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55회 (2022.05.18)
▲ 문성현 선생님이 직접 찍은 사진

안녕하세요, 아이들을 가르치고 시를 쓰는 교사 겸 시인 문성현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니 그 아이들 마음에 남을 문장을 직접 쓰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한 일이 어느덧 책을 내고, 이렇게 이름 앞에 감히 시를 붙이는 데까지 왔습니다. 가끔 아이들을 보낸 오후엔 빈 교실에 앉아, 지금쯤은 제 문장이 그들 마음에 남을 수 있을지 되묻곤 합니다.


오늘은 여름이 성큼 다가온 듯한 날입니다. 학교 복도의 저편에선 아이들 냄새가 덥게 풍겨오네요. 이런 날은 미욱한 제 문장 대신 떠올리고 싶은 시들이 있습니다. 여름밤과 여름낮이 생각나는 보드랍고 청량한 시들이에요. 한편으로는 <우리는 시를 사랑해>를 함께 읽는 애인이 떠오르는 시들이기도 하지요. 그 시들을 미풍에 실어 독자분들께 보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초여름의 향기가 폭폭이 내려앉길 바라면서요.

💚문성현 선생님이 사랑하는 첫번째 시💚



달의 왈츠 (박서영,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당신을 사랑할 때 그 불안이 내겐 평화였다. 달빛 알레르기에 걸려 온몸이 아픈 평화였다. 당신과 싸울 때 그 싸움이 내겐 평화였다. 산산조각나버린 심장. 달은 그 파편 중의 일부다. 오늘밤 달은 나를 만나러 오는 당신의 얼굴 같고. 마음을 열려고 애쓰는 사람 같고. 마음을 닫으려고 애쓰는 당신 같기도 해. 밥을 떠넣는 당신의 입이 하품하는 것처럼 보인 날에는 키스와 하품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였지. 우리는 다른 계절로 이주한 토끼처럼 추웠지만 털가죽을 벗겨 서로의 몸을 덮어주진 않았다. 내가 울면 두 손을 가만히 무릎에 올려놓고 침묵하던 토끼.

당신이 화를 낼 때 그 목소리가 내겐 평화였다. 달빛은 꽃의 구덩이 속으로 쏟아진다. 꽃가루는 시간의 구덩이가 밀어올리는 기억이다. 내 얼굴을 뒤덮고 있는 꽃가루. 그림자여. 조금만 더 멀리 떨어져서 따라와줄래? 오늘은 달을 안고 빙글빙글 돌고 싶구나. 돌멩이 하나를 안고 춤추고 싶구나. 그림자도 없이. 

불안형의 애착 유형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랑이 주는 불안은 이누이트의 늑대 사냥과 같습니다. 날카로운 얼음 끝에 동물의 달콤한 피를 발라놓고, 늑대로 하여금 그 피를 핥다가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것이 이누이트들의 사냥 방식인데요, 사랑이 주는 불안도 이와 같아 ‘불안형’들은 자신이 피폐해져가는 것도 잊고 열심히 상대를 열망하고 탐닉하지요. 사랑을 맛보는 혀끝에 난 상처가 아리지만, 그 불안한 맛에다 온전히 내맡긴 마음만은 평화롭습니다. 모두가 잘못된 애착이라 해도 불안형들은 그런 사랑을 하곤 합니다.

여름의 청량한 시들을 소개한다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까닭은, 저에게 박서영 시인의 「달의 왈츠」가 어느 여름밤 불안형들의 독백을 담은 희곡처럼 읽히기 때문이에요. 불안한 사랑을 하다 산산조각나버린 심장, 그 파편을 달로 걸어두고 거기에 자신과 ‘당신’의 얼굴을 비춰보는 ‘나’의 마음은 평화롭습니다. 벌린 입이 하품처럼 보이던 때나 좀더 깊숙하게 사랑하지 못한 ‘토끼’ 같던 서로를 관조할 때도 있지만, 이내 마음의 파편을 기억의 구덩이에 던져놓곤 그 속에서 나오는 꽃가루로 온 얼굴을 덮기도 하지요. 그러고는 돌멩이가 되어버린 달, 그 마음을 들고서라도 오늘밤 춤을 추고 싶어합니다. 시의 서사가 한 편의 희곡 같지 않나요? 이렇게 화자인 ‘나’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불안한 사랑의 잘못을 짚어주기보다 그들의 평화를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한여름 밤의 꿈처럼 끝내 깨어질 두려움을 품고도 열렬히 사랑을 맛보는 것, 어쩌면 ‘불안형’들의 특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희도가 선택한 시💌
이미지 출처 : 김태리 브이로그 <거기가 여긴가>
문성현 선생님의 첫번째 추천 시집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는 김태리 배우의 브이로그에도 추천 도서로 깜짝 등장했습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희도와 이진이가 생각나는 책'이라고 꼽은 시집 속 희도의 추천시를 소개해드려요.

안부 (박서영,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하늘에서 누워 자면
얼굴에 달라붙는 나무 잎사귀와
피부를 간질이며 지나가는 소금쟁이의 긴 발끝이 보여

그것은 거꾸로 자는 잠

내가 가진 세계들은 아래로 흩어져
싸락눈이 되고 빗방울이 되리
피부를 만질 때마다 떨어지는 외로움

나는 하늘에 이렇게 적을 거야
우울이라는 재미와 불안이라는 재미와
슬픔이라는 재미와 고통이라는 재미와
기다림이라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고

요즘도 잠결에 눈물을 흘리십니까?
마지막 생존자에게 가닿을 내 그리움은
작고 가벼웠으면 좋겠어
가볍고 애틋하게 시작한 사랑처럼

입술보다 귓바퀴가 더 붉어지는 밤이야
그래, 모든 순간이 끝날 땐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하고 뭔가 쾅 무너지는 거지

세월이 흐른 후에 물어보는 사람이 꼭 있어
그때 무슨 일 있었느냐고
지금은 괜찮으냐고

여긴 물속입니다 하늘이 풍덩 빠져 있고
우울이라는 농담과 불안이라는 농담과
슬픔이라는 농담과 고통이라는 농담과
기다림이라는 농담에 허리가 휠 정도라고

그것은 거꾸로 흐르는 시간

부서져야 서로에게 흘러들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부서져서 바다가 되고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녹아서
같은 해변에 도착하고 있는 걸 보았다
💚문성현 선생님이 사랑하는 두번째 시💚


사랑에 관한 어려운 질문 (문태준,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너는 내게 이따금 묻네

너와 나의 관계를

그것은 참 어려운 질문

 

그러면 나는 대답하네

나란히 걸어가면서

 

나는 너의 뒷모습

나는 네가 키운 밀 싹

너의 바닷가에 핀 해당화

 

어서 와서 앉으렴

너는 나의 기분 위에 앉은 유쾌한 새

 

나는 너의 씨앗 속에

나는 너의 화단 속에

 

나는 너를 보면

너의 얼굴만 떠올리면

산나무 열매를 본 산새처럼 좋아라

 

그러면 너는 웃네

분수 같은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저는 한강을 좋아해 자주 강변을 산책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의 “나란히 걸어”간다는 장면에서 어느 여름날 오후에 애인과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그해 우리는>의 주인공 연인이 생각나기도 하고요. “나는 너의 뒷모습”이라고 표현했는데 바로 그 “분수 같은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웃는다니, 애인의 예쁜 미소를 보고 절로 따라 웃게 되는 장면도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니 「달의 왈츠」가 불안형의 노래라면 「사랑에 관한 어려운 질문」은 불안형에게 건네는 상대의 포근한 위로 같아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상대의 질문에, 산책하며 보이는 풍경의 아름다움에 비유해 상대를 다독이는 대답들. 그 대답들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불안형의 마음에 낯설지만 오래 지속될 ‘진짜 평화’를 심어주는 듯합니다. 여러분도 눈을 감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다고 생각하며 이 시를 암송해보세요. 마지막 연에서는 아마 감은 눈에도 눈부신 햇살과 청량한 여름 공기가 가득차는 기분일 거예요.

 

<우리는 시를 사랑해>의 독자분들께 「달의 왈츠」로 여름밤을 보여드렸으니, 「사랑에 관한 어려운 질문」으로 여름낮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공교롭게 제목마저 ‘서로를 부지런히 잊는 연인’과 그럼에도 ‘사랑에 무슨 끝이 있냐’고 반문하는 시집들을 소개해드렸네요. 추천의 말들을 건네며 달의 왈츠를 틀어놓고 춤추던 제 곁에 찾아 온, 사랑에 관한 어려운 질문도 따듯하게 답해주는 애인이 생각나기도 했어요. 아마 대부분의 독자분들이 저처럼 이 두 편의 시 중 하나라도, 비슷한 사랑을 경험하셨지 싶습니다. 두 사랑은 사뭇 다른 분위기지만 결국은 이어져 있는 느낌을 줘요. 밤낮이 다르지만 여름 하루인 것처럼요. 오늘 독자분들께서도 밤에서 낮으로 넘어가는 시간 동안 여름이 시원하셨기를 바랍니다.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시믈리에는 김선오 시인입니다.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시어로 주목받은 첫 시집 『나이트 사커』에 이어 최근 두번째 시집 『세트장』을 출간한 김선오 시인이 어떤 시를 고르셨을지 벌써 기대됩니다. 두 편의 시와 함께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우.시.사의 시믈리에가 되어주실 분 🙋‍♀️💛

아껴두고 꺼내보는 시가 있나요?
떠올리면 흐뭇해지는 시가 있나요?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읽어주고 싶은 시가 있나요? 
당신에게 그런 시가 있다면 알고 싶어요. 함께 나누어요.
우리는 시를 사랑하니까요!

우시사 독자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시가 있다면 아래 링크의 양식을 작성해 제출해주세요.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하나씩 꺼내어 우시사 독자분들께 대신 소개해드릴게요.
시 소개하러 가기!
 💬정정합니다 지난호에 소개된 이병률 시인의 시 「겹쳐서」 2연 3행의 "양말 구멍으로 내만 살이"를 "양말 구멍으로 내민 살이"로 정정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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