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고을에서]


하얀 빈터


이재철 목사
 
저희 부부가 살고 있는 산간마을에는, 지난 설날 전후로 엿새 동안 밤낮으로 눈이 내렸습니다. 저희 집의 해발이 높아 겨울이면 많은 눈이 내리지만, 엿새 동안 밤낮으로 연이어 눈이 내린 것은, 이곳으로 낙향한 이후 처음 경험한 일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눈이 내리면 세상이 하얗다가도, 눈이 그치면 이내 녹거나 더럽혀져 버립니다. 그러나 엿새 동안 계속하여 눈 위에 눈으로 덮인 세상은 온통 하얀 빈터로 변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엿새 동안은 그 하얀 빈터를 감히 오염시킬 수 없었습니다.
마루(풍산개)와 지노(시바견)는 눈을 좋아합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눈 속에서 둘이 한데 어우러져 뒹구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즐겁게 해줍니다. 그런 마루와 지노이기에, 엿새 동안 밤낮으로 내리는 눈 속에서 밤과 낮 구별도 없이, 지치지도 않고,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눈이 일군 하얀 빈터의 흡인력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누구든 마음껏 뛰놀게 끌어주는 하얀 빈터가 된다면, 그 얼마나 행복하고 멋지겠습니까?
[지금 이 책]


부활이 있기에


어린 딸의 죽음은 그를 지탱하던 신앙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는 의지적 고백과 실존이 다투던 영혼의 깊은 밤. 그를 건져낸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부활장)이었다.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며 아주 조금씩 살아남을 경험하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위로와 회복을 주시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너머 부활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시고, 마침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게 하셨다.

자전적 이야기로 서문을 연 이승장 목사는 그날의 확신 이후 일평생 전한 부활복음의 증거를 이 책에 담았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아홉 가지 주제로 풀어내어, 예수님을 믿지만 생명력과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신자들에게는 복음을 되짚는 기회로, 초신자들에게는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부활 신앙을 소유하도록 인도한다. 각 장의 말미에 제시된 ‘하나님과 나’, ‘그리고 우리’의 질문은 개인 묵상과 소그룹 모임에서 활용할 수 있다.


1장 복음 되짚기 
2장 다시 십자가 
3장 부활을 믿다 
4장 죽음이 끝이라면 
5장 마지막 
6장 부활을 살다 
7장 몸 
8장 그날 
9장 주의 일꾼 


일몰이 아름다운 이유는 밤을 지낸 후 아침 해가 다시 힘차게 떠오르기 때문 아닐까요? 머잖아 저도 해가 기울 듯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소멸하는 나의 육체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제 누추한 일생도 감히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죽음이 찾아와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고달픈 삶을 하직하는 날, 사랑하는 주님의 품에 안겨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소멸했던 나의 몸도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영광스럽고 강한 영의 몸으로 살 것입니다.

_나가며 '부활의 복음 때문에'

[책 이야기]


2025년 2월 13일 윤영휘 교수와의 만남


→ Statesman, 정치가의 길

우리 사회가 여러 가지로 어렵습니다. ⟪윌버포스⟫의 부제목을 고민하다 ‘Statesman, 정치가의 길’로 잡았습니다. ‘Statesman’과 ‘Politician’은 다릅니다. 둘 다 정치가로 번역해야 하는데 ‘Politician’은 좀 나쁜 말이죠. 뉘앙스가 약간 정치꾼의 의미이고, ‘Statesman’은 말 그대로 국가를 이끄는 길을 제시해 주는 큰 인물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정치가가 부족한 게 아니라 ‘Statesman’이 부족합니다. 갈등 비용이 큰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지역으로, 이념으로, 세대로, 젠더로 너무나 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만약 이런 갈등을 통합하려면 아니, 좀 더 나아가 수많은 부조리들을 없애고 청년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며 언젠가 8천 만 동포가 함께 살아갈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Statesman’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딘가에서 누군가 이 책을 읽고 ‘Statesman’이 되고 싶은 꿈을 꾼다면, 현실 정치가들 중에 윌버포스처럼 정파적이지 않고 정치를 추구하는 정치인이 돼야겠다고 결심한다면 너무나 좋을 것 같습니다. 사회에 그렇게 사용되길 바라면서 이 책을 썼습니다.


→ 우리 사회의 노예무역은 무엇일까?

200년 전의 영국과 21세기 한국의 복잡성을 비교할 수가 없겠죠. 어떻게 보면 200년 전이기 때문에 노예무역 폐지라는 내셔널 아젠다가 가능했고, 클래팜이라는 한 공동체가 국가를 변화시킬 수 있었을 거예요. 우리는 다층적 다면적 다종교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사회 복잡성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여러분만이 볼 수 있는 노예무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조 영역에서든 정치 영역에서든, 아니면 가르치는 영역에서든 의료 영역에서든 여러분만이 볼 수 있는 노예무역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같이 개혁해 갈 만한 마이크로 클래팜파가 여러 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분야에서 무엇을 바꾸실 것인지 한번 이 책을 읽고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 교회와 크리스천의 역할

짐 월리스의 《하나님의 정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 세상에는 그릇된 것에 반대만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대안을 찾아 제시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라는 대목이 인상 깊었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비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비판하는 건 매우 쉬운 방법이죠. 조금 더 나아가 대안을 제시하고 또 거기에 대안적인 삶을 스스로 살아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이런 대안적이고 변혁적인 삶을 살아내는 합리화된 크리스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노력을 할 테니 여러분도 노력을 좀 해보시죠.

기자분께서 윌버포스가 노예무역 폐지운동을 성공했는데 그때 교회의 역할은 무엇이었냐는 질문을 하셨어요. 교회는 제도로서의 교회가 있고, 또 한 명 한 명의 크리스천으로서의 교회가 있습니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제도로서의 역할을 했지만, 그때는 자기가 믿는 바를 공적 영역에서 실천하는 크리스천들(복음주의자들)이 한 명 한 명 많아졌습니다. 그것이 노예무역 폐지운동 성공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나라에서도 윌버포스와 같은 ‘Statesman’들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현실 정치에서 그런 사람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못지않게 그런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한 명 한 명 분위기를 바꾸어 가는 크리스천이 늘어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읽기의 순간들]


기억의 교정과 재확인

홍종락, 역자


《실낙원 서문》 무선개정판이 나왔다. 초판이 나오고 10년만이다. 번역자가 《실낙원 서문》을 “독자분들에게 새롭게 소개해 주면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요청에 즐거운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이 책은 선명하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서사시를 소개하는 전반부는 《실낙원》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후반부를 읽기 위해 넘어야 할 관문이자 후반부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일종의 ‘빌드업’ 과정이다. 그런데 내 기억에는 관문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남아 있었다. 역자 후기에서 “잘 안 읽히면 바로 후반부로 넘어가서 독서를 하라”고 권한 것도 그 비슷한 느낌에서 나온 조언이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읽은 《실낙원 서문》 전반부는 《실낙원》 이해에 꼭 필요할 뿐 아니라 분량과 서술방식도 간결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서사시에 대한 설명이 장황하다는 인상은 번역에 공을 들이는 과정에서 남겨진 기억의 왜곡인지 모르겠으나 꽤 과장된 것이었다. 독자가 모든 문장과 거기 담긴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겠다는 부담을 갖지 말고 줄거리를 파악한다는 느낌으로 따라가면 전반부도 얼마든지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루이스가 책을 시작하면서 제시한 일화가 앞으로 내게는 이 책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일화가 될 것 같다. 그는 “서정시를 읽을 때 익숙한 방식으로”, 즉 “좋은 시구”를 찾는 식으로 서사시를 읽으려다 실패한 어느 독자의 흔적이 담긴 《실낙원》 헌책을 소개한다. 이 일화는 서사시라는 양식에 대한 소개가 《실낙원 서문》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와 주제를 파악하는 데 필수적인 것임을 압축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독서에서 내가 막연히 기대하는 바와 기대해야 할 바를 구분해야 함을 상기시켜 주었다.
서사시라는 형식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루이스가 누누이 강조하는 ‘의식(儀式)의 중요성에 대한 지적도 곱씹을 만하다. 신앙이나 삶에서나 위선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고 진실과 자유, 자발성과 자연스러움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도 나름의 덫이 있고 오류가 따라올 수 있는데, 루이스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의식과 형식의 가치는 이 부분에서 큰 도움이 된다.
반면, 책의 본론이라 할 후반부는 내 기억을 저버리지 않았다. 루이스다운 기독교 서적을 기대하고 책을 펼치는 독자들에게 미소와 기쁨을 안겨줄 대목들이 가득했다. 사탄에 대한 설명, 《실낙원》 앞부분에서 지옥에 떨어진 악마들이 보여주는 여러 대응방식, 선악과를 먹은 하와와 아담의 죄의 본질에 대한 설명은 이 책에서 잊을 수 없는 대목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하와가 선악과를 건넸을 때 아담이 어떻게 해야 했을까, 하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은 이 책과 선악과 시험을 먼 옛날의 신화적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나의 문제로 다가오게 만든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그동안 이 책을 소개할 때 마음 한구석에 있던 거리낌을 떨칠 수 있었다. 너무 전문적이라든지 문턱이 너무 높다든지 하는 염려는 접어둬도 될 것 같다. 《실낙원》이라는 탁월한 문학작품을 매개로 이 책은 지혜를 한가득 전해 주고 곳곳에서 현대인의 통념을 재고하게 해준다. 그러니 마음 놓고 펼쳐들고 읽으시길. 뒤로 갈수록 더 재미있고 유익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믿음으로’ 읽어나가다 보면 읽는 보람을 풍성히 맛보게 될 것이다.
[가까이 또 멀리]

예수께서 어느 마을로 들어가시는데 외아들을 잃은 과부가 상여를 따라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과부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란 희랍어 단어는 “창자가 뒤틀린다”는 의미다. 우리는 저 멀리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낮고 천한 땅에서 고통당하는 우리에게 무관심한 추상적인 신 개념으로 생각한다.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창자가 뒤틀리는 슬픔을 함께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 동감하시는 하나님, 함께 통곡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초월자인 동시에 내재자이시다. 하늘에 계시는 동시에 내 마음 안에 계시는 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붙잡는 신학적 균형을 잘 몰라서 오해한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으로 살아 계시면서 온전한 연합을 이루어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자리, 죽음의 자리에도 함께하는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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𝓃𝑒𝓌 거꾸로 읽는 구약(가제)

이 책에 실린 22편의 이야기는 한국 독자들에게 익숙하지만, 다소 의외의 메시지들을 담고 있는 구약 성서 본문을 해설한 것이다. 때로는 공론화하기 어려운 주제들까지 과감히 꺼내어 건설적 토론의 소재를 제공한다.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저자가 소개한 해석들로 하여금 성서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씀을 진지하게 배우고자 하는 이들의 깊은 이해를 돕는 데 있다.

김구원 지음 | 2025년 5월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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