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공동묘지 아래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사과나무 아래에는 아이가 놀다 버린 배드민턴 공이 뒹굴고 있다
사과나무 아래에는 지난밤, 누군가 마신 맥주병이 뒹굴고 있다
아주 오래전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는 마당에서 살았으면 했다
그때에는 사과가 그려진 앞치마를 두르고 프라이팬에
붉은 밥을 볶는 미래를 믿었다
앞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뒤를 후려치던 폭풍 속에서도 병원과 명절 사이를 씩, 웃으며
세계의 끝에 사는 알려지지 않은 어느 새의 한 종류처럼 살려고 했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아주 오래전
집을 떠난 여자를 추억했다
연인이 있던 여자였고 연인이 버린 여자였다
아이가 버린 배드민턴 공의 깃털이 파르르 바람에 떨리면
덜 익은 사과들이 쿵, 떨어졌다
아주 오래전에 잊혀진 시간 한 조각이 떨어진 것처럼
얼떨떨했다
우스운 일 아닐까, 이렇게 살아서 죽음을 추억하는 것은,
순간순간들은 죽어서 추억의 공동묘지에서 살아가는데
묘지 안에 든 추억들은 마치 살아 있는 살갗처럼 소름이 돋아 있다
까치발을 하고 아이가 돌아와서 공을 주워 갈 때
다시 사과 하나가 떨어지고
지붕에는 집까치가 후두둑한다
모든 추억들은 다시 공동묘지 안으로 들어가 잠들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