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65회 (2022.08.03)

안녕하세요, 만화 만드는 하양지입니다. 요즘의 저는 차기작 소재가 머리에 떠오르길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한가롭게 보내고 있습니다. 대학생이었던 저에게 시는 거대한 수수께끼 그 자체였습니다. 시를 읽을 때마다 형형색색 말들의 습격을 받는 양 위압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이 문장들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 것인지 암호를 풀듯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돌이켜보면 제 해석들은 전부 오독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 실패가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시집을 꺼내 읽었습니다. 여전히 이 방황이 흥미진진하다는 것을 느끼면서요.

💗하양지 작가가 사랑하는 첫번째 시💗

 

산벚을 잃고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너를 잃고 산벚나무에 기대어 울었네

산벚은 더이상 위로가 아니어서 울었네

 

나뭇잎 사이로 실종되던 노을도

붉은 나비에게서 나던 막걸리 냄새도

더이상 위로가 아니어서 울었네

 

이 나무 밑에 진탕처럼 흐르는 꽃잎 꽃잎들은 서로에게 서로를 포개면서 엄청난 재앙이 든 양 먼 성교의 편지를 보내는데 너의 머리칼 사이에서 연분홍으로 이겨지던 꽃잎 네 눈 속에 든 빛은 마치 날개처럼 꽃내를 머금고 저편으로 날아가는데 마치 손가락 하나 잘려서 붉은 피가 땅으로 뚝뚝 떨어지듯 말이야 꽃은 지고 산벚나무는 서둘러 서둘러 이름을 잃는데 마지막 자연이 내 속에서 뚝뚝 떨어졌어, 그때, 당신이 벌거벗은 자연이 되어 내 꿈에 젖은 꽃물처럼 나타났지만

 

더이상 위로가 될 자연의 별은 없었네

더이상 위로가 될 너가 없는 것처럼 울었네

이 지구에는 더이상 당신의 자연이 없어서

 

너를 잃고 울었네

산벚에게 더 줄 이름이 없어

너를 잃고 울었네

풀과 나무, 꽃들은 자신에 대해 설명하지도 않고 척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때로는 아름답다고 칭찬해줍니다. 자연은 사람의 어떤 행위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 시의 산벚나무 역시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산벚나무는 화자에게 아무 위로가 되지 못할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꽃잎을 가차없이 잃어버리는 산벚나무를 보며 화자는 자신이 잃어버린 누군가를 떠올립니다. ‘너’는 꽃잎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화자는 산벚마저도 잃어버립니다. 눈물을 흘리며 시작하고, 흐느끼면서 끝나는 이 시에 묘한 힘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위로받을 수 없다는 말은 위로받지 않겠다는 선언으로도 들립니다. 저는 ’시작’이 슬픔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풍경에도 기대지 않고 온전한 슬픔을 누린 뒤에야 결국 다시 살 수 있다고 시가 저에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막간 우.시.사. 소식💛
여름밤의 시 낭독회 - 정재학X이재훈
#여름밤의시낭독회 세번째 시간! 『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야?』의 정재학 시인, 그리고 『생물학적인 눈물』의 이재훈 시인이 함께합니다.

8월 4일 (목) 저녁 8시
문학동네 인스타그램에서 (@munhakdongne)
주하림 시인 mini interview! 

"진짜 천국은 천재성도 뭐도 아닌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거예요. 나 자신에게 미안할 일을 덜 만드는 것, 그것들이 지켜질 때 자기가 하는 사랑에 대한 답이 온다고 생각해요."

💗하양지 작가가 사랑하는 두번째 시💗

추억의 공동묘지 아래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사과나무 아래에는 아이가 놀다 버린 배드민턴 공이 뒹굴고 있다

사과나무 아래에는 지난밤, 누군가 마신 맥주병이 뒹굴고 있다

 

아주 오래전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는 마당에서 살았으면 했다

그때에는 사과가 그려진 앞치마를 두르고 프라이팬에

붉은 밥을 볶는 미래를 믿었다

 

앞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뒤를 후려치던 폭풍 속에서도 병원과 명절 사이를 씩, 웃으며

세계의 끝에 사는 알려지지 않은 어느 새의 한 종류처럼 살려고 했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아주 오래전

집을 떠난 여자를 추억했다

연인이 있던 여자였고 연인이 버린 여자였다

 

아이가 버린 배드민턴 공의 깃털이 파르르 바람에 떨리면

덜 익은 사과들이 쿵, 떨어졌다

아주 오래전에 잊혀진 시간 한 조각이 떨어진 것처럼

얼떨떨했다

 

우스운 일 아닐까, 이렇게 살아서 죽음을 추억하는 것은,

순간순간들은 죽어서 추억의 공동묘지에서 살아가는데

묘지 안에 든 추억들은 마치 살아 있는 살갗처럼 소름이 돋아 있다

 

까치발을 하고 아이가 돌아와서 공을 주워 갈 때

다시 사과 하나가 떨어지고

지붕에는 집까치가 후두둑한다

모든 추억들은 다시 공동묘지 안으로 들어가 잠들 준비를 한다

풍경을 바라보며 추억을 되새기는 일은 저에게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의식입니다. 어째서 지금보다 과거가 더 생생한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시를 읽으며 어린 시절 부모님이 꾸리셨던 포도밭 냄새, 고향집에서 조금 떨어진 산기슭의 무덤 몇 개, 메말라 있지만 절대 쓰러지지 않았던 겨울의 들풀들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이 이미지들이 내일보다 더 가깝습니다. 어쩌면 미래에서도 저를 기다리고 있다가, 묘지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함께할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현인들이 말하는 조언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현재, 바로 지금을 살라는 말이요. 지금을 사는 것에 번번이 실패하는 저이기에 이 시의 모든 말들이 너그럽게 느껴졌습니다.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시믈리에는 목정원 작가입니다. 비평에세이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으로 공연예술에 관한 사유를 나눈 목정원 작가가 사랑하는 시는 무엇일까요? 다음주에 함께 만나요!
💛우.시.사의 시믈리에가 되어주실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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