨의 트레이닝복 나는 기쁨의 발냄새니까 나는 기쁨의 생일케이크 기쁨의 우주과학자 기쁨의 쇼미더머니 나는 기쁨의 2월 19일 나는 기쁨의 영만이니까 (모두 지금 소리질러!) 월간지 마감은 매달 15일 전후에 이뤄집니다. 4월 16일은 5월호 마감의 마지막날이었습니다. 보통 마감날에는 마감만 하기 때문에 책상 앞에 앉아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하는데요. 한데 그날은 왜 그랬는지 점심을 먹겠다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동료들과 콩나물국밥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식당 TV에서는 뉴스 속보가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밥을 주문할 때만 해도 학생들이 탄 배가 가라앉고 있다고 했고, 배의 사 분의 일 정도가 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이내 뚝배기를 비워갈 때쯤 승객 전원이 구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콩나물국밥을 한 술 두 술 꼭꼭 씹으며 물밑으로 가라앉던 이들을 지켜보던 당시의 나를 떠올리면 지금도 목 끝이 꽉 조입니다. TV 화면에 시선을 둔 채 적당한 크기의 깍두기를 골라 집어내고, 동료들과 평소와 다르지 않게 나눴던 대화들을 곱씹다보면 내가 나를 증오하는 일을 멈추기가 어려워집니다. 평소대로 사무실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하루를 보냈다면 나는 조금 덜 수치스러울까요. 내 삶이 누군가에게 크게 해롭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때에, 어쩌면 그렇게 살 수도 있을 것만 같다고 착각하던 때에 이제 갓 출간한 시집에서 다시 그날을 만났습니다. 계속 이야기하고 글로 남겨주는 이들이 있어 감사하고 부끄럽습니다. 📢 다음주 시믈리에를 소개합니다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이동엽 바리스타 다음주에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분은 이동엽 바리스타입니다. 일산에서 커피사촌로스터스라는 마이크로 로스터리숍을 운영하고 있는 이동엽 바리스타가 여러분께 권하는 시 두 편을 기대해주세요. 그럼,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