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해가 길어짐을 봅니다. 길어져 깊이 드는 늘씬한 노란 선과 여러가지 부채 모양의 면이 실내를 한층 아름답고 풍요로운 공간으로 먼저 바꿔놓기 시작하죠.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산책이 즐거워집니다. 무척 높고 푸르던 잎이 바로 이마 위로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구나, 오히려 푸르름을 한층 가까이 느낄 수 있는 때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잎마다의 낡은 구멍들에 붉은 빛이 감돌아 잎의 형태가 또렷하게 눈에 보입니다. 가득히 푸르며 적확하게 붉은 이 짧은 나날의 등등한 기운이 입추立秋를 알립니다.

Mahler: Symphony No. 5 – IV. Adagietto
Myung-Whun Chung, NHK Symphony Orchestra (Live at Suntory Hall, Tokyo – June 19, 2013)
장조에서 단조로, 다시 장조로 이동하며 조마 조마하며 마음이 개었다가도 흐려지고 떨어졌다 오릅니다. 보이지 않고, 지나치기 쉬운 작은 일도 소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대단한 비법이라는 것을 요즘 자주 생각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여름에서 가을로 향합니다.
가장 선명하고 아름다운 계절 앞에서 하루가 더욱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집니다.

자 조금 덜 덥군, 이제 니트를 입어야겠다... 라고 할 때 마음에 부는 바람은 '실을 입고 싶다' 입니다. 다시 말해, 꽃을 꽂거나 가구를 만들거나, 앞의 일들에 비해서 다소 간단해 보이는 그래픽 디자인 마저도, '선을 볼 때', 그리고 '면을 볼 때', '공간을 볼 때', 또 조직해서 '공기를 이룰 때'의 단계들을 정립해 나가는 즐거움을 향하다 보면 어느 문턱에서 마감에 이릅니다. 예술이거나 디자인, 공예인 것, 그런 의미없는 구분을 버리고 몸에 실을, 붓을, 물감을 더하는, 빛깔과 리듬이 있는 가을에 향합니다.


이상을 공유하는 동료들과, 기술을 초월한 응용 예술을 하며, 운명적으로 공방을 이어가는 다이앤의 컬렌션을 서울의 작은 가게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자주 공방 너머의 이야기를 전해준 오너 분께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서촌에 있는 팀블룸에서 공고히 서울에 다다른 그녀의 작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니트 종족을 끌어모으면 다이앤에서 모두 만난다고 믿습니다. 작은 장난처럼 보이는 모티프부터 온 세상의 색깔을 촘촘히 수놓은 듯한 황홀한 로직의 패턴 블로킹, 어떻게 완성되었을까를 머리속으로 그려보며 도무지 알 수 없을만큼 예뻐서, 수년간 지갑이 허락할 때마다 작업을 그러모아 왔습니다. 어린시절은 프랑스 Côte d’Azur에서 보내고 일찌기 장식예술학교(École des Arts Décoratifs de Nice)에서 배웠으며, 로마에 정착한 니트 디자이너 다이앤 드 클레르크(Diane De Clercq).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역의 여성들이 편직한 옛 기계로 떠낸 니트들은 입으면 실이 된 기분이고, 안으면 집이 떠오릅니다. 예쁘다는 말보다 그리운 감각입니다. 유행 타지 않는 심플하고 세련된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실크나 리넨, 울, 알파카, 면으로 꼬은 실은 그 자체로 흠뻑 물감을 머금은 붓입니다

하나 옴니버스 1집, 1992년. 제 머리 속에서 끊어져 올이 풀린 채 매듭지어지지 않는 일중에 하나가, 이 앨범을 들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꽤나 복잡한 심경이 들어서 저렇게 글자를 다 지운 아트웍만 남겨 놓고 이렇게 편지에 실어 보냅니다. 어떤 노래는 그저 생활의 패인 자욱을 그렇다고 패였다고 말합니다. 별다른 게 없어서 쓸쓸해지는 날들에. 가만히 듣고 있으면 한국말에 대해서 너무나 애틋해지고, 그 다음에 친구가 보고싶고 다녀온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모든 곳을 다시 가보고 싶어요. 또 세상이 마구 흘러가는 것 같다가, 잠시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지에 링크를 걸어두었어요!)

요즘 종종 노래를 시원하게 들을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습니다. 좋은 시설을 마련해서 많은 감상실이 생겨나고, 세련된 컨셉트의 공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노래 들을 수 있는 곳엔 꼭 노래에 푹 빠져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또 조금 슬픈 주인장도 필요합니다. 그저 일 없이 고된 하루들이 하나둘 모여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섯번째 뉴스레터에 오면서 사는 호흡을 좀더 자주 가볍게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달력에 절기마다 표시해놓고 먹거리도 챙기고 뜸해진 만남도 추진하고, 때에 맞는 작은 이벤트가 많은 날들 속에서 크게 얻는 생활에 감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곧 포도 농장에 들러야 할 때입니다. 
항상 철에 맞는 음식을 즐거이 나누시고요,
2025년 8월 7일, 이혜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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