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풀칠러 여러분! 오늘의 에세이를 맡게 된 야호호입니다.

감사하게도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게 되었는데요, 부끄러우면서도 간질간질.. 설레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평소 풀칠과는 다른 느낌으로 맛있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곳에선 어리지 않을 나이지만 일찍 고령사회를 맞이한 팀에 합류한 덕에 막내로 살고 있는 제가 팀에 녹아드는 이야기를 담아봤습니다. 팀원들과 있었던 따뜻한 기억들을 하나하나 그러모아 즐거운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제가 느낀 따뜻함이 읽으시는 풀칠러님께도 잘 전달되길 바라며 행복한 하루에 보탬이 되었으면 해요. 오늘도 행복하게 보내시길!

"오늘은 점심 뭐 먹고 싶노?"

이제 팀장님은 구내식당에 가지 않는 날의 점심 메뉴를 내가 먹고 싶은 것으로 결정하는 게 습관이 된 것 같다. 팀원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나를 향한다. 평균 연령 53세의 팀을 한참 막내인 내가 이끄는 몇 안 되는 순간. 나도 익숙하게 “다들 따라오시라”는 말을 호기롭게 건넨다. 12시가 땡 하자마자 거침없이 목적지를 향해 가면 모든 팀원이 어슬렁거리며 따라온다. 남들이 보기엔 그 모습이 꼭 삼촌들 위세를 등에 업은 조카처럼 보였겠지만. 우리 팀이 공유하는 몇 개의 전통 중 하나, 막내의 점메추(점심 메뉴 추천). 여기에는 소소한 사연이 있다.

아저씨들이 복닥복닥 모여있는 사무실에 처음 합류했을 때 다들 젊은 피가 들어왔다고 즐거워하며 반겨줬다. 그도 그럴 것이 전원 50~60대로 구성된 팀에 30대 꼬맹이가 투입됐으니 얼마나 귀여웠을까. 반면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사무실도, 팀원들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예의 차린다면서 뚝딱거리고 뻣뻣하게 행동하기 일쑤였다. 우렁찬 아침 인사를 시작으로 ‘다나까’ 말투를 장착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고 나면 퇴근길에는 피로가 몰려왔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잔뜩 긴장하며 사무실 생활을 했던 것 같다.

긴장감 속에 하루하루를 지내던 어느 점심시간, 팀장님이 문득 내게 물었다.

“오늘 메뉴는 막내가 정해볼까? 뭐 먹고 싶노?”

불시에 날아온 질문에 부담감이 명치 언저리에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회사 주변에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식당이 뭐 있지? 그동안 다 같이 점심 먹을 때 어디로 다녔더라? 옆 사무실 막내 민욱이에게 물어볼까 고민하던 차에 팀장님이 한마디 덧붙였다.

“진짜 니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말해리, 영감재이들도 젊은 사람 먹고 싶은 걸로 먹어보자.”

부담감을 ‘진짜’ 내려놓고 정한 메뉴는 돈까스였다. ‘영감재이’들에게도 익숙한 경양식 돈까스가 아닌 일식 돈까스. 마침 SNS에서 보고 군침을 흘리며 지도에 핀을 꽂아놨던 식당이 근처에 있었다. 다행히 다들 좋아해줬던 것 같다.

그 뒤로도 종종 팀장님은 내게 점심 메뉴 선정을 맡겼다. 팀원들은 늘 먹던 백반, 추어탕, 보리밥의 무한 굴레를 벗어나 신선한 메뉴들을 먹을 수 있음에 만족해 했다. 자칭 쩝쩝박사였던 나는 지도엔 가보고 싶었던 식당이 꽤 많았고 팀원들도 만족스럽게 식사를 즐겼기에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동시에 나는 사무실에서도 딱딱한 태도를 벗고 점점 능글맞게 너스레도 떨 줄 아는 막내가 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팀장님은 내가 팀에 자연스레 녹아들길 바라면서 먹고 싶은 걸 물어보셨던 게 아닐까.

어느 여름, 아침부터 외근을 나갔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갑자기 문서 창고에서 팀원들이 우르르 나오더니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붙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그들은 내게 고깔모자를 씌우고 ‘오늘생일’이라고 쓰여 있는 티셔츠를 양 어깨에 집게로 집어줬다(티셔츠가 입기엔 작아 이렇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케이크를 손에 들게 하고 다 함께 생일 노래를 불러주셨다. 맞다. 그 날은 바로 내 생일이었다. 어쩐지, 팀장님이 평소에 묻지도 않던 복귀 시간을 물어볼 때 눈치채야 했다. 그 날 함께 나눠 먹은 케이크는 달았고, 생각지도 못한 생일 축하에 눈물도 찔끔 났던 것 같다.

알고 보니 팀원 한 분이 주도해서 준비하신 이벤트였다. 예전이 아들이 생일에 친구들과 이렇게 축하하는 걸 보고 사무실에서도 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영감재이들끼리 하기는 민망했다고 한다. 어디 읍면리 가시면 한창 청년회장 하실 나이에 무슨 영감이냐고 하자 아무튼 그랬다며 껄껄 웃었다. 그렇게 생각만 하다가 내 생일을 계기로 아들에게 오늘생일 티셔츠를 빌려와 이벤트를 준비하신 것이다. 젊은 막내 핑계로 새로운 일을 벌이시는 모습이 어찌나 즐거워 보이는지! 그 뒤로 이 소소한 생일 이벤트 역시 우리 팀의 전통이 되었다.

내가 팀에 합류하기 전 우리 팀의 분위기는 참 무미건조했다고 들었다. 워낙 조용한 성격의 팀원들이 모여있다보니 주변에서 우리 사무실을 부르는 별명이 ‘절간’이었을 정도다. 하지만 내가 들어오고 사무실 분위기가 조금씩 변했다고 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점심 메뉴를 기대하게 되었고, 생일에는 고깔모자를 쓰게 되었다. 젊은 막내가 가져온 변화는 거창하지는 않았지만 사무실을 점점 신선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내년에 퇴직을 앞둔 팀장님과 팀원 한 분이 내가 오면서 말년이 덜 심심하다며 흐뭇하게 웃으셨다. 내가 팀에 적응하려고 애쓴 만큼, 다들 열린 마음으로 나를 받아들이고 나와 함께 변화를 즐기고 계셨던 것이다. 다들 이렇게나 즐겁다면 막내는 앞으로도 선배님들을 더욱 즐겁게 해드릴 것입니다. 다음 점심시간에도 저를 따르실 준비가 되셨나요? 으쌰으쌰!

아매오 : 기존 사무실에 성진 님이 불러일으킨 부드러운 변화와 그걸 받아들이는 팀원 분들의 마음씨가 참…(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비현실적일 정도로 따뜻합니다. 사실 막내에게 메뉴 선택권을 미루는 에피소드는 보통 부정적인 경험으로 이야기 되곤 하는데 귀여운 반전(?)이기도 하고요.

저는 요즘 도시락을 싸서 다닙니다. 그렇다 보니 팀원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눌 일이 아예 사라지더군요. 예전을 떠올려보면 메뉴를 정하고, 식당으로 이동하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먹고, 커피 한 잔 사러가는 짧은 시간을 통해 ‘업무 모드’가 아닌 살짝 풀어진 모습을 비출 수 있었는데 말이죠. 그렇게 만들어지는 관계가 있고 그것은 업무에 도움이 되는데다 생각보다 프라이버시를 침범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야 어렴풋이 느낍니다.

물론 ‘점심시간만큼은 혼자 편하게 보내고 싶다’라는 분도 많지만, 뭐랄까, 저 자신을 돌아보면 애초에 그러한 방어기제를 지나치게 세워둔 상태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냥 좀 열어두고 이 사람들도 다 나와 같은 사람이다 여겼으면 어땠을까. 그럼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